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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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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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6:14~18


2000년대 초중반에 한국 기독 청년들 사이에서 ‘세상의 중심이나 높은 자리(고지)로 올라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고지론(高地論)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낮은 곳이나 변두리로 가야 한다’는 미답지론(未踏地論)이 충돌하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고지론은 청년들에게 ‘크리스천이 사회 각계의 엘리트나 지도자가 되어 기독교적 가치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기독교 문화관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고지론이 기복신앙이나 성공주의와 결탁하기 쉽고, 사회적 성공만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삶’을 강조하는 미답지론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파워집단이라 불리는 국회의원, 정치가, 판검사, 변호사, 의사, 교수, 그리고 기업인들 중에 기독교 신자가 무려 30~40%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제대로 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높아지는 법’에만 관심이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자신의 성공 수단으로 삼고, 하나님마저 자신의 야망의 후원자로 삼으려 했던 바리새인과 같은 탐욕이 신자들 안에도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는 신앙생활 자체에 익숙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지만 정작 주님과의 사귐은 점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가치를 더 추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았고, 종교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은 단순히 돈이나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문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종교를 무너뜨리시고, 율법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시며,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랑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일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배운 것은 우리가 가진 재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설 텐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찬과 그에 따른 상급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외식을 떠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서라 (14~15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재물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고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직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자들 곁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부분은 실상 문장이 아닙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이 문구는 주어 역할을 합니다. 바리새인들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니 ‘그 바리새인들’이 됩니다. 제대로 번역하면 ‘돈을 좋아하는 그 바리새인들’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바리새인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돈을 좋아하는 특정한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신명기 28장에 말씀에 순종하여 받는 복과 불술순종하여 받는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28:2~19의 축복 조항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이 곧 경건의 증거이자 하나님의 복이라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가난은 저주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탐욕의 눈을 가졌기에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 ‘비웃다’라는 동사는 훗날 관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23:35). 예수님은 그들의 치명적인 문제인 ‘외식(위선)’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종교 행위로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옳다 여기고 높임을 받으려 했으나, 그 중심은 탐욕과 세상적 자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영광을 더 사랑했습니다. 신앙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평가를 향할 때 우리는 외식에 빠집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때는 죄를 짓는 때보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회개할 수 있지만 자기 의에 취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론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고 끝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참된 의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가면을 벗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상처도, 실패도, 연약함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16~17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예수님은 구속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선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이전까지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전체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성막도, 제사도, 유월절도, 다윗의 왕권도, 선지자들의 예언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침입하다’라는 동사를 문법적으로 능동태로 볼 수도 있고 수동태로 같이 볼 수도 있습니다. 능동태로 보면 ‘힘써서 들어가려고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수동태로 본다면 ‘들어가도록 강권적으로 권면을 받는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후자의 의미가 하나님 나라로 지속적으로 초청하시고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 시대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바리새인이 무시하던 세리와 죄인들, 더 나아가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강력하게 초청받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까지의 기간과 요한부터의 기간을 대조시키셨습니다. 요한까지의 기간은 율법과 선지자의 기간, 즉 구약 시대이며, 요한부터의 기간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 기간, 즉 신약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 이후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선포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구약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책이고, 신약 성경은 이미 오신 메시아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이 말씀은 율법의 영원성을 선언하는 동시에 율법의 완성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지 죄를 제거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그저 규칙을 더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억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게 됩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충성하라 (18절)
많은 사람들이 18절을 읽으면서 왜 갑자기 이혼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앞의 내용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했습니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결혼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이혼을 남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문제임을 지적하십니다. 성경에서 결혼은 언제나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고,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것을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언약을 깨뜨렸지만 주님은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우리가 불성실했지만 주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우리가 떠났지만 주님은 십자가까지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부 된 교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종교생활이 아니라, 신랑 되신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신랑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다른 것을 최고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가장 강하게 책망하셨던 것이자, 오늘날 우리도 경계해야 할 신앙의 함정입니다. 외식의 본질은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시장 귀퉁이에 서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티를 내며, 구제할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킨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의무(십일조, 금식 등)를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세상적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칠했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마 23:27). 외식에 빠지면 영적 감각이 마비됩니다. 그러다 보니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눈앞에 오셨고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음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의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비웃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켰으나,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식은 2천 년 전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내 연약함과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고 싶어 내 마음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은 외모, 직분, 재산, 지위를 높이 평가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인간의 모든 외식은 참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껍데기뿐인 종교 생활(외식)을 과감히 벗겨내고,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 앞에 평강 가운데 담대히 서야 합니다.
-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규칙을 더 잘 지키는 일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켜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바로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살아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며 외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의는 예수님 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스스로 율법을 완성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억지로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므로 기쁘게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간음은 종종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신부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한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으로 표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물과 자기 의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외식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 불성실함을 드러냈습니다. 결혼은 언약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오신 신랑이십니다. 십자가는 언약적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가 신실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18절은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넘어서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는 신랑이다. 너희도 언약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신실한 신부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중심을 세상에 빼앗긴 영적 간음 상태에 있습니까?

나가면서
본문 속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면 누구보다 훌륭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금식도 했습니다. 십일조도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말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을 거절했습니다.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율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사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면서 직분도 받고, 성경 지식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더 많은 종교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주님과의 깊고 진실한 사귐’입니다. 신앙생활은 규칙을 더 잘 지켜서 나를 증명해 내는 종교 게임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의를 이루려는 교만과 착각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며 그분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때, 성령의 역사 가운데 기쁘게 순종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또한 우리의 가정, 관계, 언어, 가치관을 변화시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의 평가와 체면에 목숨을 걸면 안 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죽어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신앙에서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신랑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신실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신부인 우리를 향한 언약적 사랑을 완성하신 그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다이내믹한 사귐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