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에 합한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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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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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시절 함께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던 목사님들이 이제는 상당수 은퇴하셔서 자주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있었던 기도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개척하신 교회에 큰 어려움이 생겨 상황이 아주 안 좋다고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들, 참 마음이 힘듭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다’는 말이 딱 제 처지입니다.”그 자리에 모인 목사님들이 함께 씁쓸하게 웃기는 했지만, 그 대화는 오랫동안 제 마음에 깊은 여운과 공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도 예고 없이 아찔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기도 하고, 평생을 일구어온 사업이 한순간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건강의 이상으로 병원 침대에 눕게 되기도 합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문득 거울 속 늘어난 주름과 나이를 의식하며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깊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직업을 잃어버려 위기를 맞이한 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해석하기 쉽지 않고 얼핏 읽으면 당황스런 구절들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은 왜 자기 재산을 낭비하고 심지어 장부까지 조작한 옳지 않은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하셨을까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주님의 말씀은 불법으로 번 돈을 가지고 세상 인맥을 쌓으라는 뜻입니까? 자칫하면 주님의 의도와 달리 해석할 수 있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 연락하는 부자 등의 스토리를 통해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가져야할 성경적인 재물관을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재물을 대하거나 다루는 모습을 보시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탄식하실까요? 오늘 말씀은 단순히 재물에 관한 설교가 아니라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기쁨으로 섬기는 신실한 주님의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청지기 (1~3절)
비유는 어떤 부자 밑에서 일하던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에게 들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청지기는 단순한 노예나 하인이 아니라, 주인의 가문과 재산 전체를 법적으로 대리하고 관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자였습니다. 주인은 소문을 듣고 청지기를 불러 사실을 확인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이는 ‘내가 왜 신뢰했던 너에게 이런 배신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주인의 탄식이자 엄중한 추궁입니다. 이어 주인은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여기서 ‘셈하라’는 헬라어 원어상 과거명령형으로, ‘지금 당장 장부를 가져와 결산하고 물러나라’는 즉각적인 해고 통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청지기의 다급한 상황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네 인생을 셈하라”고 하신 이 선언은, 언젠가 종말의 날,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모든 삶의 궤적을 그대로 고해야 하는 ‘영적 결산’을 강력하게 상징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시간은 내 것이고, 물질은 내가 피땀 흘려 번 것이니 전적으로 내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건강도, 재능도, 내 인생의 미래도 모두 내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의 선포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물질도, 시간도 원래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자기의 뜻과 능력대로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를 맞이합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결산의 날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은퇴 이후의 노후 대책을 위해서는 온 힘을 기울여 치열하게 준비하면서도 정작 영원한 나라,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날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만약 오늘 밤 주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시며 “네 인생을 셈하라”고 하신다면,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준비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면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잘 나가던 청지기의 삶에 갑작스러운 종말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본문 3절에 청지기가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라고 고백할 때, ‘빼앗으니’는 현재시제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특권과 기반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음을 직감한 것입니다. 청지기는 자기가 비참해진 원인을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원망하지만, 사실 문제의 원인은 주인의 부당함이 아니라 청지기 자신의 불성실과 ‘낭비’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바닥에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당시 유대 사회에서 거친 노동인 ‘땅을 파는 일’은 주로 포로들이나 종들이 하는 천한 일이었고, ‘구걸하는 일’역시 예루살렘 성전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하던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몸은 고된 노동을 감당할 힘이 없고, 마음은 청지기 시절의 자존심 때문에 차마 구걸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위기를 만나야 비로소 정직하게 자신을 직면하게 됩니다. 건강을 잃을 때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관계가 깨질 때 사랑의 귀함을 깨달으며,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흉년의 궁핍함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 냈듯이, 이 청지기도 절망의 끝에서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영적 실상이 바로 이 청지기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과 은혜를 마음대로 낭비하여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과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던 절망적인 존재였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위해 스스로 ‘땅을 파서’의를 쌓을 힘도 없었고, 영적으로 파산하여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고 ‘빌어먹을’자격조차 없던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실패와 참혹한 죄의 무게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진 엄청난 죄의 빚을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대신 청산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의 청지기가 살아날 길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 안에서만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미래를 준비한 청지기 (4~7절)
절망하던 청지기는 마침내 한 가지 기막힌 해법을 깨닫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그가 궁리해 낸 방법은 주인에게 빚진 채무자들을 일일이 불러 채무 증서의 금액을 파격적으로 줄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는 그의 말은, 실직한 이후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두겠다는 철저한 계산이었습니다. 여기서 ‘부르다’라는 동사는 은밀한 야합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권위 있게 소집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실 때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막 3:23). 즉 청지기는 아직 자신에게 남아 있던 ‘주인의 대리인’의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채무자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는 기름 100말을 빚진 자의 증서를 50말로 고쳐 쓰게 하고, 밀 100석을 빚진 자의 증서를 80석으로 깎아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기름(감람유)과 밀은 가장 중요한 생필품이었습니다.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 ‘바트’는 약 34리터에 해당되는 양입니다. 따라서 기름 백말은 약 3,400리터나 됩니다. 다 자란 올리브 나무에서 평균적으로 25리터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3,400리터는 올리브 나무 120그루에서 나오는 양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데나리온 정도입니다. ‘석’이란 헬라어 단어 ‘고르’로 ‘바트’의 10배에 해당합니다. 밀 백 석은 약 100에이커 땅에서 소출될 수 있는 양이며, 돈으로 환산하면 2500데나리온 가치의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청지기가 줄여준 금액은 기름 50%, 밀 20%로 비율은 다르지만,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둘 다 똑같이 徴데나리온(노동자의 500일 치 품삯)’이라는 큰 액수였습니다. 청지기는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며 다급하게 사람들을 재촉합니다. 부정한 일을 행하는 자의 떨리는 불안감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채무자들의 빚도 탕감해 주며 주인에게 큰 물질적 손해를 입혔습니다.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칭찬 (8절)
그런데 반전이 생깁니다. 왜 주인은 이 기막힌 사기극을 벌인 청지기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지혜 있게 행하였다”며 칭찬했을까요? 청지기가 이렇게 대담하고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주인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고작 돈 몇 푼에 전전긍긍하는 속 좁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주인의 대리인 자격으로 사람들에게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주인이 정말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은 분이라고 칭송할 것이 뻔했습니다. 주인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와 자비로운 평판이 한없이 높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성품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이미 베풀어진 탕감의 은혜를 취소하지 않을 것임을 청지기는 알았습니다. 결국 청지기는 주인의 ‘무한한 자비와 너그러움’이라는 성품에 자신의 전 인생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 탕자의 아버지는 모두 엄청난 부자로 나옵니다. 오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주인이 소유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면 청지기가 빚을 깎아준 행동을 인하여 크게 분노하며 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를 내기보다 칭찬하였습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소작인들에게 깎아준 액수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것은 주인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인의 것을 관리하면서 주인의 명예를 올려주어야 합니다.
주인은 그의 부정직함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주인의 성품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결단한 그의 ‘현실감각과 지혜’를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슴 아픈 탄식을 쏟아내십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신자들, ‘빛의 아들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말은 ‘자기 세계의 일을 처리할 때에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여 온갖 지혜를 짜내고 밤낮으로 치열하게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다고 말하는 ‘빛의 아들들’인 성도들은 과연 영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느냐는 책망 섞인 탄식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위기의 때를 대비할 만큼 지혜롭다면, ‘빛의 아들들’은 영원을 바라보며 현재를 더욱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미래의 생계를 위해 준비하지만,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나라를 위해 오늘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을 주의 뜻대로 감당하며 우리의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자의 재물관 (9~13절)
예수님은 이 난해한 비유를 마무리하시며 강력한 교훈을 선포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여기서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은 도둑질이나 불법으로 모은 돈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불의’는 종종 ‘세속적인 것’, ‘세상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6:1에서 교회 내부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교인들을 책망할 때, 세상 재판관들을 향해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재물 자체가 원래부터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재물은 속성상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우상화되거나 잘못 사용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재물의 소유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청지기는 자신의 육체적 생존과 미래의 유익을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입니다. 재물을 자기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 쌓아두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재물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돈을 벌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받은 재물을 수단으로 삼아 천국에 함께 갈 사람(영적 친구)을 얻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재물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섬김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 영적 친구들은, 훗날 우리가 이 땅의 장막을 벗고 눈을 감을 때, 영주할 처소, 즉 영원한 천국 문 앞에서 우리를 환영할 것입니다. 천국에 갈 때 이 땅의 화폐나 자산은 한 푼도 싸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돈을 하늘나라 은행으로 송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재물로 구제하고, 선교하며, 영혼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지들을 보십시오. 멕시코의 임원석과 안요섭, 말레이시아의 김동조, 말라위의 김용진, 미주 장신의 에스더박, 동티모르의 이한성, 볼리비아의 이생우 등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내는 선교 후원비와 기도가 그곳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살려낸다면, 훗날 우리가 천국 문에 들어설 때 그 선교지의 영혼들이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우리를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충성’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반복하시며 세 가지 엄중한 대조를 하십니다. 첫째, 작은 것과 큰 것의 대조입니다. 이 땅의 재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일상의 작은 물질과 사소한 직무에 충성하는 자라야 하나님은 큰 복을 주십니다. 둘째, 불의한 것과 참된 것의 대조입니다. 세상의 썩어질 재물을 주님의 뜻대로 신실하게 사용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하늘의 영원하고 ‘참된 것’을 맡겨주십니다. 셋째,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의 대조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자산은 사실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즉 잠시 맡은 ‘남의 것’입니다. 이 남의 것에 청지기로서 성실하게 행할 때, 비로소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진짜 우리의 것’을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여기서 ‘작은 것’,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다 세상의 재물을 가리킵니다. 물질의 주인이시고 물질을 맡겨주신 하나님이 쓰기 원하시는 대로 내어 드리는 것이 바로 청지기적 물질관입니다. 이 원리는 재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능력, 시간 등도 해당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이 선언은 돈을 조금 덜 사랑하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재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격성을 가진 ‘맘몬’이라는 신이 되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듭니다. 재물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우상이 됩니다. 돈은 불안을 잠시 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안을 주십니다. 돈은 소유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예수님을 예배 시간에만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통장에서도, 소비에서도, 선택에서도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재물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재물을 맡은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가장 민감한 영역인 ‘재물을 어떻게 다루고 사용하는가’를 통해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나가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사용하는 태도, 시간을 관리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 우리의 진짜 신앙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는 하나님과 재물 중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지표입니다. 돈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풍요 속에서도 늘 염려하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더 가지려는 욕심의 감옥에 갇힌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단번에 청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셔 들이면, 우리는 더 이상 재물의 종이 아니라 맡겨진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충성된 청지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물질, 시간, 건강, 달란트가 결코 우리 것이 아님을 겸손히 고백해야 합니다. 맘몬의 강력한 지배를 예수의 이름으로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삶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복음과 영혼 구원을 위해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우리 인생의 장부를 들고 우리를 결산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영원한 하늘의 상급을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