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사귐을 회복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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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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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진정한 사귐이 있는 교회’라는 주제로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살펴본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리의 자세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정해진 시간에 모이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있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성도 간의 진실한 사귐이 흐르는 ‘생명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보여주는 표징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기도는 단순히 내 요구사항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잣대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본을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야말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삶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3:21), 제자들을 부르실 때(6:13), 변화산에서(9:28)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까지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기도는 단순히 필요를 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자 영적인 호흡 그 자체였습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예배를 마칠 때 습관적으로 외우는 주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담은 ‘삶의 설계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기도의 내용, 기도를 드리는 자세, 기도의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도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기도생활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면서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1절)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 간절한 요청을 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세례자 요한이 가르쳐준 기도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가 속한 그룹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명기 6장에 있는 Shema를 날마다 암송하면서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에 담겨진 내용을 되새기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이유는 단순히 기도하는 기술적인 방법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마다 느껴지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하고도 친밀한 ‘사귐’을 곁에서 지켜보며 깊은 감동과 부러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문자 그대로 따라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라”하시며 주신 모범적인 기도의 본입니다. 주기도문 안에 기도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두 가지 간구(2절)
- 기도의 대상: 아버지
예수님은 기도의 첫마디를 ‘아버지여’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버지’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은 15번이지만,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파격적이었습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고 두려운 존재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친밀한 ‘아빠 아버지’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내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자녀인지를 확인하는 ‘관계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버지’이 한 단어만 반복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르는 ‘아버지’라는 한마디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고 사랑을 가지고 보살피는 아버지에 대한 친밀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9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주기도문이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하게 되오며)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간구입니다. 우리 필요보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인격 자체를 그분의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여 드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다’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당장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4~16은 계명을 위반하고 노비를 풀어 주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책망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지기를 비는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도록 간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나라가 임하시오며(나라가 오게 하시며)
“나라가 임하시오며”에서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내 마음, 내 가정, 나의 삶의 현장에 임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고집과 자아를 내려놓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임하다’라는 동사 역시 과거명령형이므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속히 오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탄의 통치를 물리치는 구원 시대의 시작을 가리키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비는 기도는 또한 구원을 비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기원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헌신의 표시입니다. 이는 우리 뜻을 관철시키려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계획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할 때, 우리 삶에는 진정한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위한 세 가지 간구(3~4절)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다면, 이제 우리의 연약한 현실을 위해 기도할 차례입니다.
-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유대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은 광야의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의 생존을 책임졌던 신비한 음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실 때 몇 가지 엄격한 규칙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욕심을 부려 다음 날 것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평소의 두 배를 거두었지만, 신기하게도 이날 거둔 만나는 다음 날까지 두어도 썩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부르시며, 육의 생명을 유지해준 만나와 달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존재로 비유하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정해진 양만 거두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시험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는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겸손의 표시이며, 나를 넘어 공동체의 필요를 함께 돌아보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은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 죄 용서
기도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죄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연결하셨는데, 이는 이웃과의 깨어진 관계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 용서를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죄 용서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에 근거하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부활 사건에 근거해 주어지는 죄 용서의 은혜를 받았으니 받은 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하던 형제를 용서하고 서로를 위해 간구함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묶이는 수평적인 사귐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 영적인 보호
마귀의 시험은 우리를 죄악에 빠지게 하기 위한 유혹이고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더 유익한 길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유혹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공격 앞에 무력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험에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리를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불신자처럼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체성을 지키게 해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신자가 기도해야 할 내용과 살아야 할 삶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귀한 교훈을 얻습니다. 주기도문은 1분이면 다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삶으로 살아내는 데는 평생이 걸립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느껴야 하고 우리의 필요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공동체의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과거, 현재, 미래의 것, 육신적인 것과 영적인 모든 것을 아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간구하는 모든 것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읽거나 암송하면서 한 단어, 한 문장에 마음을 담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기도를 시작하세요. 우리가 주기도문대로 기도하고 그 기도대로 살기 시작할 때, 하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아름답게 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기도문에 있는 5가지 간구 중 자기의 삶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 하나를 정해 한 주 동안 집중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밤에 찾아온 벗의 비유(5~8절)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여행 중인 친구가 밤에 찾아오는 것은 낮이 무더운 중동에서 흔한 일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손님 대접은 최고의 미덕이었으므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옆집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무리 밤중이라도 적절한 행동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떡 세 덩이는 손님 한 사람을 대접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양이었습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예수님은 그 벗이 단지 관계에 기댄 것이 아니라 간청했기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간청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뻔뻔스러움’혹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의 요청을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에서 나오는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격식을 차리기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 '뻔뻔할 정도로' 친밀하게 다가가기를 원하십니다. 응답이 더디게 임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끈기 있게 문을 두드리는 것, 그것이 참된 사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자녀의 기도를 귀찮아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사귐은 포기하지 않는 신뢰(9~10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같은 내용을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다른 내용을 가르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9절의 세 개의 명령문과 10절의 응답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주제가 아니라 같은 내용을 표현만 달리하여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동의 주체는 ‘너희’, 즉 제자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받게 되고, 찾게 되고, 열리게 된다’고 합니다. 세 동사는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어 하나님이 행위자이심을 암시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기계적인 약속이 아니라 관계의 표현입니다. 이 명령은 모두 현재형으로 ‘계속해서’하라는 뜻입니다. 왜 계속해야 할까요? 사귐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대화하며 그분과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오길 원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할 때, 우리는 단순히 원하는 응답을 받는 것을 넘어, 기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얻게 됩니다.
가장 좋은 선물(11~13절)
예수님은 아들이 생선을 요구할 때 뱀을 주거나 알을 요구할 때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게 마련이라고 하시면서,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넘어 성령을 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문제 해결이나 물질적인 복을 최고의 응답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우리가 세상 풍파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사귐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최종 목적은 우리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동행하는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진대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주합니다. 빨리빨리 모든 것이 진행되기 원합니다. 기도하는 5분조차도 아깝게 느껴지고 무엇인가 일을 벌려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공생애 기간에 무리가 아침에도 밤중에도 식사할 시간도 없이 예수님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을 내어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간적인 뜻과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으로 주님과 대화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가면서
2026년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은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공동체입니다. 기도는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과 마음을 나누는 가장 안전한 쉼과 안식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담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행하실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은 우리를 이 깊은 사귐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입니다.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눈을 맞추며 마음을 나누는 '사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기도가 하나 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한 사귐을 나누는 건강한 공동체로 세워질 것입니다. 저는 팔로마한인교회를 머지않아 떠나지만 후임목사와 온 교우들이 한 마음이 되어 섬기며 말씀과 기도의 공동체, 섬김과 선교의 공동체가 되어 건강하게 성장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흥분이 됩니다. 온 교우들이 이 귀한 사역에 한 분도 낙오하지 않고 기쁨으로 동참하며 진정한 사귐의 공동체를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