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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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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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죽음을 이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 선지자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지만 그들이 죽음을 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 4장).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막 5장),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장) 그리고 나사로(요 11장)를 살리셨습니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 살아났으나 다시 죽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소생은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 아닙니다. 소생과 부활은 차원이 틀립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부활을 주제로 다루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5:12) 고린도 교인들 중에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죽으면 끝입니다. 헬라의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은 불멸하나 몸은 썩어 없어진다고 하기에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의 논증의 결말이자 절정으로, 고린도전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은 인류의 소망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부활은 “언젠가 있을 일”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부활 신앙 위에 굳게 서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 (20~22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에 대하여 바울이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문맥을 전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살아나다’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그때 살아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첫 열매’는 신자의 부활의 확실성을 암시해 주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첫 열매’는 이후로 계속 같은 열매가 맺힐 것을 상징합니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더 많은 수확, 즉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을 예견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바울은 인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을 세웁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과 연합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생명의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부활의 순서(23~24절)
바울이 부활의 순서를 언급합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라는 말은 부활 사건이 여러 단계로 진행될 것인데, 각 사람은 그 가운데 어디엔가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인데 이 사건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부활하거나 변화되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주님을 영접하고 영원히 그와 함께할 것입니다(살전 4:17). 그분이 오실 때 죽은 성도는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는 존재의 변화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완전한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이 부활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이고 악인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실 것입니다. 통치와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뿐 아니라 악을 행하는 땅의 통치 세력과 죽음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만물을 복종하게 하실 그리스도(25~28절)
부활은 단지 과거의 역사나 먼 미래의 약속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그에게 통치권을 주어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시 8:6)라는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통치를 받는 만물에 포함되지 않고 만물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부활은 또한 예수님이 단순히 살아나신 사건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즉위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왕 노릇 하심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님이 정복하실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원수이며,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맞이하는 운명입니다.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그 권세를 깨뜨리셨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만물이 그분의 통치 가운데 굴복하면, 왕 노릇하시던 그분 자신도 만물을 그분께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께 복종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신성은 동등하시지만, 직무 면에서는 성부에 종속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하신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과 질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된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시기 위함이다’입니다. 이 표현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 권위와 주권이 확고해져 다시는 위협받지 않으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깊은 사귐은 우리 삶의 주권을 이양하는 과정입니다. 죄를 이기는 순간,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간, 용서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통치가 드러납니다.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두 기둥이자,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원리입니다. 이 두 사건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십자가 신앙은 ‘나를 위해 죽으신 사랑을 붙드는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가 만나는 지점이자, 그 모든 것을 덮는 무한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십자가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단순히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이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제 우리는 정죄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신앙은 ‘자기 부인’으로 이어집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신 자리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고집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희생을 각오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을 이기신 생명을 사는 신앙’입니다. 십자가가 패배처럼 보였지만, 부활은 그것이 완전한 승리였음을 드러냅니다. 죄를 이기셨고, 사망을 깨뜨리셨고,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은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믿음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이 있고, 실패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죄의 습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오늘’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낙심한 자가 소망을 찾고, 미움이 가득한 곳에 용서가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부활 신앙은 또한 현재를 변화시키고 미래를 열어줍니다. 두려움 대신 담대함, 절망 대신 소망, 무기력 대신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우리는 눈앞의 이익보다 영원한 가치를 쫓으며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헛되다는 데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우리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일 때, 비로소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필수적인 통로이며,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사망의 종류
이 땅에서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다른 행보를 보이는지 하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망은 목숨이 끊어져 숨지거나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불순종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나님이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여전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영이 죽은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열조에게 돌아간다’고 표현합니다. 신약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면서 구원을 위해 반드시 죽은 뒤 생명으로 옮겨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도의 죽음을 ‘잠잔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합니다. 영적 사망은 아담이 범죄할 때 정죄되어 영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가리킵니다(창 2:16-17; 3:22-24).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영적 사망 상태에 있습니다. 육적 사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인해 선악과 언약대로 성도나 불신자 모두 영혼과 현세의 몸이 분리됨으로 당하는 육체적 죽음을 가리킵니다(롬 6:23; 히 9:27). 우리의 육신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습니다. 육신을 떠난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인들이 죽은 후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 ‘낙원’입니다. 반면에 죄인들이 죽은 후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 ‘음부’입니다. 그 영혼들이 궁극적으로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의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 소위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머물게 됩니다. 반면 죄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영적 사망은 둘째 사망인 영원한 형벌로 이어집니다. 불신자들은 악에 대한 보응으로 세상 끝날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통과 슬픔에 처하게 된 상태에 던져지게 됩니다.
우리의 자세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 복음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세주요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고, 속죄의 근거가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근거가 됩니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용서와 구원과 부활의 근거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성경의 성취이고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는데 왜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습니까? 사단의 권세는 깨뜨렸으나 아직 잔뿌리들이 남아 있어 마지막 발버둥을 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은 성도들은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분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들에게 선한 것이 없었고 그들은 약하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받은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능력이나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견고한 믿음을 갖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더욱 주를 섬기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견실하다’의 어원인 “헤드라”는 자리를 뜻합니다. 오늘은 이 자리 내일은 저 자리 하면서 자꾸 바꾸지 말고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고 있는 자리에서 버티고 앉아 자기를 과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쓰다’는 말의 어원은 ‘풍부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직역하면 ‘주의 일이 많아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을 많이 감당하는 것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증인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생생하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받은 은혜를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헌신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 하게 됩니다. 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을 경험하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우리는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들은 어제의 실패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를 회복시키기 원합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되씹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의 새 출발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선한 행실들을 기억하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재판 받으시고 온갖 희롱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있어서 고통과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주님이 다시 사심으로 제자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 신앙은 ‘나를 내려놓는 믿음’이고, 부활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에서는 죄 문제의 해결이 없습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그저 죽음으로 끝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의 상처, 죄책감, 교만, 자기 의를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죽었던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죄악 된 우리의 과거를 씻기기 위하여 다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믿음의 탈선자들과 낙오자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부활을 단지 ‘기다리는’자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으로 ‘오늘을 사는’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물을 발등상 아래 두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선택하고, 미움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고, 죽음의 상황에서도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시험에 들 수 있고 좌절하거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이삭을 붙드시고 야곱을 붙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붙드시기에 우리가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아리마대 요셉이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부활을 예비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행동에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복음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신앙, 부활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힘쓰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