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누가 신실한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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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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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2:35~48


새벽 기도에 꾸준히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alarm의 도움 없이는 제 시간에 맞추어 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피곤하고 졸려도 새벽 제단을 쌓는 이유는 우리에게 맡겨진 기도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우리 팔로마 제단에 기도의 불을 계속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파수꾼들이 있는 한, 우리 교회는 주 안에서 계속 쓰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졸았던 베드로는 시험이 오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교훈을 여러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기다림을 경험합니다. 건강의 회복을 기다리거나, 자녀의 변화를 기다리거나, 혹은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길어지면 불만이 싹트기도 하고 기다림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절한 소망이 있거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비록 늦어질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기다립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이 질문은 우리 신앙의 본질, 즉 ‘주님과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를 ‘복되다’하시고 ‘상급’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시대의 흐름을 바로 알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면서 훗날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35~38절)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데, 언제, 어디서 가르치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35절의 명령문이 2인칭 복수인 것으로 보아 바로 앞 단락의 ‘너희’와 같은 청중에게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의 영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종들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의복은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옷이었기 때문에 일을 할 때에는 옷을 걷어 올려 허리에 끈을 묶음으로써 흘러내리지 않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당장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두운 밤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밤이지만 주인이 올 것을 대비해 철저히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심판자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다시 오시는 신랑이십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면서도 영적으로는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지만 깨어 있지 않고 예배는 드리지만 주님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영적으로 깨어 있어 언제든지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마치 ~와 같다’는 비유의 전형적인 형식입니다. 등장인물은 ‘주인’과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종은 법적, 사회적, 경제적으로만 주인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주인의 관심사와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주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것이 종의 임무입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에 열리고 수일이 걸리기 때문에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려야 합니다. 낮에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니 밤에는 쉬어야 한다고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종이 먼저 잠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지체 없이 문을 열어야 합니다. 밤을 구분할 때 로마식은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세 시간 단위로 구분합니다. 그러니 ‘이경’은 오후 9~12시, ‘삼경’은 오전 12~3시입니다. 유대식은 4시간 단위로 구분합니다. ‘이경’은 오후 10시~오전 2시, ‘삼경’은 오전 2시~6시입니다. 어느 식으로 하든지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이 자정에 가깝거나 자정을 넘긴 한밤중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는 주인이 밤늦게 올 수 있고, 주인이 오는 때를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전제합니다. 이 비유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이라면, 재림이 지연될 수 있고, 그때를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은 깨어 기다린 종들 때문에 너무 기뻐서 띠를 띠고 종들을 앉히고 수종든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풍속에서 주인이 종에게 시중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섬기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잊지 않으시고 칭찬하시며 보상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깨어 준비된 신자들은 천국 잔치에서도 주님의 섬김을 받을 것입니다.

도둑을 대비하는 집 주인 비유 (39~40절)
두 번째 비유가 39절에 언급됩니다. 이 비유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정황은 다릅니다. 이번에는 집 안에서 준비하며 깨어 있는 역할을 주인이 맡고,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역할을 도둑이 맡습니다. 이전 비유에서 종이 했던 준비와 여기서 주인이 해야 할 준비는 물론 다릅니다. 그럼에도 두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습니다. 예수님은 예기치 못한 때에 오시는 인자를 ‘도둑’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심판의 경고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항상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할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이 비유는 인자 예수님의 재림이 생각지 못한 때에 있을 것이니 제자들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진정한 깨어 있음은 미래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계신 주님을 의식하며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신실한 청지기 비유 (41~44절)
베드로가 비유의 대상이 제자들인지 무리인지 질문하자 예수님은 청지기 비유로 답변하십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종은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종들을 관리하는 책임도 맡고 있습니다. 그러면 청지기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신실함입니다. 개역개정은 ‘지혜롭고 진실한’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두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신실함’과 ‘지혜로움’이 모두 필요하지만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신실함’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실함’으로 사용된 단어가 바울 서신에서 ‘충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습니다(고전 4:2). 직역하면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들이 충성스럽게 발견되는 것이다’입니다.‘이 정도면 됐지, 나도 할만큼 했어’라고 하면서 내가 만족하는 충성이 아니라 주님이 인정하시는 충성이어야 합니다. 충성은 주인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대로 충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섬길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청지기가 때를 따라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면서 직무를 다하면 주인에게 ‘복이 있다’는 칭찬을 받고 주인은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긴다고 합니다. 둘째, 지혜입니다. 종은 시키는 일만 하지만 청지기는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인이 맡긴 사람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또 다른 사명은 일과 사역을 넘어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청지기 비유는 사역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그리스도인 모두가 청지기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청지기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충성과 지혜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열두 사도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른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모습은 사도행전 6:1~6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 집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는 자에게 칭찬과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려면 우리 모두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실하지 않은 청지기 비유 (45~46절)
예수님은 이어서 신실하지 않은 청지기를 언급하십니다. 신실함 여부는 주인이 없거나 주인이 보지 않는 데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합니다. 그가 예측하지 못한 때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벌할 것입니다. 그의 잘못은 주인이 늦게 오리라고 판단한 데 있다기보다는 주인의 오심을 대비하지 않고 맡은 일을 악하게 처리하고 방탕한 데 있습니다. 여기서 ‘엄히 때리다’는 ‘파문하다’라는 뜻이 있으니 청지기직에서 해고됨을 뜻합니다. 이 표현은 또한 ‘둘로 쪼개다’는 뜻도 있는데 언약을 위반한 자들을 심판한다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재림과 관련된 비유이므로 이 해고는 결국 심판을 뜻합니다. 46절이 언급하는 심판은 ‘신실하지 아니한 자’가 받는 벌입니다. ‘신실하지 아니한 자’는 믿지 않는 비신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42절이 언급한 신실한 청지기와 대조되어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행한 신실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맡기신 책임을 소홀히 한 교회 지도자들도 벌을 받을 것입니다.

벌을 받는 기준(47~48절)
여기에서는 심판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동일한 잘못을 하더라도 주인의 뜻을 알면서 고의로 그 뜻을 위반한 청지기와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정도가 다른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몰랐다는 것이 어느 정도 변명은 되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주의 뜻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8절은 또 하나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라는 구절은 책임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청지기로서 각자가 맡은 임무를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느냐는 것입니다. 맡겨진 임무의 차이는 있으나, 요구되는 충성도는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재능은 자랑의 도구가 아니라 더 깊은 헌신과 겸손의 이유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재능을 많이 받은 자들은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의식을 갖지 않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적게 받은 자들도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각각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경고는 단지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초대하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이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섬긴 것을 인해 언젠가는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잘 섬기면 주인의 칭찬과 더 큰 신임이 있겠지만, 신실하지 못하다면 준엄한 벌이 따를 것입니다. 큰일을 맡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직분에는 언제나 특권과 책임이 따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현재의 삶을 준비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 사랑 안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주인과 도둑의 비유를 통해 재림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시기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때는 기다리다 지치는 ‘때’이며, 방심하기 쉬운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쾌락과 욕망의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입니다. 따라서 언제 올지 모를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종이 허리에 띠를 띠고 언제 올지 모를 주인을 위해 깨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고, 성령을 통해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이란 말씀과 기도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며, 영적으로 둔감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의 바쁜 일상과 세상의 염려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어 있음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성도는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해야 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고 늘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이 곧 ‘등불을 켜고 서 있는’자세입니다.
- 일상의 자리에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거짓 가르침은 일상의 삶을 무시하고 특정 날짜나 장소에만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기대하시는 모습은 주님이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이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사명 중심적인 삶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시간, 재능, 물질, 그리고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신실한 청지기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 그리고 복음 전파는 모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사명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때를 따라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듯, 우리에게 맡겨진 가족, 교우,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십니다. 큰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비유 속 주인은 깨어 기다린 종들로 인해 너무 기뻐서 스스로 띠를 띠고 그들을 자리에 앉힌 후 수종을 듭니다. 이는 유대 풍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주님은 우리가 드린 작은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장차 하늘나라 잔치에서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나가면서
주님이 들려주신 비유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엄중한 권면이자 따뜻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맞이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의 고난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만 급급하여 영적인 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당황하지 않고,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준비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빛을 발해야 할 때입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 묵상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친밀한 사귐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재림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또한 개인적인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재림의 소망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생동감 있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