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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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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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American dream을 이루려고 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국이 보호주의 색채를 띠면서 관세장벽이 높아지고 불체자 단속을 이유로 이민정책이 점점 강화하며 과거에 알던 미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식은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다고 하는데 서민들이 체감하는 환경은 고물가 속에서 이전보다 더 힘들게 여겨집니다. 체류 신분으로 불안해하는 이민자들이 많습니다.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거주지를 옮기는 것 이상의 영적, 심리적 도전입니다. ‘정체성의 불안’과 ‘생존의 두려움’이 이민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다른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자녀 세대와의 거리가 생깁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묘한 소외감이 듭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약해서가 아니라 ‘나그네’로 살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아주 본능적인 영적 신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이민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지만, 기근이 오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즉시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이라고 지으며 그 외로움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성경 속 믿음의 조상들이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본질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누구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느냐?’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질문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두려워하는가에 따라 누구를 믿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느끼는 그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두려움’은 사실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두려움은 있지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낯선 땅에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세상의 높은 산을 보며 낙심하기보다, 그 산 너머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당히 걸어가는 이민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리의 환호 속에서 들려온 경고 (1~3절)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논쟁을 벌이는 중에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수만 명’으로 번역된 ‘뮈리아스’는 숫자 10000을 가리킬 수도 있고, 단순히 아주 많음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의 환호와 열기 속에서 자칫 영적인 긴장이 풀리기 쉬운 그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왜 갑자기 외식을 말씀하셨을까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고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살피라는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외식이 혹시 제자들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지 잘 살피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6을 보면,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크리테스’는 원래 연극에서 여러 차례 가면을 써야 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과 중심을 숨긴 채 단순히 연기하거나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행동상의 불일치’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책망하신 사람들이 세리가 아니라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했기에, 즉 마음과 입술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수많은 세상의 소리와 분주함 속에 파묻혀 삽니다. ‘어떻게 하면 더 인정받을까?’,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한 울타리를 칠까?’고민하며 달려가다 보면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외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습니다. 직분도 있습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실제적인 사귐은 점점 줄어들다 보면 기도는 형식이 되고 말씀은 지식이 되고, 신앙은 습관이 됩니다.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 그리스도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누룩’은 이미 발효시켜 보관 중인 소량의 반죽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빵을 만들 때 이미 발효된 작은 반죽을 새로 만드는 반죽에 섞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누룩 자체는 크게 부풀지 않지만, 새 반죽을 부풀케 합니다. 외식이 누룩처럼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 영혼과 공동체 전체에 퍼져나가 변질시키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체면치레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을 방해하는 ‘종교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감추인 것’과 ‘숨긴 것’은 시각적인 표현이고, 3절에서 ‘어두운 데서 말한 것’과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은 청각적인 표현입니다. 외식이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만천하에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감추인 것’과 ‘숨긴 것’, ‘드러나지 않을 것’과 ‘알려지지 않을 것’은 각각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니 이를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의 경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앞에서의 정직으로의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신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두려움을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숨기고 싶은 것, 우리의 약함, 우리의 실패, 우리의 두려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이미 아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은 더 이상 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회복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정직한 삶,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더 두려워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참된 사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을 삼키는 참된 두려움 (4~7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신 경우는 성경에서 오직 이 곳과 요한복음 15:13~15뿐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연대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대와 신뢰를 내비칩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이 말씀은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말라.” 더 큰 권세를 가지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자’와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지 말씀하십니다. 세상 권력, 돈, 질병은 기껏해야 우리의 ‘몸’을 죽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영원을 결정하시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10:28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과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가 대조됩니다. 인간이 육신과 영혼을 지닌 존재며, 죽은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점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을 단순히 물질적 존재로만 이해하고, 세계가 이 역사 내에서 끝난다고 믿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나’는 ‘땅’이라는 뜻의 명사 ‘게’와 히브리어 ‘힌놈’의 음역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유다 왕 아하스 이후에 유대인들이 바알 몰렉에게 인신 제물을 바치던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킵니다(왕하 23:10; 대하 28:3). 포로기 이후에는 죽은 자들이 머물렀던 장소 혹은 죄인이 고통당하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다’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이 가진 권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장차 십자가를 지실 분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나를 보라 내가 먼저 그 길을 걸어간다.’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우리의 의지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분의 자비로우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제시됩니다. ‘참새’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작은 새’를 가리킵니다. ‘앗사리온’은 로마 은화였던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하고,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잊다’로 번역된 단어는 ‘소홀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아무리 문제 많고 연약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귀하게 여긴다고 하십니다. 또한 머리털까지도 하나님이 다 세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지켜 주심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예수님은 반대자들과 해하려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잘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내가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망하신다. 내가 부족하면 하나님이 멀어지신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귀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적으로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가치를 영원히 확정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은 세상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고백 (8~12절)
살다 보면 신앙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괜히 불편해질까,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괜히 관계가 어색해질까 해서 침묵합니다. 신앙은 마음속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세상 속에서,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시인하다’가 요한일서 1:9에는 ‘자백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호몰로게오’는 ‘동의하다’, ‘고백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 공적 정황에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두 번 언급된 ‘사람’은 4절에 언급된 ‘몸을 죽이는 자’, 즉 복음을 반대하는 자나 대적입니다. 신앙의 진가는 평안할 때가 아니라, 핍박과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누구를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을 시인할지 부인할지가 결정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배교의 길로 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떤 위협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습니다. 박해자 앞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부인하면 예수님도 그런 자를 하나님의 사자(천사)들 앞에서 부인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으므로, 그들 앞은 곧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배교자가 심판받을 때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장면이 최후 심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힘이 우리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목에 칼을 대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을 담대하게 시인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은 죽음이 두려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선 예수님을 부인하며 목숨을 부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나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고백과 증거로 이어집니다. 10~12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가르치시리라”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은 성령 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두려워합니다. 때로는 침묵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네가 알아서 믿음을 지켜라’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너희 안에서 말하게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을 말로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병행기사에서 바알세불 논쟁의 결론부에 등장합니다(마 12:32; 막 3:28~29). 두 복음서는 성령을 모독한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축사 사역을 사탄의 일로 비난했을 때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38~29).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일반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어떤 죄라도 용서함 받습니다. 예수님도 용서하지 못할 그런 큰 죄는 없습니다.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에 대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하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성령 모독죄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성령 모독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모독’한다는 것은 권위를 모독하고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성령을 통해 하신 것인데, 이를 ‘귀신의 왕’이 하는 일로 모함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성령의 권위를 모독한 것이 됩니다. 마치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성령 모독이 영원히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엘리 제사장이 그의 두 아들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삼상 2:25). 대답은 ‘없다’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아들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소문을 듣거나 오해하여 거역하는 말을 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도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성령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니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니 용서해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용서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도 않는데 저절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마음의 굳어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책망하십니다. ‘의’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순종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가 순종하도록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들추어내어 회개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더럽고 흉악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다 용서함을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따라서 성령 모독죄는 성령의 명백한 역사와 증거를 보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회개하지 않는 ‘굳어진 마음’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성령 모독죄입니다.
신앙 고백의 진가는 교회 밖, 힘을 가진 자들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비로소 발휘됩니다. 예수님은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 어떻게 대답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심문하거나 재판하는 장소를,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는 이방인들이 재판하거나 심문하는 법정을 가리킵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우리 입술에 담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를 사도행전(4:8~13; 6:10; 7:2~60)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다가 고난 받는 자를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사람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그에 따른 헌신입니다.
우리의 자세
- 외식이 아닌 주님과의 진실한 사귐을 회복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었습니다. 외식은 겉은 경건하지만 속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신앙”에 익숙해집니다. 예배는 빠지지 않지만 마음은 멀어 있고 기도는 하지만 진짜 마음은 숨기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상처와 분노는 감춘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숨겨진 것은 반드시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신앙적 태도, 귀한 헌신, 열정적인 신앙생활 등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종교적 행위로 포장되기 시작할 때 예수님을 통한 은혜와 긍휼의 복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의’를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동기와 진짜 목적을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은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있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 속에서 인격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형식적인 말의 나열보다 지금 내 마음 상태, 즉 두려움, 서운함, 걱정, 감사 등을 주님께 솔직히 털어 놓아야 합니다. ‘coram deo'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아래 겉과 속이 일치하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자신의 가치를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사람을 많이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평가 하나에 쉽게 흔들립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시며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능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정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잘한 날에도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실패한 날에도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우리를 참새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 우리의 머리털하나까지도 세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불신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믿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0에서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귀한 존재라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 성령을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시인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 고백을 넘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담대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그분을 시인하는 가에 따라 종말에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지를 결정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담대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가르치시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을 의지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힘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삶 자체가 증거가 됩니다. 우리의 작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 작은 사랑의 표현이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나가면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거창한 일을 요구하시기보다 우리를 주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는 예수님이 먼저 두려움의 길을 걸어가셨고 승리하셨습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주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형식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과의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시선이나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사랑받는 존재임을 매일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기회가 올 때마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당당히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