주일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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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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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8:1~14


인생의 지혜자라 불리는 솔로몬은 인간의 한계를 통찰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전 9:11). 세상의 조건이 남들보다 월등하고 외적인 자격이 완벽하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과 승리는 오직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 다시 말해 주님께서 그 손을 들어주시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통로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단순히 우리의 결핍을 채우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나 ‘도구’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만약 기도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응답이 더딜 때 쉽게 낙심하고, 자기 의가 충만할 때는 기도를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고 인격적인 사귐’입니다. ‘주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내 힘으로 홀로 설 수 없다’는 고백으로 주님의 마음에 나를 묶는 것이 기도의 참모습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열심히 기도하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선 17장의 '인자의 나타나심', 즉 종말과 재림의 배경 속에서 주어졌습니다. 개인의 종말과 시대의 종말을 향해 걸어가는 말세의 성도들에게,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사귐의 기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선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기도가 회복되고,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깊이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 (1~8절)
‘불의한 재판장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은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비유를 통해 교훈을 제시하실 때는 보통 비유를 먼저 설명하신 후 그에 대한 설명과 주제로 결론을 맺으시는데, 여기에서는 비유의 목적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규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시는 ‘항상 기도함’은 기도의 횟수를 늘리라는 기술적 권고가 아닙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을 향한 사귐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의 자세와 영적 호흡을 유지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특히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적은 ‘낙심’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약속을 무시하고 세상을 향해 달려갈 때, 홀로 믿음을 지키며 기도하는 것은 외로운 싸움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본질적으로 낙심하고 포기하려는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한 도시에 사는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드십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며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신 6:4~5)과 이웃 사랑(레 19:18)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한 자였습니다. 반면 과부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로서 아무런 힘도, 인맥도, 뇌물을 줄 돈도 없던 소외된 이였습니다. 원한의 내용이나 원수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과부에게 너무도 억울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주’에 해당하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서’라는 동사가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어, 과부가 반복적으로 재판장을 방문했음을 알려줍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는 어구를 직역하면 ‘정의를 실행해 주소서’가 됩니다. 과거명령형이니 지금 당장 실행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에서 ‘듣지 않다’가 미완료시제이니 과부의 반복적 요청을 이 재판장은 한동안 계속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는 표현은 재판장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재판장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번거로움’이란 명사는 ‘때리다’, ‘두들기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많이 맞아서 느끼는 고통이나 피곤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과부가 자주 와서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괴롭히다’는 동사는 고린도전서 9:27에도 나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여기서 ‘치다’는 ‘눈 아래를 쳐서 멍들게 할 만큼 심한 타격과 고통을 준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불의한 재판장은 선한 의지가 없었지만 과부의 거듭된 요청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도 짧지만 예수님의 설명 또한 간결합니다. 1절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여기서는 ‘주’라는 호칭이 사용됩니다. 주께서는 과부가 아니라 재판장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시고 그를 ‘불의하다’고 평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은 과부의 지속적인 간청에 못 이겨 정의를 실행하겠다고 한 그의 혼잣말 혹은 생각을 가리킵니다. 불의한 재판장조차 그렇게 생각했다면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신자들의 부르짖음에 속히 응답하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재판장의 불의함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대비되는 반면, 과부와 신자들의 기도 태도가 평행을 이룹니다. 과부가 자주, 늘 재판장에게 간청했듯이 신자들은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는 기도의 빈도 혹은 지속성만이 아니라 그 간절함과 기도의 태도 또한 공통됩니다. 17장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은 후에 그중 한 명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누구를 의식하거나 자랑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감격과 기쁨을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간절함과 절박함은 자연스럽게 ‘부르짖음’으로 이어집니다. 또 다른 대비는 재판장이 ‘얼마 동안’ 과부의 요청을 무시했던 반면,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오래 참지 않으시고 속히’ 원한을 풀어주시는 모습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컫는 명칭이었지만, 여기서는 ‘믿음과 돌이킴으로 하나님께 응답함으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입은 모든 신자’를 의미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과부의 끈질김이라기보다는 ‘불의한 재판장과 자녀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 끈질기게 간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내의 기도와 믿음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귀찮아서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기도하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시간표대로 즉각 응답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신속하게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8절의 고백을 우리는 두려움으로 직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말세의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의 자리를 지키라는 강력한 격려이자 도전입니다. 기도 없이는 믿음이 유지될 수 없고, 믿음 없이는 참된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 믿음의 가장 확실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 바리새인의 기도 (9~12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도 불의한 재판장 비유처럼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기도에 있어서 믿음과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이제 응답 받는 기도의 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비유는 구체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즉 종교적 기득권과 영적 교만에 사로잡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향한 경고였습니다. 복수로 표현된 것을 보면,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 교만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에스겔 33:13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스스로의 공의를 믿고 죄악을 행했는데, 그들의 의로운 행위는 기억되지 않으며,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종교적 엘리트인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동족에게 멸시받던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카비 전쟁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종교 당파로서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지키려 했습니다. 당시 세리는 관세를 담당했던 자들입니다. 신약 시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시장세나 국경 관세를 경매에 붙여 제일 높은 금약을 써내는 사람에게 임대했습니다. 임대인들은 자신이 제출한 금액만큼만 당국에 지불하면 되었고, 나머지 금액은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기에 세리는 종종 도둑과 강도로 묘사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따로’ 기도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이는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 혹은 ‘자신에 대하여 기도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나 사귐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위선적인 행위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인해 감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남과 비교하여 우월한 자신의 종교적 성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바리새인은 내심 흐뭇하였을 것이요, 미소까지 머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이 세리’라는 표현에는 경멸적인 분위기가 다분히 녹아 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할 뿐 아니라 곁에 있던 세리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 자기가 한 것을 인해 자랑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드린다고 과시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관습에 따른 열심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부적절한 금식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고, 압제하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끊어주는 것,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사 58:1~6). 금식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이들을 향해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정신인 ‘의와 인과 신’, 곧 사랑과 자비와 신실함은 통째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겉으로는 유창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완벽하게 실패한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찬양도 없었고, 자신의 죄에 대해 아파하는 회개도 없었으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간구도 없었습니다. 오직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독설과 자기 자랑만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세리의 기도 (13~14절)
그러나 바리새인이 그토록 경멸하던 세리의 기도는 완전히 결이 달랐습니다. 세리는 성전 중심부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던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죄악 됨과 비참함을 온몸으로 직면했기에 고개조차 들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고 참혹한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회개한다는 영혼의 절규입니다. 그리고 그는 짧지만 강력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나 자격이 자신에게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자신의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분에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두 사람의 기도가 끝났을 때,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충격적인 판정을 내리셨습니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철저하게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한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영적 역전이 가능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의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나 종교적 공로로 쟁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그 자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의로 가득 찬 강한 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엎드리는 가난하고 낮아진 심령의 편에 기꺼이 서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자세
-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기도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한 과부는 사회적·경제적 약자로서 그녀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자였습니다. 과부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포기하지 않는 간청’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수시로 재판장을 찾아갔고, 결국 불의한 재판장은 귀찮아서라도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단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극대화하여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눈물로 간구하는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고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재판장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도우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의 자리에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신실하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끝까지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귐의 기도입니다.
-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를 의지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켰고, 금식했고, 십일조를 드렸고, 종교적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기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회개도 없었고, 긍휼도 없었고, 은혜도 없었습니다. 감사조차 자기 자랑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의만 보였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다른 사람과 비교했습니다. 비교는 멸시를 낳고, 멸시는 교만을 낳고, 교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의로움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으로 전락시키는 신앙적 모독을 범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가로막는 가장 무서운 장애물은 드러난 죄보다 ‘자기 의’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지만, 자기 의에 사로잡힌 교만한 자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교만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오래 한 우리에게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무서운 독소임을 우리는 두려움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오늘 주님이 들려주신 두 가지 비유는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됩니다. 불의한 재판장 앞의 과부는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성전의 세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의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찾으시는 사람은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 없이는 저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눈물로 사귐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각자의 기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자기 의를 자랑하며 타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긍휼만을 구하는 세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입술의 모든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차가운 말들을 멈추어야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려놓고 잠잠히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조건이나 영적 성공을 자랑하며 바리새인처럼 차가운 시선과 정죄의 뒷말로 상처를 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가난한 심령들이 모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비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죄로 인해 방황하는 자들이 마치 따뜻한 영혼의 고향에 온 것처럼 용납 받고 회복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좁은 기준과 잣대로 지체들의 눈 속의 티를 정죄하지 않고, 주님의 따뜻한 시선과 긍휼의 마음으로 연약한 이들을 품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마침내 높이시는 주님을 삶의 모든 현장에서 깊이 경험하는 신실한 성도님들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