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님 탄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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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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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 1:18~25

성탄의 가장 큰 신비는 '동정녀 탄생'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동정녀 탄생을 믿으십니까? 조사 대상과 방법에 따라 수치가 조금씩 다르게 나오기는 하지만 미국 전체 성인의 70% 이상이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다고 합니다. 천사를 통해 자기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하며 혼란과 두려움을 보였으나 천사의 말을 들으면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의심하고 갈등했기에 조용히 파혼하려 했으나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체면이나 상식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의 시선은 거부와 불신의 분위기였습니다. 훗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요 8:41)고 하면서 예수님의 출생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조롱하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반응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정녀 탄생을 과학적 잣대로 재어보며 의심하거나 단순히 상징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기사가 누가복음에도 나오지만, 누가복음은 마리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가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이 요셉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면서도 성탄절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적게 받는 편입니다.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 외에는 복음서에서 그의 생애에 대하여 별로 언급이 없고 요셉이 한 말이 한 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배경과 그 이름에 담긴 구원 계획을 보여 줍니다. 성탄의 의미를 각자의 삶에 적용하면서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기 원합니다.

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정리하며, 그분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족보는 세 시기로 나누어지며,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그리스도까지 계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 계획하고 약속하신 구원 역사의 절정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온, 다윗 왕위를 이을 정당한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갈등을 넘어선 요셉의 의로움 (18~19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라는 표현을 통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해 언급합니다. ‘나심’은 헬라어로 genesis, 즉 ‘출생’, ‘족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1절에서는 ‘족보’로 번역됩니다. 마태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17절까지 서술한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마무리됨을 강조합니다. 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과정은 자칫하면 스캔들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약혼은 지금보다 더 강한 법적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일단 약혼을 하면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지만, 서로를 아내와 남편으로 간주했습니다. 약혼 중에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과부로 여겨졌고, 파혼을 하려면 파혼 장을 줘야 했습니다. 약혼 상태는 보통 1년간 지속되었고, 그 기간에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간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를 데려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그 소식을 한 줄로 적고 있습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잉태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알 리가 없는 요셉은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녀와 함께 미래에 꾸밀 가정에 대한 단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비록 목수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대인 관계에도 덕을 세웁니다. 요셉은 분노하거나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정혼한 아내의 임신한 소문을 내거나 법정에 가져감으로 마리아에게 부끄러움을 주거나 떠벌려서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혼한 후에 헤어지는 방법은 파혼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이혼 절차는 간단했습니다.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이혼 증서를 주고 여자를 보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조용히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요셉을 ‘의롭다’고 평가합니다. 참된 ‘의’는 하나님의 ‘헤쎄드’를 반영하는 사랑과 덕을 나타내는 자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정의와 사랑을 겸비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해결하려 하는 데에서 요셉의 사랑이 돋보입니다. 그가 만일 율법에 따라 죄를 드러낸다면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끊고자 하여”라는 말에 요셉의 정의가 드러납니다. 그는 율법을 무시한 채 마리아의 허물을 그대로 덮어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그릇임을 아셨기에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죄의 사슬을 끊는 구원의 선포 (20-21절)
고민하다가 지쳐서 잠들어 버린 경험을 한두 번쯤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요셉도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주의 사자는 messenger, 즉 메시지를 전달하는 심부름꾼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보라”(behold)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극적 반전을 꾀할 때 사용합니다. ‘요셉이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압니까? 보시오.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꿈을 계시 수단으로 사용하실 경우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주로 예수님에게 사용되는데, 본문에서는 요셉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낳게 될 예수님이 족보상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게 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윗 왕조는 이미 멸망해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 왕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고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이기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마리아를 너의 아내로 취하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음행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해명으로 인하여 마리아의 수치가 벗겨지고, 요셉의 의심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한 또 다른 명령은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그 이름에는 부모의 소망과 기도가 담깁니다. 본문에는 아이 이름에 관한 언급이 세 번 반복됩니다(21,23,25). 이는 아버지 요셉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그의 아들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확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21절 하반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예수’이어야 하는 이유와 그가 어떤 사역을 감당할지 설명합니다.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임을 마태복음 첫 부분에서부터 밝힙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명은 1세기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가졌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크게 두 줄기가 있습니다: 왕 되신 메시아와 고난 받는 메시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이방의 압제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고 다윗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재건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백성’의 헬라어 인 ‘라오스’는 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28:18-20에서‘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는 모든 민족으로 그 범위를 넓힙니다. 따라서 주의 사자가 말하는 ‘백성’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어떻게 죄에서 구원하십니까? 마 20:28에 의하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임마누엘: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약속 (22~23절)
마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예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임을 밝히고자 이사야 7:14과 연결시킵니다. 이사야 7장은 주전 735년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해 유다를 공격했던 상황을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에 관해서 한 징조를 주셨습니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 징조는 한 역사적 인물의 탄생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구원자의 탄생도 아울러 계시합니다. 본래 이사야 7:14에 사용된 ‘알마’는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70인역에서 처녀’를 의미하는 ‘파르쎄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근거를 70인역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연관됩니까?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에서 ‘그들’은 21절에서 말한 ‘자기 백성’으로,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모든 인생의 문제를 몸소 경험하셨고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에 담긴 구체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까지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임마누엘은 마태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마태복음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입니다.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류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나,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이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인지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기에 20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게 되면 구원의 효력이 발생하여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즉각적인 순종 (24~25절)
요셉은 마리아와 어떻게 헤어질까를 고민하였지만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달랐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에는 방황하고 고민했으나 주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자 더 이상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물론 요셉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구속 드라마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주의 사자가 명령한 대로 순종했습니다. 첫째, 마리아를 그의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천사들과 대면한 이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확신한 요셉은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정식으로 요셉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라는 문장을 추가로 기록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행동은 사려 깊음과 의로움을 나타낼 뿐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낳은 후에는 부부관계를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둘째,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예수’로 지었습니다. 이로써 요셉 자신이 예수님의 아버지 됨과 동시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확증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으로 끝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말씀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종할 때 기뻐하시며 우리의 순종을 통해 말씀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경건한 요셉의 역할이 필요했듯이 오늘도 요셉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이해와 감정을 초월하여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순종하고 봉사하고 절제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자세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을 맞이해야 할까요? 말씀을 정리하며 두 가지를 결단하기 원합니다.
- 임마누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가리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증언했습니다. 임마누엘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며 신앙의 핵심 고백입니다. 신앙은 광야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에녹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히 11:5). 노아는 타락한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방주를 준비했습니다(창 6:9).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수 1:5). 바울은 감옥에서 언제나 곁에 계신 주님, 언제나 힘을 주시는 주님, 언제나 고난에서 건지시는 주님을 묵상했을 때 (딤후 4:17~18)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임마누엘의 확신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그분을 의식하며 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동행이 됩니다.
-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셉은 약혼녀의 임신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요셉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듯이 우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이해와 감정을 초월하여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순종하고 봉사하고 절제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나가면서
성탄의 의미가 점차로 퇴색되고 세속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는 때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성탄절이 존재하는 유일한 근거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에 관해 하나님은 ‘내 백성이 나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호 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이며, 구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필요를 이해하시고 함께 나누시고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에 마리아와 요셉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와 그 마리아를 데려오기로 결심한 요셉처럼, 때로는 고난과 오해와 수치와 모욕까지도 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고,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더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처럼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을 품고, 임마누엘 주님과 동행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팔로마한인교회의 모든 가정과 사업과 사역 위에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줄 믿습니다. 이 거룩한 성탄의 계절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