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두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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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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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모를 주시고 가정을 허락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날은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단순히 인간관계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비유의 중심은 탕자가 아니라 끝까지 기다리고,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품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을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세 비유의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기쁨과 잔치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중심을 발견합니다. 복음은 착한 사람이 하나님께 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죄인에게 찾아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단순히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과연 두 아들 중에 누가 더 탕자인지, 나는 둘 중에 누구와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한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집을 떠난 둘째 아들 (11~16절)
구약성경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두 아들을 둔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몇 가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그리고 아담,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아브라함, 에서와 야곱 그리고 이삭,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리고 요셉. 그들의 이야기에서 부모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거나 더 큰 복을 받은 아들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내게 돌아올 분깃’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게 되어 있는 재산(주로 토지)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21:17에 의하면 장남의 몫은 두 배이므로,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경우, 장남은 3분의 2를 받고, 차남은 3분의 1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요청은 당시 문화에서 단순히 유산을 달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직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한 것은 관계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재물을 다 모았다’는 것은 가지고 다닐 수 없는 토지나 가축 등의 경우 처분해서 돈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참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결국 방황이 되고, 방종이 되고, 파멸이 됩니다.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허랑방탕함’을 직역하면 ‘구원의 소망 없이 살아감’입니다. 그는 순간의 즐거움을 따라 살았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친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자 사람들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곳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돼지를 치는 자리에까지 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레 11:7). 더구나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비참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영적으로도 주리게 됩니다. 돈이 있어도 공허합니다. 성공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도 마음은 외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행복하려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영혼은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둘째 아들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떠난 둘째 아들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자기 길로 갑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자기 뜻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 (17~19절)
17절은 이 비유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이 말은 문자적으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죄는 인간을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둘째 아들은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집의 풍성함과 자신의 비참함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고난 자체가 은혜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통해 우리를 깨우십니다. 둘째 아들은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아버지 집이 풍성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는 품꾼들이 많아도 굶주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기 몫을 챙겨 집을 나오면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서 좋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자기 집 품꾼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자신이 못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은유법을 사용해 간접적으로 불렀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유산을 미리 받아 탕진함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으니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결과 불효했으니 아버지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고, 자기 몫을 달라하여 나갈 때는 언제이고 이제 쫄딱 망해서 다시 아버지께로 가려하니 얼마나 낯이 뜨겁겠습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고백은 아들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들로서는 아버지 앞에 설 면목이 없으니 그저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려 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그의 고백 속에는 더 이상 변명이 없습니다. 자기합리화가 없습니다. 진짜 회개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붙듭니다.
둘째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 (20~24절)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한자에 ‘親’자가 있습니다. ‘친할 친’자입니다. 이 단어를 분해해보면 ‘나무에 서서 바라보다’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도 잘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둘째 아들이 아직도 먼 거리에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았습니다. 그를 측은히 여기며 달려갔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 나이 많은 아버지가 달린다는 것은 체면을 내려놓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의 체면보다 아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돌아오는 자를 정죄하기보다 품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회개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내가 자격을 갖추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길이 되셨으니 지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도리어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종들에게 명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신분 회복을 의미합니다. 좋은 옷은 명예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가락지는 권세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종은 신을 신지 않습니다. 신발은 자유인으로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둘째 아들은 품꾼으로나마 받아들여진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큽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당시 유대인들은 평소에 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에,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잔치는 최고의 잔치에 해당합니다. ‘살진 송아지’는 통상적인 가정의 일회용 음식이 아니라 마을 전체나 많은 사람들의 초청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음식입니다. 따라서 이 식사는 돌아온 아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잡으라’와 ‘즐기자’가 과거 명령형입니다. 지금 당장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며 지금 당장 즐기자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 혹시라도 문제를 제기할 비난자들의 목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결과 둘째는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 앞에서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가 없는 당당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쁜 마음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율법은 불순종한 아들을 돌로 치라고 했으므로, 그러한 아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신 21:18~21). 그런데 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다시 살아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한 ‘죽었다’는 가족 관계의 단절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한 것을 기억하지 않고 그저 돌아온 것만을 인해 기뻐했습니다.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마치 현재 있는 99마리보다 잃은 한 마리를 찾은 것을 인하여 기뻐하는 목자나 현재 있는 9개의 동전보다 잃은 동전 하나를 찾았다고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는 여인과 차원이 다른 기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모습이 스바냐 3:17절에 나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우리 모두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맏아들의 반응 (25~30절)
사람들은 둘째 아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 맏아들의 문제를 더 깊이 드러내십니다.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자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맏아들은 집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성실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가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 노하며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와서 들어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에게 따졌습니다. 21절을 보면 둘째가 아버지 앞에 서서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29절을 보면 그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에는 빠져 있으나 ‘idou' (이보세요) 라고 말하며 무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친근감이나 경외심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하며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는 듯한 표현으로 자신을 비하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순종적인 아들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아버지를 이기적인 고용주로 여기며 ‘노예와 주인’의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자기와의 관계를 거래 관계로 여겼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회복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맏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없는 신앙은 쉽게 메말라집니다. 은혜가 없는 봉사는 분노로 변합니다. 기쁨이 없는 헌신은 자기 의를 내세우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로 부르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24절에서 아버지는 둘째를 ‘나의 이 아들’(this son of mi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자기 동생을 ‘내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당신의 이 아들’(this son of yours)이라고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입니다.
맏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 (31~32절)
비유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초점은 맏아들의 언행에 맞춰집니다. 아버지는 불만을 품은 맏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맏아들의 모욕에도 불구하고 ‘아들아’라는 따뜻하게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항상 나와 함께 있다’며 그 역시 아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맏아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맏아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로 아버지를 멀리했고, 작은아들은 노골적으로 아버지께 반항함으로 아버지를 멀리했습니다. 물론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간 아들이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사실 아버지를 거역한 것은 두 아들 모두 다를 바 없습니다. 작은 아들은 집밖의 탕자요, 맏아들은 집안의 탕자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였으나 맏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드러난 죄인이었다면 맏아들은 은밀한 죄인이요 더 심각한 탕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을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혈육이 아닌 것처럼 경멸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너의 이 동생’(this brother of yours)이라고 부르며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절). 맏아들이 아버지의 권유를 듣고 마음을 열었는지, 그 잔치에 동참했는지 비유에서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들이 의롭다고 믿으며 죄인을 멸시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주의적 편견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주님과의 참된 사귐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것임을 깨닫는 ‘은혜의 감격’에서 시작됩니다.
누가 둘째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습니까? 표면적으로는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끌어당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왜 버림받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비유는 단순히 윤리적인 교훈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세우는 힘은 결국 복음입니다. 부모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자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는 가정은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있는 가정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멀어진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오늘 비유에는 두 아들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집을 떠난 아들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집 안에 있으나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존재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렸습니다. 달려갔습니다. 품었습니다.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완전히 나타났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까? 돌아와야 합니다.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시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은혜 없이 메말라 있는 분이 있습니까? 다시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가정 안에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의’를 내려놓고 오직 은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맏아들처럼 자신의 노력으로 자격을 얻으려 애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열린 아버지와의 사귐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쥐엄 열매를 구하려는 방황을 멈추고, 이제는 우리를 기다리며 달려오시는 아버지의 사랑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멈추고, 잃어버린 자가 돌아오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이 은혜가 성도님들의 가정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베푸신 은혜 감사함으로 가정을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세상으로 나아가며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