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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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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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적인 부자와 가난한 자 (19~21절)
이 비유에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한 부자와, 상처투성이 몸으로 그 부자의 대문 앞에서 부스러기를 기다리는 나사로를 대조합니다. ‘자색 옷’은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바다달팽이의 배설물로 염색한 매우 귀하고 비싼 옷감으로 만든 겉옷이었고, 속옷으로 입었던 ‘고운 베옷’은 가는 마로 직조한 고가의 옷이었습니다.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은 것은 왕처럼 치장했음을 보여 줍니다(7:25). 또한 그의 집에서 날마다 열린 호화로운 잔치는 왕궁의 잔치를 연상시키십니다. 이 부자는 그야말로 왕처럼 살았습니다. 부자와 대조적으로 ‘한 거지’는 이름이 언급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서 이름이 언급된 인물은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히브리어 ‘엘르아살’의 헬라어 형태며, ‘하나님이 도우셨다’ 또는 ‘하나님이 돕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 ‘거지’로 번역된 헬라어 ‘프토코스’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단어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6:20)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하나님 나라를 자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땅에는 거지는 아니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삶의 목표였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가 당시 청중에게는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굶주리고 있던 많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물 찌꺼기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굶주렸고, 버림받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개는 주로 애완견으로 주인에게 사랑을 받는 동물이지만,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는 불길하고 상스럽고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피부병은 유대인들에게 그 자체로 부정했고,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부정한 것이었고, 부정한 동물인 개들이 그 헌데를 핥았으니 나사로는 개들과 같은 수준의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신의 대문 앞에 있던 나사로에게 철저히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과 철저히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비유는 부자가 얼마나 무정하고 매정한 사람인지를 고발합니다. 그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세상의 위로는 없었으나, 그의 이름의 뜻처럼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내면의 사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역전된 두 사람의 운명 (22~26절)
그 가난한 자가 죽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는데, 나사로는 장사되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그가 일반적인 장례 절차에 따라 장사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에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는 누가복음의 주제가 이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죽은 후에 두 사람의 처지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음부’로 번역된 헬라어 ‘하데스’는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스올’을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인데, 주로 불의한 자들이 사후에 가는 곳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0:13에서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라고 한 말씀을 보면 음부는 죄인들이 마지막에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라 중간 기착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28에 “ ...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한 말씀을 보면 지옥은 몸과 영혼이 함께 들어가 멸망 받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일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정리해 보면 음부는 죄인들이 최종 심판을 받기 전까지 영으로 갇혀 있는 임시 처소이고, 지옥은 크고 흰 보좌에서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부활체로 몸과 영혼이 함께 가게 될 최종 기착지, 궁극적인 영벌(永罰)의 장소입니다. 땅에서는 거지가 부자를 올려다보았는데 천상에서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과 위로를 누리고 있는 나사로를 올려다 본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의 등장입니다. 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고 언급합니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창시자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해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은 나사로가 아브라함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했습니다. 그가 나사로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땅에 있을 때에 나사로의 비참한 상황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몰라서 나사로를 돕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고도 돕지 않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얘야’라고 친근하게 부른 것이 흥미로운데, ‘얘’라고 번역된 ‘테크논’은 ‘자녀’ 혹은 ‘후손’에 대한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살펴본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큰 아들을 ‘얘(테크논)’라고 불렀습니다(15:31). 주목할 점은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그 혈통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본인이 현세에서 복을 많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사실을 들어 부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는 사후에 두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자가 있는 곳과 나사로가 있는 곳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기에 나사로를 부자가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놓여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수동태이므로 신적 수동태로 간주하여 하나님이 이 구렁텅이를 만드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26절은 ‘그리하여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운명의 역전을 가져왔습니다. 세상에서 복을 누리던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고난 받던 이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주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임신 한 후에 부른 마리아의 찬가에도 나옵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1:53). 또한 예수님의 평지설교에도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6:25).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종교적,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던 바리새인들을 음부에 들어간 부자로 비유하셨고, 종교적,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세리나 창녀, 죄인들을 나사로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사로와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돈을 좇아 살며 그 소유를 베풀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천한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부자의 두 번째 요청과 아브라함의 거절 (27-29절)
부자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형제들이 동참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환생시켜 자기 아버지의 집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은 이타적이며 선교적이기까지 합니다. 나사로로 하여금 그들이 회개하도록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고대 유대 가족은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구조였지만, 아버지가 부재할 경우 형제 중심 구조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큰 형이 리더십을 가집니다. 아버지의 집에 형제가 다섯 있다는 것은 가부장인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형제들이 모여 살던 대가족 구조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한 손에 있는 손가락 수 전체로, 모든 가족을 상징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이 그 형제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가난한 자를 돕도록 명하기에(출 22:21-24; 신 24:10-15) 아브라함의 주장은 근거가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나 그들에게 가는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 주면 그들의 불신앙이 변화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1절은 비유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말씀대로 살지 않고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자들에게는 다시 살아난 사람이 가서 증언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1절에는 두 가지 조건절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조건절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입니다. 이는 조건절의 내용이 사실임을 가정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이 아닌 현재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절은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해도’입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미래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이유를 잘 설명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 24:1~12).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바울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고전 15:5~8). 불신자들은 모세와 율법이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신 것과 그를 통해 부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면 자신도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46~47).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리새인들이 비웃으며 거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언급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을 잘 지키고 잘 가르친 분은 예수님이며, 바리새인들은 율법도 지키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부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14~18절에서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이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고, 부활은 그들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자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제공합니까?
- 지금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
“너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본문에서 가장 두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살아 있을 때만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선택의 기회가 없어집니다. ‘형편이 되면 나중에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베푸신 은혜는 마지막 순간에도 열려 있었지만, 그것은 회개의 기회가 항상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붙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깊은 구렁텅이를 십자가로 메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이라도 돌이켜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오늘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부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사로의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세상은 부자를 성공한 사람이라 불렀지만 하나님은 나사로를 자신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사로가 완전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나사로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자리, 버림받은 자의 자리, 고난 받는 자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본문의 절정은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놀랍게도 이 말씀은 모세와 선지자의 증언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완성이시며 구약의 성취이십니다. 구원은 기적을 보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가 아니라 말씀 앞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재물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 재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를 비교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참된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참된 부요함은 세상의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공은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호화로운 식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과 재능, 그리고 물질을 맡기신 이유는 그것을 쌓아두고 혼자만 즐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셔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신뢰하시며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삶을 드리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생활, 기도 생활, 헌금 생활은 우리 영성의 온도계입니다. 진짜 부요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입니다. 자기 손에 쥔 소유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눈을 열어 소외된 지체들을 돌아보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과 시간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복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으며 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가 증언한 바로 그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생명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심판의 기준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며 이웃을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과 시간과 은사를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대문 앞에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