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Author
명
Date
2025-12-28 14:53
Views
52
신문에서 미국, 세계 10대 뉴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니 관세 전쟁, 이민자 단속, 미중 패권다툼 격화, 가자 지구 휴전, 끝나지 않은 우크라 전쟁 등이 열거되었습니다. 성도님들 개인의 10대 뉴스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우리는 2025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기뻤던 일도 있었고, 후회되는 일도 있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눈물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토대로 본다면 우리가 던져야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느냐?’입니다. 사무엘은 미스바 전투 후 돌 하나를 세우고 그 돌을 ‘에벤에셀’이라 불렀습니다(삼상 7:12). ‘여기까지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에벤에셀의 돌은 승리의 기념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 돌은 “우리가 잘했다”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살아남았다”는 겸손한 고백이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성자 조지 뮬러는 생애 동안 5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자신이 받은 구체적인 응답들을 ‘기도 수첩’에 적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매 순간 나를 먹이시고 입히신 에벤에셀의 은혜 때문입니다.”오늘 나눠드린 ‘감사와 기도 제목’난에 한해를 돌아보며 감사한 것, 내년에 하나님께서 이뤄주시기를 원하는 기도 제목을 적어 송구영신예배 때나 다음주 신년감사주일에 헌금통에 넣어주시면 제가 그것을 가지고 한 해 동안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구하는 것를 적어 예배를 드리며 '나의 에벤에셀 수첩'에 적힐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움을 떠올려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지금, 무사히 넘긴 위기의 순간들,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믿음, 여전히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 자신 등이 에벤에셀의 사인입니다. 송년주일은 한 해를 평가하고 자책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날입니다. 다윗이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고백했던 시편 103편을 통해, 우리 영혼을 깨워 하나님을 찬양하며 복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을 깨우는 송축 (1~2절)
관계의 깊이는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합니다. 함께 지내고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 알아가야 관계가 깊어집니다. 목장도 자주 모여야 목장 식구들끼리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려면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의 저자인 다윗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내 영혼아’‘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고 부르면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자고 합니다. 여기서 ‘내 영혼아’라는 호격은 자기 자신을 부르는 관용적인 표현이며,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마음의 중심을 포함한 자신의 전 존재를 가리킵니다. ‘송축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라크’는 영어로는 ‘bless’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바라크 할 때는 ‘송축하다’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크 할 때는 ‘축복하다’가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실 때는 ‘복을 주시다’가 됩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대상이므로 ‘송축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그의 모든 은택’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사역을 대표합니다. 은택은 은혜와 혜택을 합친 말입니다. ‘은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보답’이나 ‘대우’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친절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은택을 받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물과 공기를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조성하시고 주관하십니다. 옛 속담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은 나쁜 기억은 오래 간직하고,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자기 영혼에게 명령한 이유는, 우리 영혼을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불평과 망각으로 흘러가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은혜를 '물'이 아니라 '마음 판'에 새기기 위해 의지적으로 찬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쉽게 망각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작은 손길 하나에도 감사합니다. 햇빛, 달빛, 별빛, 자녀,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그동안 ‘주신 은혜’와 앞으로 ‘주실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베푸신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으며 감사할 때 우리의 영육이 윤택하여지고 더 많은 감사의 열매들이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더러 이웃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다섯 가지 은혜 (3~5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너’라고 부르면서 다섯 개의 분사(사하시다, 고치시다, 구속하시다, 관을 씌우시다, 만족케 하시다)와 하나의 미완료 동사(새롭게 하시다)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양합니다. 분사로 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도우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속해서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 모든 죄악을 사하심 (3절 상)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택 중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은 죄 사함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근본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죄 사함이 없다면 우리는 저주와 형벌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뿐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이라는 뼈아픈 죄를 경험했지만,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용서받았습니다. 그때를 배경으로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0-11). 다윗은‘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다윗은 시 130:10에서도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한 해를 지내면서 혹시 죄로 인해 넘어진 적은 없었습니까? 말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일부 죄’가 아니라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자와 사랑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할 때에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파멸에서 구원하십니다. 이 은혜를 인해 우리는 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 모든 병을 고치심 (3절 하)
인간은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금이 가고 깨어집니다. 질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창조주이자 만병의 치료자 되시는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다 아시고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시편 139:13에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에 이어지는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는 표현은 죄 사함 받은 증거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암시합니다.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거나 죽은 일이 없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교우들 중에도 여러 분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팔레스타인에 있는 모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오심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자는 육신의 질병도 은혜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케 하기 위한 수단인지 몰랐기에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드린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했지만 기도하면서 깨달은 진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9)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이 바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시를 주신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병은 이미 고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 15:26).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나 많은 경우 치료는 죄 사함을 받은 외적인 표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 질병을 고치시는 권세, 귀신 쫓는 권세를 갖고 사역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 4:24). 여기서 ‘모든 병’은 육체적인 질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재앙을 포함합니다. 시편 91:3-7을 보면 그 재앙은 사냥꾼의 올무, 심한 전염병, 밤의 공포, 날아드는 살, 각종 재앙을 포함합니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 믿고 죽고 나서 하늘나라에 가는 내세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현재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모든 질병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는 낙심의 병, 외로움의 병, 분노와 상처의 병을 안고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 관계의 깨어짐을 싸매주시는 치유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심 (4절 상)
하나님은 다윗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사울의 위협, 블레셋 사람들의 위협, 심지어 자기 몸에서 난 아들인 압살롬의 위협 등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건져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하는 곤경을 당하였으나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푸시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여기까지 온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건져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금년에 미국에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 변화와 관세 인상으로 인해 물가가 오르다 보니 많은 분, 특히 서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회에 위협이 된다는 명목으로 불법 이민자들을 체포하고 송환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피해자들이 많아지고 있어 합법적인 이민자들까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어려워진 상황, 영적 침체, 사고의 위험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생명싸개 속에 품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이 크고 놀라운 은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심 (4절 하)
하나님은 시인을 죽음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마치 왕에게 왕관을 씌우듯이 당신의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인자와 긍휼’은 이 시편의 주제어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음의 위협에서 건져내시고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인자로 관을 씌우신다’는 의미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면류관이요, 상급을 주시는 것을 말하지만 현재의 모든 상황에서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왕의 신분으로 높여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우리를 끈질기게 붙드시며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와 지위를 보장해 주십니다. 이 은혜를 인해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 좋은 것으로 만족케하심 (5절 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택은 죄 사함과 모든 질병을 치유하심과 영혼을 구원하심에 그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구하고 바라는 소원마다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의 욕구대로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소원은 육신의 소원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배려를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좋은 천지만물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응답이자 만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능력
그동안 살아오면서 죄 사함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건짐을 받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움 받고, 좋은 것으로 그의 소원의 만족함을 경험한 다윗은 자신을 독수리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비슷한 표현이 이사야 40:31에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독수리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유일한 새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믿음의 상징입니다. ‘앙망’이란 소망 가운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에게는 새로운 힘이 주어집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은 소진된 기력을 더 나은 힘으로 교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힘을 얻은 자는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고, 달음박질하거나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모든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새 힘을 충전 받아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갖는 열정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삶에 고난과 낙심이 찾아올지라도 불평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삶을 친히 돌보시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삶의 왕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강건케 해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이 아무리 험난해도 결코 위축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인생의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뛰어넘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같이 강하고 담대하게 변화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올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는 청춘의 강건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다윗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 민족의 차원을 넘어 우주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그 풍성할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하는데 동참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이 풍성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 되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씻기십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드릴 이유가 됩니다. 질그릇과 같은 보잘것없는 우리를 은혜가운데 부르셔서 복음의 보배를 안겨주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오직 우리 주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지속적이고도 활발한 관계를 가질 때 우리는 날마다 주안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시편 103편은 과거를 미화하는 노래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함으로 미래를 살아갈 동력을 얻는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다섯 가지 은택은 죄 사함, 병 고침, 생명 구속, 인자와 긍휼의 관,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심입니다. 금년에 이들 중에 어떤 것을 가장 크게 경험하셨습니까? 어떤 것이 지금 내게 임하기를 간절히 구합니까? 2025년의 마침표는 후회가 아니라 ‘송축’이어야 합니다. 고난과 기쁨 속에서 베푸신 구체적인 은혜를 기억하며, 2026년 새해를 소망으로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