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된 사귐, 더 강한 분과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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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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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1:14~28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단순한 만남과 지속적인 사귐은 차원이 다릅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좋은 배우자를 구해야 한다, 좋은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등의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귐의 대상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자주 만납니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까? 비판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아니면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합니까? 누구와 사귀느냐에 따라 우리의 언어, 가치관, 행동이 달라집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사귐’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하나님과 사귐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들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겉으로 보면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영적 전쟁의 실체와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무리가 주장하자 예수님은 그들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예수님의 축귀 사역이 실제로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는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금년 저희 교회 표어가 ‘진정한 사귐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귐과 연관 지어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킨 예수님의 승리와 능력에 대해 알아보고 예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지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 바랍니다.

비방을 받으신 예수님(14~16절)
예수님이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그 사람이 말하게 되자 무리가 놀랐습니다.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은 ‘말 못하는 귀신’이란 뜻입니다. 귀신 그 자체가 벙어리이면서, 사로잡은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바알세불’과 한패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것이요, 열광적으로 몰려드는 무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바알세불의 원래 이름은 ‘바알세붑’으로 ‘파리들의 주’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신을 경멸하며 ‘세붑’과 발음이 비슷한 세벨(똥)로 변형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에 사자를 보내면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 선지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왕하 1:2,6). ‘바알세불’은 신약에서 ‘귀신들의 왕’을 가리키며 사탄과 동일시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능력을 받는다고 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사탄의 행위로 정죄했습니다. 감기만 걸려도 귀신의 역사라고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문제지만 귀신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본 것이 표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기적을 보아도, 하나님과 사귐이 없으면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대신 오해와 왜곡이 생깁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사귐이 없다면,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신하게 되고 의심하게 됩니다. 귀신을 축출한 것은 그를 사탄 나라의 속박에서 건져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었습니다(7:21~22). 사탄과의 사귐이 분열과 파괴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눈앞에서 일하셔도 그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사귐, 즉 악한 생각과 비방에 마음을 내어주는 삶의 끝은 ‘황폐함’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도 마음이 뜨거워지거나 기쁨이 없고, 우리의 내면이나 공동체가 갈등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누구와 사귐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신 예수님(17~20절)
예수님의 사역이 자칫하면 사탄의 사역으로 오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에 찬 주장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고 있다는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쟁하는 나라와 가정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불신앙과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보편적인 사실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나 집은 황폐해지고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에서 지도자들끼리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며 분열한다면 그 나라는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집안에서 식구들끼리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그 집안은 엉망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귀신의 축출이 사탄의 세력이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고 70인 제자에게 천명하셨습니다(10:17~18). 또한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면서 사람들을 사탄 나라의 압제와 귀신의 손에서 건져 내신 것은 사탄과 그의 악한 세력들이 그분께 패배하는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분의 귀신 축출이 사탄 나라의 내분이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축귀를 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논리적인 일관성이 있으려면 그들의 아들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의 병행기록에는 ‘하나님의 손’대신 ‘하나님의 성령’이 사용됩니다(마 12:28).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축귀를 ‘하나님의 손’의 활동이라고 묘사하십니다. ‘손’을 직역하면 ‘손가락’입니다. 출애굽기 8:19에서 모세가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을 행했을 때, 애굽의 요술사는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권능’을 직역하면 ‘손가락’입니다. 예수님의 축귀 사역은 단순히 한 개인의 치유를 넘어, 출애굽 때처럼 사탄의 압제로부터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는 거대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술이나 마법에 힘입지 않은, 하나님의 활동 그 자체였고, 그것이 나타나는 현장이 곧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미 임했다’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앞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오고 있고, 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귐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주일에는 하나님과 사귀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일에는 세상적으로 가치 있다는 것과 가까이 하고,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 기준을 따를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은 질서와 회복을 가져옵니다. 우리 삶에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우리 힘으로 수습하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삶을 만지시도록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더 강한 자’이신 예수님(21~23절)
21~22절은 축귀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관계를 좀 더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입니다. 강한 자와 더 강한 자의 대결을 소재로 한 이 이야기는 이사야 49:24~25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바벨론 군대에게 공격을 받아 패함으로 포로로 잡혀 갔지만, 바벨론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이 강한 나라를 제압하시고 이스라엘을 빼앗아 오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로잡힘으로부터 놓여 고토로 돌아오고 언약 공동체가 회복되는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의 나라 내부에서 세력다툼이나 분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와의 영적인 전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귀신 축출이 강한 자 사탄을 무장해제 시킨 후에 인질을 구출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강한 자는 사탄을, 그 집은 사탄의 나라와 왕궁을, 그의 무장은 그가 거느리는 귀신의 세력을, 그의 소유는 그가 인질로 사로잡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더 강한 자는 사탄과 그의 나라에 대항해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복음은 ‘더 강한 분’이 오셨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의 무장, 즉 죄의 정죄와 사망의 공포를 해제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귄다는 것은 그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그분을 반대하고 그분의 백성을 헤치는 자입니다. 우리가 죄의 습관이나 영적 눌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상대가 ‘강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강하시기에(요일 4:4),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강함을 의지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과 유혹은 지금도 강력하지만, 더 강한 주를 의지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거듭날 수 있고, 거룩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비어 있는 집'의 비유(24~26절)
그런데 귀신이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쫓겨난 더러운 귀신이 거처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거할 곳을 찾지 못해 그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가서 보니 그 집에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이 더 악한 귀신들을 데리고 다시 그 사람에게로 들어가니 그 사람의 상황은 이전보다 더 나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떠났던 귀신이 왜 다시 그곳에 거처를 정했을까요? 그 집에는 주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없으면 더러운 귀신은 다시 돌아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말 못하던 사람은 이제 중요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다시 열린 그 입으로 무엇을 말하며 살지에 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주인을 정하지 않은 사람, 즉 누구에게 순종하며 살지를 결단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탄은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지 않고, 성령이 거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각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짓말 안 하기, 혈기 안 부리기, 술 담배 안 하기’등 ‘비우는 행위’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비우기만 하고 그 공간을 주님과의 사귐으로 채우지 않으면, 나중 형편은 이전보다 훨씬 나빠집니다. 즉 영적 교만이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는 종교적 수양이나 도덕적 결단은 일시적인 평안을 줄 수 있지만, 그 빈 공간은 곧 다른 악한 세력의 표적이 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장악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악을 멀리하는 ‘소극적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적극적 신앙’만이 완전한 보호막이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빈 집’을 채우는 비결이 바로 말씀에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절).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기 전, 기도를 가르치시며 ‘성령’을 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빈 집을 채우는 가장 강력한 분이신 ‘성령’을 기도로 초청해야 함으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 힘이 아닌 ‘더 강한 분’의 능력을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참된 복을 얻으려면(27~28절)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던 한 여인이 갑자기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에 기여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말 중 ‘복이 있다’는 말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삶으로 지켜내는 자들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은혜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참된 사귐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말씀을 내 삶에 ‘지키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과 사귀는 것이 곧 주님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악한 세력은 우리 안에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우리의 자세
- 삶의 주권을 예수님께 내어드립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와 절망으로 묶어두려는 ‘강한 자’이지만, 예수님은 그를 굴복시키고 무장을 해제시키는‘더 강한 자’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죄의 습관을 이기려 하기보다, 이미 승리하신 주님의 강함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도록 주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 명확한 신앙의 태도를 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색 지대에 머물러 세상의 가치와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어중간한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모으고 세우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 마음의 ‘빈 집’을 성령과 말씀으로 채웁니다
단순히 나쁜 습관을 버리는 ‘비우는 신앙’에만 머물면,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비워진 마음의 공간을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야 악한 세력이 틈타지 못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을 구하고,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 사탄이 발붙일 곳 없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된 삶을 삽니다
참된 복은 예수님과의 혈연이나 단순한 지식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묵상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완성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 못 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며 불신과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바로 설 수 없다는 논리로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임을 선포하십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와 절망으로 묶어두려는 ‘강한 자’이지만, 예수님은 그를 굴복시키고 무장을 빼앗으시는 ‘더 강한 자’로 오셨습니다. 악한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진정한 사귐이며 승리의 비결입니다. 귀신이 나간 뒤 집을 비워두면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 형편이 나빠지듯, 우리 마음이 비워진 것에만 만족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사탄의 영향력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는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과 사귀며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 사귐이 회복될 때 우리가 믿음에 온전히 서게 되고, 삶이 정돈되고, 가정과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그분과 깊은 사귐을 나누는 것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으니, 어중간하게 서 있지 말고,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 순종하는 복된 삶을 살라’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올 한 해 ‘더 강한 분’이신 주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