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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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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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는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흥행 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1400만명 이상이 그 영화를 보았기에 한국에서 역대 5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숙부인 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의 애절한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유튜브에서 요약된 장면을 보거나 주인공 엄흥도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나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괜찮다’라는 말을 하며 엄흥도라는 사람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엄홍도는 가족들과 함께 즉시 영월을 떠나 죽을 때까지 신분을 속이고 흩어져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갔다고 합니다. 영조 때 그의 업적을 기리며 그를 복권시켰습니다. 엄흥도의 28대손인 엄홍길 대장은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 유명한 산악인입니다. 그도 조상인 엄흥도처럼 한 해 전에 같이 산에 올랐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에 다시 올라 빙벽을 깨면서 천신만고 끝에 시신을 가져 왔습니다. 두 사람 다 남들은 하기를 꺼려하는 일, 굳이 그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목숨 걸고 그 일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최근에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노하거나 억울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염려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그 눈물은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본문을 보니 아주 특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마지막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화려한 승리의 행진 정점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주님의 눈물과 그 뒤를 이은 성전 정화 사건 속에는 오늘 우리를 향한 간절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독생자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참된 평화의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철저히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보시고 우리 교회를 보시고 이 세상을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이 사순절에 주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훗날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눈물 (41절)
어린 나귀를 타시고 많은 무리의 찬양과 환호 속에 있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가까이에서 보시고 우셨다는 기사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우셨다’는 단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통곡을 의미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후에 밖에 나가서 이와 같이 울었습니다(22:62).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복음서에서는 이곳과 요한복음 11:35에만 나옵니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자신이 당하실 일이 두렵거나 애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닥칠 운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인해 예루살렘이 감당해야 할 어두운 미래를 보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유다의 멸망을 슬퍼했습니다(왕하 8:12; 렘 8:18~20). 눈물은 슬픔과 탄식의 결정체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소중한 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그런 마음을 품으셨고, 눈물을 흘리심으로 성전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관한 심판 선언 (42~44절)
심판은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심판은 아버지의 눈물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평화의 왕을 거절하고 교만과 율법주의, 세상의 정욕에 빠진 자들에게 임하는 것은 철저한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씀으로 안타까움을 표현하십니다. 보통 헬라어 문장은 동사만 보면 1인칭인지 2인칭인지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칭대명사 ‘너’가 굳이 사용된 이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음을 암시합니다. ‘너’는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제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내용상 이 표현은 앞 단락에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제자들이 ‘하늘에는 평화’라고 찬송했던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왕이 아니라 병든 자, 가난한 자, 죄인들, 여인들, 사마리아 인들을 품어 주시고 만져 주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사이의 반목과 질시를 해소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엡 2:13~14).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를 볼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해방만을 원했고, 그들의 완악함은 눈을 가려 참된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는 문장은 신적 수동태입니다. 즉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핍박하고 죽인 일은 몇몇 유대 지도자들의 실수나 악행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13:34)라고 탄식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불순종과 반역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제사가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평화를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주님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감격이 없습니다. 말씀은 듣는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괜찮은 신앙인이다’라고 여길 때가 신앙의 위기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해 평화를 상실하는 일만큼 인간에게 불행하고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날이 이를지라”는 23장에서 종말에 있을 재앙에 대해 예언하실 때 사용되는 도입구입니다. 심판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표현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토둔을 쌓고’(사 29:3),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왕하 6:14),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왕하 8:12; 시 137:9).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다’(삼하 17:13)등입니다.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함으로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로마 군대는 흙으로 언덕과 방벽을 쌓아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과 자식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할 것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성전이 완전히 파괴가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는 예레미야 6:15의 ‘그들을 방문할 때’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구원이 나타나고 이스라엘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문맥상 ‘보살핌 받는 날’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 그들이 보살핌을 받도록 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그들을 ‘내어버려 두시고’찾아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없는 것, 하나님의 부재가 곧 심판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것이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주님(45~46절)
누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셨다고 하며 성전 정화 사건을 좀 더 상세하게 다룹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성전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 예배의 핵심은 희생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흠 없는 짐승을 바쳐야 했습니다. 흠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제사장이 보고 판단합니다. 만약 흠이 있다면 그 제물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제사를 바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았습니다. 물론 시가보다 훨씬 더 비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려야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싼 돈을 주고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미 광야 시대부터 20세 이상 성인 남자들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반 세겔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성전세를 납부할 때는 성전에서만 사용되는 돈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담당한 사람이 돈 바꿔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막대한 이권을 챙기던 부패한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더구나 모든 매매 행위가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들도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특별히 정해 놓은 장소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방인들은 성전에 있으려야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종교지도자들을 매섭게 질타하셨습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렘 7:11) 두 구절을 인용하여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곳이기에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또한 성전은 유대인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곳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강도의 소굴’로 번역된 헬라어를 직역하면 ‘역도들의 소굴’입니다. 이 표현은 성전에서 장사하도록 한 대제사장 일당을 하나님께 반역하는 역도로 규정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훗날 자신들을 역도로 간주한 예수님께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역도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십자가에 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단순히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옛 성전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신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주님(47~48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자연스럽게 기대되는 것은 성전이 기도의 집 역할을 하도록 기도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기사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날마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성전에서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할 수 없으므로 성전은 결코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특별히 거하는 곳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에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는 말씀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깨달을 수 없으니,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가 말씀의 집이 되고 기도의 집이 된 것을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강조된 점은 예수님이 성전을 가르침의 새로운 무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47~48에서 가르침이 시작되고, 21:27~38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무리 됩니다. 누가가 이점을 독특하게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이권이 걸린 비즈니스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들도 마음에 찔림은 있었겠지만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반면에 백성은 탐욕으로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악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인간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마 10:28).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며 영적인 지혜를 가졌다고 여긴 지도자들이 사실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도하는 것 같은 계획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8:31)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후, 예수님은 그곳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이 진정한 기도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깨달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기쁘게 들었습니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진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가난한 마음으로 비워져 있을 때 들립니다. 듣기를 싫어하며 말씀을 저버린다면 오늘날의 교회도 얼마든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탐욕을 비우고 낮은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선포되는 주의 말씀에 집중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우리 마음의 성전이 정결해야 합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참성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도리어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두려워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영적인 맹인들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고 했습니다. 성전은 거룩한 처소인데 자칫하면 돈, 성공, 자존심, 욕심, 두려움 등으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가 사라지고 예배가 약해지고 주님과의 사귐이 희미해집니다. 우리 인생이 무너지는 이유는 돈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회복될 때 인생이 회복됩니다. 기도가 회복되면 마음이 살아납니다. 가정이 살아납니다. 교회가 살아납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세속적 가치관, 탐욕, 이기심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고,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방문하시는 ‘보살핌의 때’를 영적으로 분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앞날을 내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혹독하게 심판당할 미래가 무겁게 예수님을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거절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핑계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던 땅이 버려지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여전히 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뜻을 돌이키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한 사람이 가정과 교회,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정죄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징표입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의 안위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아픔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보며 주님과 함께 울 수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한 마음을 품고 이 땅과 이웃을 위해 애통하며 중보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과정에서 품으신 두 가지 감정은 슬픔과 분노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고, 성전 안의 상황을 보고 진노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우셨을까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는데,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적대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은 원했지만 죄에서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예배를 회복시키려는 거룩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참된 성전이시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십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이 그 기능을 상실하면 하나님은 미련 없이 떠나시고 진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떠나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그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건물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 평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눈물이 우리의 무감각함 때문은 아닙니까? 주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고, 주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를 향한 길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 살아갑니다. 우리 내면의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성전이 탐욕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가 살아있는 참된 평화의 처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참된 평화(샬롬)가 임합니다. 이 사순절에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평강을 누리며 주신 사명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