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빛 안에서 누리는 주님과의 사귐

Author
Date
2026-02-01 15:28
Views
14
성경구절 : 눅 11:29~36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안 믿겠다.’과학의 시대, 증거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실험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수치로 설명되어야 하며, 결과가 눈앞에 보여야 안심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표적을 요구합니다. 병이 나으면 믿겠다고 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보이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깨달음과 보이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보여주실 ‘무언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호기심과 욕망을 채워줄 ‘구경거리’와 ‘기적’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실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내가 행하는 표적을 사랑하느냐?’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요나의 표적에 대한 말씀(29~32절)이고, 둘째는 등불의 비유와 그 적용(33~36절)입니다. 이 두 말씀은 결국 하나의 주제로 연결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표적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만이 빛 가운데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방해하는 ‘표적 신앙’을 멀리하고, 주님과의 진정한 사귐을 통해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대의 표적이신 예수님(29~32절)
“무리가 모였을 때에”란 표현은 27절의 무리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는 것이 아니라, 무리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몰려든 무리를 향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악한 세대’라는 표현이 구약에 여러 번 나옵니다(신 1:35; 32:5,20). 이 구절들은 애굽에서 탈출한 후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대항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볼 때, 29절의 ‘이 세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며, 굶주린 자들이 배불리 먹는 일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방식의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 없이 확실한 증거만을 붙들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표적을 본 후에 믿겠다는 태도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귐은 신뢰를 전제로 하는데, 표적을 요구하는 마음에는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행한 기적을 보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해서 심판을 면했습니다. 요나는 그저 󈬘일이 지나면 망한다”라고 외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외침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이 세대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도 이 세대의 표적이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귐의 본질을 봅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기적과 같은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올바로 반응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대에 맞게 행동하셔야 믿겠다는 태도는 겸손한 믿음이 아니라 조건부 신앙입니다. 표적은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는 마음은 어떤 표적 앞에서도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할 뿐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신비한 현상을 경험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함으로 깊어집니다.

누가는 요나의 표적에 대한 설명을 잠시 유보하고 남방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남방 여왕은 ‘스바의 여왕’(왕상 10:1~13)을 가리킵니다. ‘스바’의 위치는 아라비아 반도 남쪽, 오늘날의 예맨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고 감탄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항상 듣는 종들을 부러워했습니다(왕상 10:8).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사건은 당시 열방의 모든 왕이 솔로몬에 대해 가졌던 열망을 대표합니다(왕상 4:34). 그런데 솔로몬을 방문해서 그의 지혜를 듣는다고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되거나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죄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말하기는 했지만 지혜 자체로 간주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시며(눅 7:35; 고전 1:24,30),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십니다(요 1:1).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남방 여왕을 언급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왔던 여왕의 모습은, 진리를 사모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지금 사람들 곁에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귀기를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귐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우리가 마음을 닫으면 사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방 여왕이 당시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남방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판’에 정관사가 있으므로 ‘그 심판’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 재판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최후 심판 때에 남방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예수님의 지혜를 듣지 않고 도리어 배척한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가 전한 메시지를 듣고 돌이켜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메시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기를 바랐습니다. 사흘 동안 걸어야 할 만큼 큰 성읍이었는데 하루 동안만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고 외쳤습니다. 요나가 사랑과 동정의 마음이 없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온 성이 대대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온 백성이, 심지어는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회개에 동참했습니다(욘 3:5~9).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에 대한 결론으로 자신이 요나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찼고, 백성에게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성의 없이 전한 말을 듣고도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왔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 눈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니느웨 사람들을 경멸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이 니느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완악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가장 분명한 표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신앙은 새로운 표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등불과 눈의 원리(33~36절)
33절의 내용은 누가복음 8:16과 동일하지만, 위치한 문맥이 다릅니다. 8:16의 등불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영적 전쟁에 관한 비밀이 영원히 숨겨진 것이 아니고, 등불을 켜서 밝히 보면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비유의 목적이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3절의 말씀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표증을 요구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맥락 속에 있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는 말씀은 눈이 빛처럼 사물을 비추어 본다고 여긴 고대 사람들의 시각 이론에 근거한 비유입니다. 그들은 눈이 광선을 발하여 밝혀 사물을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서 나와 사물을 보는 빛은 35절이 언급하는 ‘네 속에 있는 빛’입니다. 이 빛이 어두우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영적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눈’은 유대인들의 문헌에서 ‘의도’를 뜻하므로, 눈이 어둡다는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도대로 보기 때문에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그의 나쁜 의도대로 변질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 비유의 말씀은 메시아인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치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지 않는 사람들과 같음을 알려 줍니다.

눈은 마음의 창으로,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뇌와 마음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또한 입과 더불어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는 창구입니다. 눈과 몸, 눈과 마음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심지어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성품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햇빛의 문제가 아니라 창문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고,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비유가 아니라 영적인 통찰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하다’라는 말은 곁눈질하지 않고 한 곳을 직시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주님만을 향해 고정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내면을 온전히 비추게 됩니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을 때 종이가 타오르듯,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주님께 집중될 때 비로소 우리 영혼에 불이 붙으며 어둠이 물러갑니다. 반면에 ‘나쁘다’로 번역된 형용사는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나쁜 눈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갈망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마음, 비교와 판단에 사로잡힌 마음, 자기 의를 붙드는 태도는 모두 ‘나쁜 눈’의 증상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주님과의 사귐이 왜곡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말씀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이 빛을 비추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삶에서, 빛을 따르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표적을 구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우리 안에 비추고 계신 빛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눈이 밝다는 것은, 주님을 향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사귐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갈망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사귐은 점검이 필요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사귐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의 참된 사귐이 회복되면, 우리의 삶은 점점 빛으로 충만해집니다. 생각이 밝아지고, 관계가 회복되며, 선택이 달라집니다. 반면에 사귐이 없으면 매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려하니 그는 점점 어두워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주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은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빛이 마음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비추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이 빛으로 가득 차면, 그 빛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갑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우리만의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고,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자세
우리는 어떻게 ‘표적 신앙’을 넘어 ‘사귐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말씀으로 사귐)
표적을 구하는 신앙에서 말씀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적과 증거를 구하기보다 지금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순종으로 응답하는 제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성령의 일깨우심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확실한 표적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방인이었음에도 요나의 전도를 듣고 바로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처럼 말씀 앞에서 즉시로 마음을 찢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남방 여왕의 열망을 본받아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진정으로 복이 있습니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말씀대로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 우리 안의 ‘어두운 구석’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정직한 사귐)
주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은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시간에 나의 수치심, 욕심, 비교하는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빛 되신 주님이 내 마음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비추시도록 허락할 때, 비로소 우리의 생각이 밝아지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세상의 가치와 비교, 자기 의와 판단의 시선을 버리고,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날마다 점검하며, 주님을 향해 열린 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선택이 어둠이 아닌 빛의 다스림을 받게 하며,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집니다. 우리 안에 계신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어두움을 완전히 몰아내도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 삶의 자리에서 그 빛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세상과의 사귐)
주님과의 사귐으로 내 삶이 밝아졌다면, 그 빛을 감추지 말고 등경 위에 둔 등불처럼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빛의 사자로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향해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증거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말(비난, 불평) 대신 빛의 말(격려, 감사)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해 보고 먼저 용서하는 모습을 보이며 세상을 비추는 등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폭로하셨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혜 자체이시며, 구약의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방인들은 작은 빛(솔로몬의 지혜, 요나의 설교)에도 반응하여 회개하고 구원에 참여했는데, 가장 큰 빛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거부하는 세대는 마지막 심판 때에 그 이방인들에게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에 변화를 보인 이방인들이므로,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반응할 이방인들의 모형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언급하신 것은 장차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시대를 예고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소원 성취를 보장하는 표적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과 비교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곁에 계신 ‘더 크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질 때, 우리 인생의 모든 어두움은 물러가고 등불의 광채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비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신앙을 넘어, 말씀의 빛 안에 거하며 주님과 깊이 사귀는 삶으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사귐이 깊어져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 쓰임 받으시기를 이 세대의 참된 표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