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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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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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2:13~21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마다 무리가 몰렸고,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감시하고 흠을 잡기 위해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에서 문젯거리를 찾으려 할 때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지혜로 대답하셨습니다.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살펴 본 11:37~12:12은 예수님, 바리새인, 율법 교사들의 논쟁부분으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지도자의 외식, 불의, 교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어리석은 부자 비유는 앞선 12:5의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소재를 다룹니다. 유산 분배, 미래 준비, 안정된 노후, 더 많이 쌓아두려는 마음 등은 우리 삶과도 밀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단순히 재물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간 재산 상속 문제의 원인이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수확을 거둔 부자가 가진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인생의 만족과 기쁨을 재물에서 찾고자 하는 인간의 탐심임을 교훈하십니다. 탐심을 극복하지 않는 한 인간은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는가?’인생의 참된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습니다(16:13). 재물에 집착하면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면서 영생을 바라보고 나아가면서 훗날 주님 앞에 부끄럼이 없는 자들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에 대한 경계 (13~15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선생’은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명하다’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당장 자기 형에게 말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상속의 방식은 구약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1:17에 의하면,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2배의 유산을 받습니다. 아무리 장자라 해도 유산을 독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마 형이 욕심이 많아 율법을 어기고 혼자 유산을 차지하려고 했든지, 아니면 동생이 율법이 정한 대로 유산을 받는 것이 부족하다고 여겨 예수님께 분배 문제를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형이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에 근거해 이러한 분쟁을 중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재자로 나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애굽에서 모세를 거부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출 2:14). 이러한 연결은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크신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모세는 중재자의 역할을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으나, 예수님은 자신이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생기는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시선을 돌리시고 재물에 관한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삼가’로 번역된 단어는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령형이며, ‘물리치라’로 번역된 동사는 ‘경계하다’라는 뜻으로,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두 동사가 현재명령형이니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형용사 ‘모든’이 붙음으로써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 있어서도 탐욕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탐심’은 ‘자기의 소유나 감정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생기는 거짓된 욕심’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많이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유는 필요한 것이지만, 생명보다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비오스)을 넘어선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생명, 즉 영원한 생명(조에)입니다. 이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과 깊이 사귈 때, 비로소 소유에 집착하던 삶에서 벗어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행복과 만족이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창조자요 섭리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할 만족과 인생의 참 의미를 재물에서 찾으려는 탐심에서 유래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유혹합니다. 탐심으로 가득 차게 해서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오직 채움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은 재물의 소유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탐심을 일으키는 모든 헛된 생각을 물리쳐야 합니다. 탐심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 내세와 현세의 생명에 대해 무감각해지며 이 땅의 것을 더 즐거워하게 됩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생명은 물질이나 땅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탐심은 곧 우상 숭배’(골 3:5)라고 말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까지 합니다. 탐욕을 버리며,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6~19절)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교훈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선례로는 아비가일의 남편 유다 지파 갈멜 족속의 마온 사람 나발을 들 수 있습니다(삼상 25:2~3). 부유한 나발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다윗이 식량을 얻고자 했으나 거절을 했습니다. 다윗을 모욕한 나발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날마다 호화롭게 먹고 마시는 부자 이야기도 나옵니다(16:19~30). 부의 바른 사용에 대한 교훈이 누가복음에 많이 나옵니다. 풍성한 수확을 얻은 부자는 곡식을 쌓을 곳이 없어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비유에서 유난히 반복되는 단어가 ‘나’입니다. ‘내가’, ‘내 곳간’, ‘내 모든 곡식’, ‘내 영혼’등의 표현에서 이 부자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보고 판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세계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풍요로웠지만 주님과의 사귐이 없었습니다. 많이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많이 가진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는 말은 “내가 ... 어찌할까”에 대한 답입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여기서 ‘물건’은 곡식 외에 창고에 보관할 다른 것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헐어 버릴 곳간과 새로 크게 지을 창고 모두 헬라어 본문에는 복수 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부자의 지대한 관심이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집중되어 있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부자의 말은 그가 무슨 목적으로 기존의 곳간들을 헐고 새 창고들을 크게 지으려고 했는지 잘 드러냅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에서 ‘여러’와 ‘많이’는 같은 형용사를 다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많은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자는 것입니다. 이 문장만 봐도 부자가 창고에 쌓아 놓은 재물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는 그의 말입니다. 4개의 명령형 동사로 이루어져있으니 부자의 영혼이 4가지 누림에 몰두하겠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한 말을 직역하면 ‘영혼아, 너는 평안히 쉬라, 너는 먹으라, 너는 마시라, 너는 즐거워하라’입니다. ‘먹으라’와 ‘마시라’는 과거명령형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쉬라’와 ‘즐거워하라’는 현재명령형입니다. 먹고 마시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쉬고 즐기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결단이 20절에 이어집니다.

부를 좇는 자의 어리석음 (20~21절)
하나님의 말씀은 부자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은 그의 계획과 인생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입니다. 부자가 인생을 즐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은 바로 부자가 곳간이 부족한 문제로 고민하다가 해결책을 발견하고 그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 누리려는 생각으로 들떠 있던 ‘바로 그날 밤’입니다. 여기서 ‘찾다’라는 단어는 ‘빌려준 것을 회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여물입니다. 영혼을 주신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요구하시면 바로 그날 밤 그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그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많은 재산이 결코 그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째, 자신의 안일한 삶을 위해 재물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재물 얻기에 힘쓰다 보면 종국에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게 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과 소유의 가치에 대해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소유는 생명이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납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는 일과 하나님께 대해 부요함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결단이며 선택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은 단지 기도나 성경 읽기와 같은 활동을 많이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려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과 사귐이 있을 때, 기도가 살아 있고 말씀을 붙들게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기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탐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모습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쁘게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쌓아두는 부자’가 아니라 ‘나누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자세
-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해 주십시오.”이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재산 분쟁입니다. 가정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은혜를 구하지 않았고 생명을 구하지 않았고 하나님 나라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산 분배만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찾지만 주님을 구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지만 주님과의 사귐이 아니라 문제 해결만 구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이 말씀은 거절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으로 초대입니다. ‘나는 단순한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생명의 주’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구해야 합니다.
-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유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문제의 핵심이 유산이 아니라 탐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탐심’이라는 용어는 '자꾸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가리킵니다. 구약에는 탐욕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의 실례가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간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때문에 그의 전 가족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수 7장).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뇌물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리에 나아갔다가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발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탐심은 단순히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내 삶을 지킬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탐심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엡 5:5). 우상 숭배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6:24). 우리의 존재 의미는 소유가 아닌 하나님께 있습니다. 물질 만능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생명은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생명의 본질입니다.
- 나눔이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탐심에 빠지면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둘 욕심만 있기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탐심에서 해방되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에 그 소유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소유로 다른 사람을 섬기며 주님 나라를 위하며 살게 됩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시간, 재능 등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면서 차고 넘치는 은혜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며, 그 종국에 부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사용하되, 재물이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것을 철저히 구별하고, 연약한 이웃을 위해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생명을 얻고 하늘 상급을 받는 비결입니다.

나가면서
정리해볼까요? 부자의 고민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졌다고 생각한 ‘내 것’의 풍부함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8)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가 소출을 많이 거둬들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손 안에만 넣으려 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풍성한 소출로 인한 부자의 고민의 해결 방법은 더 큰 곳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시는 것을 기뻐하실까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하였습니다. 그의 먹고 마심은 육신을 위한 먹고 마심이었습니다. 그러한 먹고 마심은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는 것(사 51:22, 23; 계 14:10)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쾌락은 ‘살았으나 죽은 것’(딤전 5:6)이고, 결국엔 영적인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 부자는 생각하는 것, 마음먹는 것이 오직 ‘나’위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기심은 결국 그를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내 곳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이라고 했지만 실상 그는 ‘곳간의 노예’, ‘곡식과 물건의 노예’였습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가치관을 따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책망하십니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탐심의 늪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탐심은 물질을 주인으로 삼고 생명을 경시하게 합니다. 탐심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과 사명의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그 물질을 선한 데 사용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소유가 아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재산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은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한 사람,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주님 위해 사용할 때 더 큰 은혜로 더 큰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라 하실까요? ‘어리석은 자여’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과의 진실한 사귐을 통해 탐욕을 버리고 영혼을 예수님으로 채우면서 나눔이 풍성한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부요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