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어린이들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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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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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8:15~17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 층이 줄어드니 아이들이 줄어들고 아이들이 줄다 보니 주일학교가 점점 침체가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는 미래 교회의 주인이므로 차세대 목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대부분의 사역들이 장년들에게 맞추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다니고 기뻐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요즘 대학생들이 Vision Center에서 lock-in을 종종 합니다. 여름에 있을 일본 선교, 동남아 선교, 중남미 선교를 위해 사역 훈련, 여름성경학교 준비, 기도 훈련 등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요? EM이 근래에 많이 성장을 해서 금년부터 재정적으로 독립을 했습니다. EM이 KM과 공식적으로 상관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로 신경을 쓰기보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한 가족임을 알고 그들을 위해 여전히 기도하고, 선교를 후원하고, 친교 음식을 제공하며 섬길 수 있을 때 섬겨야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날은 단순히 ‘아이들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요즘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해서 주일설교를 하고 있기에 어린이 주일에 맞는 본문을 골랐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특히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과 ‘가족’의 개념을 하나님 나라로 확장하는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 자신의 어린 아기들을 데려오는 부모들과, 이를 꾸짖는 제자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불러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 보호받아야 할 미성숙한 존재, 혹은 숫자에 계수되지 않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때로는 고집스러우며, 사회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무자격자’의 전형이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제자들도 아이들을 예수님의 중대한 사역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나라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성취한 사람, 혹은 성숙하고 경건한 어른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러한 세속적인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어린 생명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그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교우들의 가정마다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은혜의 보금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을 막은 제자들
본문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아기를 데려온 목적은 주님이 ‘만져 주심’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마가복음에서 사용된 ‘어린아이’(paidia)라는 단어 대신 ‘아기’(brephos)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스스로 걷지도 못하고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혹은 품에 안겨서만 올 수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데리고 오매’는 미완료 시제로,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람들이 아기를 데려왔음을 뜻합니다. ‘만져 주심’은 손을 머리나 몸에 대고 복을 빌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손길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를 안고, 업고, 이끌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저 부모의 품에 안겨 예수님께 나왔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처음부터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기도, 누군가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꾸짖다’가 미완료 시제이므로 제자들이 오는 사람들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자들의 생각에 예수님은 바쁘신 분이고, 중요한 일을 하셔야 하는 분이며, 어린아이들은 그 일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오해한 태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예수님의 지킴이로 생각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각을 넘겨 집거나 사전 보호를 위해 기선을 잡으려 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한 꼴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듣고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마태복음 16:22을 보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면서 예수님을 강력하게 제지하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말한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려는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도 단호하셨습니다.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단지 베드로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꾸짖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막 8:33). 베드로가 왜 사탄으로 불렸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생각이 앞설 때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49~50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자 제자들이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자기들만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어떤 사람의 축귀 행위를 금지시켰다고 예수님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가 그런 사람을 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아이들이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안수하는 것과 같은 일로 예수님이 시간을 뺏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곁에서 수행하면서도 정작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을 막으신 예수님
마가복음 10:14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는 것을 보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표현이 쓰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취한 선의의 조처였는데 어째서 노하셨을까요?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그릇된 열심이 오히려 작고 연약한 자들을 주님으로부터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어린이들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가버나움에서도 어린아이들의 가치에 대해 교훈하셨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48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1세기의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은 인간적 존엄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섬긴다는 개념이 없었을 때에 종에게나 해당되는 섬김이라는 말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른들만 상대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당시에 가진 하나님 나라의 개념도 주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무관하며 오히려 거추장스런 존재로 여겼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세속적인 생각과 그릇된 소명 의식에 의해 나온 행동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늘 시민의 자격을 갖춘 자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유감스런 사태는 오늘날도 주님의 시각과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판단과 열심을 앞세울 때 쉽사리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여기서 ‘용납하다’가 과거 명령형입니다. ‘당장 용납하라’는 뜻입니다. ‘금하다’가 현재 명령형인데 앞에 부정사 ‘not’이 있으니 당장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두 명령어를 잇달아 사용하신 것은 주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운 울타리가 누군가 은혜를 입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능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성공한 사람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작고 연약한 자를 먼저 품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분이기에 어린아이를 향해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의 사귐은 강한 자의 특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에게 열리는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그릇된 열심과 왜곡된 인식을 고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는 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환영’하시는 분이십니다. 단순히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의존하는 믿음
어린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배고프면 찾고, 아프면 안기고, 두려우면 손을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받는 태도입니다. 스스로 장성했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어린아이처럼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길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아이로 간주할 수 없는 자는 신령한 젖으로 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과는 거리가 멉니다(벧전 2:2). 이처럼 구원의 생명이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믿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태도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어른들의 나라가 아니라 아이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도, 예배도, 봉사도 내가 잘해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의지하라.”기독론적으로 볼 때, 이 의존은 단순한 심리적 의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에 전적으로 기대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기듯,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안겨야 합니다.
- 신뢰하는 믿음
어린아이는 부모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도 믿고 따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내 계획과 다르면 의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강조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나라를 그대로 받는 것이 천국 입성의 절대 조건입니다. 이 절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결단코’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영접하다’에 해당되는 동사가 영어로 ‘receive’, 즉 ‘받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가 주는 선물을 아무 의심 없이 기쁨으로 받듯이, 우리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품어주시는 은혜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품에 안긴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듯,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거짓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 겸손한 마음
어린아이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신앙 안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똑똑하고 성숙하다고 믿는 소위‘어른’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주님의 품을 거부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를 높이는 자에게 문을 닫지만, 세리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의 긍휼만을 바라는 ‘작은 자’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엽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이 비어 있는 사람, 그래서 그리스도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 연약한 자, 부족한 자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죄로 인해 막혀 있었고,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길을 여셨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능력이 없고, 상처 입어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역설적입니다. 성경은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닮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지 않고 반대로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닮아야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어린이들도 때가 되면 어른이 됩니다. 그러나 비록 신체적으로 성인이 될지라도 어른들은 어린이의 특성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주안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한 어린이가 어른들의 모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자격과 능력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무력한 ‘어린아이’로 인정하고 오직 구원자 예수님의 품에 온전히 안기어 그분의 통치와 은혜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막아선 제자들에게 노하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의 모델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본보기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안으시고 축복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들이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구성원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함, 순수함, 그리고 전적인 의존의 믿음이 필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아이들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업적이나 자격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의 손에 이끌려, 혹은 주님이 좋아서 달려갑니다. 사귐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 앞에 머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접촉이며 만남입니다. 주님과 깊이 사귀기 위해서는 세상이 말하는 ‘자격의 옷’을 벗어던지고, 주님의 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전적인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쟁취’와 ‘증명’을 요구하지만, 주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겸손’과 ‘수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통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힘과 내 판단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고, 주님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사면서 주님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번 어린이 주일에 우리 자녀들이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우리 어른들도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두 팔을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품 안에서 참된 쉼과 사귐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