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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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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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은 예루살렘 입성으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출발하여 벳바게로 가셨습니다. 두 제자가 그 나귀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놓았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성찬식이 영어로는 Eucharist인데 이는 ‘감사하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eucharisteo에서 왔습니다. 직역하면 ‘은혜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심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식입니다. 누가복음을 통하여 성찬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성찬식에 바르게 참여할 뿐 아니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삼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이 절기에 맞추어 일 년에 세 차례씩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었을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애굽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기 거부하자 하나님은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려 애굽을 곤경에 빠뜨렸는데도 고집을 피우니 열 번째 재앙으로 사람이나 가축들의 첫 태생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자기들의 집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하나님의 천사가 그냥 넘어갔다고 하여 유월절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은 니산월, 즉 종교력으로는 1월 14일에 시작되어 15일 저녁에 끝나고 무교절은 15일에 시작되어 21일까지 계속됩니다(출 12:6-20). 무교절 첫날은 원래 유월절 만찬이 있는 다음 날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의 전승에는 유월절 당일을 무교절 첫날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어서 마가복음 14:12에 의하면 무교절의 첫날을 유월절 양 잡는 날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저녁, 즉 니산월 14일 저녁에 있었고, 예수님은 만찬 후에 체포되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요즘으로 따진다면 예수님 당시 유월절은 목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었고 금요일 저녁에 끝났습니다.
옛 언약의 마지막 만찬 (14~18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하신 ‘최후의 만찬’장면을 보여줍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 우리는 대개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바로 앞에 둔 밤, 제자들과 식탁에 마주 앉으셨습니다. 그 식탁은 죽음을 앞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인류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그 고난조차 기쁨으로 승화시킨 감사가 교차한 자리였습니다. ‘때가 이르매’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때’라고 번역된 단어를 직역하면 ‘그 시각’입니다. 1차적으로는 유월절 식사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지만, 이 식사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때를 따라 살아오신 예수님의 순종을 강조하는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예수님은 행동 하나하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까지 아버지께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각자를 돌아봅시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누가는 ‘제자’가 아닌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해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통해 세워질 새 이스라엘인 교회와 함께 교제하시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앉다’로 번역된 단어는 식탁을 앞에 두고 쿠션을 받치거나 팔꿈치로 지지한 채 옆으로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수없이 많은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월절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최후의 식사를 나누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완성하러 오셨지 없애거나 배척하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나누는 식사는 모세 때부터 지켜오던 유월절 만찬에 새롭고도 깊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이 만찬은 예수님이 곧 받으실 십자가 수난을 예고합니다. ‘유월절’로 번역된 헬라어 ‘파스카’는 ‘고난을 받다’는 동사 ‘파스코’와 동일한 어근을 가집니다. 이는 곧 있을 예수님의 고난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임을 전제합니다. 무슨 고난입니까? 심문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죽음과 고난의 길이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어쩔 수 없이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킨 것을 기념하는 절기에 주님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쳐 인류 역사상 아무도 하지 못했던 영적인 출애굽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desired with desire. 동일한 단어를 동사와 명사로 한 문장에서 사용하며 그 의미를 강화합니다. ‘원하고 원하였노라’라는 표현은 간절한 바람, 반드시 하기를 원했음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만찬이 끝나고 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그날이 다가오는 것을 고대하셨습니까? 그날은 끝이 아닌 완성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사명의 완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흠 없는 유월절의 양처럼 죄 없는 자신이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잔을 받아 감사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라고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떡을 떼신 후에 잔을 나누시는 것만 언급되는데, 누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은 ‘첫째 잔을 나눔 --> 떡을 뗌 --> 둘째 잔을 나눔’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과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두 번 주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유월절 식사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새로운 언약을 축하하는 기념 식사를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통적인 유월절 만찬을 기념하는 잔을 돌리신 후에 새 언약의 만찬을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며 음식을 드시게 된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또한 유월절을 기념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잔’은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그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식탁에서 함께 잔을 나누는 것은 그들이 한 가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나눔의 중심에는 항상 잔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찬의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가 바로 주님의 가족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혈통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누구든지 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찬식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경건하고 비장한 의식이면서 동시에 모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회복하고 확인하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이제부터’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 이후부터’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임하는 시점,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그때에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만찬이 있을 것인데, 그때까지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천국잔치를 베풀 때까지 더 이상 전통적으로 지켜 오던 유월절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 부활, 재림을 미리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최후의 이별이라면 아쉬워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끝나야 천상의 영원한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첫 만찬 (19~20절)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유월절 만찬은 감사기도로 시작합니다. 포도주는 네 번 마시는데 첫잔을 마시면서 쓴 나물을 먹고 시편 113~114편을 부릅니다. 두 번째 잔을 들고 양고기와 무교병을 먹습니다. 세 번째 잔을 들고 나서 시편 115~118편을 부릅니다. 예수님은 아마 세 번째 잔을 들고 나서 성찬을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성찬에 사용한 음식을 특별 주문하여 만들었거나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만든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보통 유대인들이 유월절 만찬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였지만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니 보통 떡과 포도주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평범한 것을 들어 거룩하게 하시고 평범한 것에 깊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교병을 ‘가져’‘감사기도하시고’제자들에게 ‘갖다’가 ‘나누라’고 하신 것은 오병이어 이적을 연상케 합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계시하신 사건이고, 마지막 만찬은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임을 예고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떼어주신 떡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실 그분의 몸을 상징합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는 말씀을 헬라어 구문에 좀 더 충실하게 번역하면, ‘나를 기념하기 위해 이것을 행하라’가 됩니다. ‘행하라’가 현재 시제이므로, 계속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념’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기억하고 우리 또한 주님처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구속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떡을 사용하고 양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은 주님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녁 먹은 후’다시 한 번 잔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이 잔은 전통적인 유월절 만찬에서 세 번째 잔에 해당합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은 제물을 피를 성소의 휘장에 뿌리고, 분향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아래에 쏟아 ‘부어야’합니다(레 4:6~7, 17~18). 여기에도 ‘붓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당시 언약을 맺을 때는 피 흘림으로 이를 확증했습니다. 모세는 짐승을 잡아 피를 취해 제단에 백성에게 뿌려 언약의 증거를 삼았습니다(출 24:6~8).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맺은 것이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성립되었으며, 옛 언약은 율법 준수를 조건으로 하는 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은 믿음을 조건으로 하는 언약입니다.
실패함이 없는 구원의 경륜 (21~2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거룩하고 신비로운 시간에 주님은 찬물을 끼얹는 듯한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가룟 유다의 배신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병행기사에는 새 언약의 만찬 이전에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새 언약의 만찬 직후에 등장합니다. 이는 새 언약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언약의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유다임을 아셨지만,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나를 파는 자’라고 에둘러 표현하십니다. ‘팔다’를 직역하면 ‘넘겨주다’, ‘배신하다’입니다. 자신이 넘겨질 것을 여러 번 예고하셨지만, 제자에 의해 팔린다는 말씀은 처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넘겨주기 위해 대제사장을 찾아간 사실을 아셨지만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배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식탁 교제 속에 추악한 ‘배신의 손’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이것은 메시아 사역의 위기이며, 구원 계획의 치명적인 결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어둠 속에서 오히려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배신자 유다의 손이 상 위에 있음을 아셨음에도 그를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배신과 악행조차도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드라마 속에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신의 탐욕으로 예수님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 악한 행위를 통해 ‘인류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을 이뤄내셨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가장 어두운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승리인 ‘십자가’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인자는 이미 정해진 대로 가거니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다의 배신이나 로마 당국의 강력한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임을 선언합니다. ‘정해진 대로’라는 말에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악함과 사단의 방해가 극에 달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당황하여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서로 묻습니다. 그러나 주권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누가 배신자인가’를 묻기보다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계획이 틀어지며,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며 절망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상 위에 배신의 손이 올라와 있을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자세
- 감사의 삶
17절과 19절을 보면 ‘감사 기도하시고’가 반복됩니다. 예수님이 손에 든 떡은 찢기실 그분의 몸이며, 잔은 쏟으실 그분의 피를 상징합니다. 곧 닥쳐올 처참한 고난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찬이라는 의식을 통하여 과거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사역을 돌아보고 감사하고, 현재의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살펴보고, 미래에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 자체를 인해 감사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통해 우리를 빚으시고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로 쓰실 주님을 신뢰하며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고난의 쓴잔을 축복의 잔으로 바꾸는 기적의 열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순종과 헌신의 결단
유월절 식사가 준비되기 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두 제자가 있었고, 물동이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고, 자기의 다락방을 유월절 식사 장소로 제공한 집주인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헌신이 있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그 순종은 십자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순종의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뜻을 내려놓아야 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이해되지 않는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뤄지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 진정한 순종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 우리가 미처 생각지 않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물질이 있을 때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건강할 때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을 때에도 교회와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 복음 전파의 사명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나누시며 떡을 떼시고 잔을 나누신 다락방은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 “나를 기념하라”는 사명과 함께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파송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은혜는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로 새 언약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듯이, 아직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정죄가 아닌 초청으로, 강요가 아닌 섬김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 눈물의 기도, 그리고 진실한 간증 등을 통해 주님의 식탁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바로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 공동체적 사랑 실천
본문은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라고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는 잠시 후면 주님을 부인할 베드로, 누가 더 높은지 다투는 제자들, 심지어 주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까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완벽해서 식탁에 초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동체 사랑은 상대방의 자격이나 완벽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셨듯이,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용납의 식탁’을 차려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음으로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서 서로 연합하게 됩니다. 성찬 참여자들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어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이웃이나 공동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자기의 시간, 마음, 물질의 떡’을 떼어 연약한 지체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탓하기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지체의 허물을 덮어주고 끝까지 함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공동체 사랑의 본질입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단순히 유월절 식사를 나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참된 어린 양이심을 드러냈습니다. 떡을 떼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나누며 “너희를 위하여 붓는 새 언약의 피”라 선포하신 것은, 십자가를 통해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시는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줌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식탁은 배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며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영적인 이스라엘이 참여하여 그리스도가 다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찬식에 우리를 초대하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참된 성찬의 의미를 깨닫고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면서 성찬식을 통하여 떡과 잔을 함께 나눔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됨을 깨달으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담긴 복음을 전하겠다고 세상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