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빛 가운데 행하는 사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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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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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요일 1:1~10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 표어가 ‘진정한 사귐이 있는 교회’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사귐’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친목이나 사교 활동을 넘어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 19번 사용되는데 연합, 교제, 구제, 참여, 나눔 등의 뜻을 가집니다. 코이노니아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지체로서 기쁨과 슬픔, 고난에 함께 참여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사귐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통용하고 가난한 자를 도왔습니다(행 2:42-45). 그리스도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하나님 및 다른 성도들과 생명, 재산, 고난, 기쁨, 슬픔을 함께 소유하고 나누는 역동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 ‘사귐’은 우리 삶의 본질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그 자체입니다. 이것인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가치입니다. 새해에는 온 교우들이 주님과 다이내믹한 교제를 나누며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뿐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함께 세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삶(1~4절)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태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입니다.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어서 창조 전부터 그 말씀이 계속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말씀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으며, 말씀으로 모든 것이 산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말씀’, 혹은 ‘생명 그 자체인 말씀’을 뜻합니다. 그런데 ‘logos’즉 말씀이 예수님이시니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면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이 핵심주제로 다루어졌듯이(1:14),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성육신이 핵심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실제로 오셨고,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냈다는 것입니다. ‘보다’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는 표현을 써서 자신들이 성육신의 실제 증인임을 보다 확실하게 말합니다. 요한이 왜 이런 내용으로 본문을 시작할까요? 당시에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현설(docetism)은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발생한 극단적인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육신을 입지 않고 단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이단 사상입니다. 그런 교리를 추종하는 자들을 영지주의자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이나 십자가 수난을 환상으로 치부했는데 사도 요한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며 예수님의 육체적 실존을 강조했습니다. 요한은 자신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목격했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3절에 의하면 요한 서신의 기록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와 연합입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 이 사귐의 출발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 헌신, 순종이 친밀감을 깊고 강하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사귐은 생명을 보증하고 누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참된 생명과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귐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목적이요, 삶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사귐’이라고 번역된 ‘코이노니아’라는 단어가 요한 문헌에서는 여기에만 나옵니다(1:3,6,7).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수직적 사귐의 대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이 같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의 사귐과 하나님과의 사귐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요한과 그 공동체는 그 사귐의 결과가 자신들의 충만한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주십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삶(5~7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듣고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빛과 어둠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징입니다. 빛은 하나님 자신 혹은 성경적 진리를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반면에 어둠은 죄악이나 거짓된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여전히 미움, 거짓, 탐욕이라는 어둠 속에 거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완벽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날에 범했던 죄를 회개하고 악한 행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때,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성도 간의 진정한 사귐이 일어납니다. 새해에는 진리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세 가지 거짓 주장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마귀는 여전히 성도들을 미혹하여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고 진리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당시 성도들을 미혹하던 대적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그 주장을 반박합니다.
-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6~7절)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는 영을 감싸고 있는 단순한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육체의 행위가 영을 오염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단 믿기만 하면 몸으로 죄를 범해도 상관없고, 불의한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진리대로 살지 않는 거짓말쟁이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씀은 그분과 교제를 갖는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과거에 즐기던 죄를 계속 범할 수 없으며, 어둠 속에 거하면서 하나님과 사귈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도덕적인 삶의 필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나는 원래 죄가 없다’(8~9절)
그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죄악 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까? 좀 더 풀어서 말씀드린다면, 원래 죄인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원래부터 죄인이니까 죄를 범했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밧세바와의 간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 통곡을 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죄 씻음을 구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은 자신의 죄의 뿌리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 것은 갑작스러운 탈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강력한 죄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내면의 죄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예 그들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진리가 그들 안에 있다면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속아서 죄 없다 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며 성경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속에 거짓과 죄악이 가득 차 있어 진리를 알 능력이 없고, 불법을 행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속 깊은 곳에서 죄가 자리를 잡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절규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하면서 자기 안이 영적인 싸움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악의 유혹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도록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10절)
대적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죄를 짓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 안에 신적인 빛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영지주의 이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은 죄가 없고,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하나님과의 사귐과 다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하여 명백히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의 행위가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선포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스스로를 죄 없다 하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성경에 무지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단
빛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신 것은 죄가 없고 깨끗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도 우리는 때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첫걸음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피는 생명을 표시하며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으로 생명을 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었을 때 짐승이 그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 성도와 성도 사이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인하여 죄 용서를 받습니다. 따라서 빛 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 생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9절에 있는 약속의 말씀을 읽어볼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자백’으로 번역된 헬라어 ‘homologeo’는 ‘같다’는 의미의 ‘homo’와 ‘말하다’는 의미의 ‘logeo’의 합성어입니다. 자백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죄의 자백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실 것을 약속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언약을 맺으신 후 하나님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셔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뜨렸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신들과는 달리, 자기 멋대로나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하시지 않고 부당한 요구도 않으시고 모든 일을 공평하게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심에 따라 백성에게 올바른 행위를 요구하십니다.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죄를 용서해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문자적으로 490번까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언제 자백합니까?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죄를 깨닫자마자 당장 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자백한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시 103:1-2)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 하다가 전에 잘못했다고 자백한 죄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왜 죄가 다시 생각납니까? 죄는 파괴력이 있기에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셨지만 그 흔적은 남기 마련입니다. 못을 박았다가 뽑으면 못 자국이 남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가 다시 생각나면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죄를 짓지 않도록 고통과 수치심을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에 자백한 죄가 생각나면 하나님이 이런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런 죄를 다시는 짓지 않아야 합니다.
- 예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라고 외쳤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돌아가서 힘써 하나님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그 대상과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의 관심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율법을 어기고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고 거짓말을 하고 독한 말들을 품어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호 6:6) 하면서 하나님과 지속적이고도 다이내믹한 관계를 가질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나타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죄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때 사귐을 중단하지 않고 이어가는 비결이 ‘자백’입니다. 자백은 깨어진 관계를 복구하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금방 사라지지만,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은 영원합니다. 관념적인 종교 생활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지는’생생한 사귐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 이웃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수평적인 인간관계 이전에,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웃과 어떻게 하면 참된 사귐을 나눌 수 있을까요?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심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죄, 미움, 거짓과 같은 어둠 가운데 행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이웃과도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거할 때, 비로소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진정한 사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기 의’입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이웃과의 사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며,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때 비로소 가식 없는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요한은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서 함께 용서받은 죄인임을 고백할 때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나의 죄와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형제나 자매 앞에 고백할 때 어둠은 물러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그 넘치는 기쁨으로 이웃의 손을 잡는 진정한 사귐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귐이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붙어 있어 그분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연합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관계’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사귄다고 말합니다. 사귐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이 복음을 듣는 자로 하여금 복음을 믿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시작되며, 정직한 자기 고백을 통해 완성됩니다. 날마다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고 주님께 자백함으로 씻음을 받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주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기쁨이 넘쳐서 지체들에게 흘러갈 것을 믿습니다. 새해에 죄를 시인하는 정직함과 서로를 용납하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빛의 공동체, 진정한 사귐이 있는 교회를 함께 세워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