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Author
Date
2025-12-14 14:16
Views
51
성경구절 : 빌 4:1~7


누구나 만사형통을 원하지만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건강, 가정, 사업, 신앙 등과 관련된 문제로 고민합니다.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아 사람들과 만남을 꺼리는 분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 하여 교회를 등지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분도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마음에 상처받은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병 낫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고난이 삶의 일부인지라 믿는 사람들이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제2차 선교여행 중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복음화 하려 하였으나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드로아에서는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바울 일행은 지체하지 않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의 수도인 빌립보에 들렀습니다. 바울이 전도를 하다가 점을 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을 때 그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주인들은 여종을 통하여 돈을 벌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진 것을 인하여 분노하며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관원들은 로마 사람인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로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많이 맞은 후에 간수는 그들을 깊은 감방에 던지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습니다.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주었다고 칭찬을 듣기는커녕 도리어 매를 맞았으니 얼마나 억울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밤에 기도하며 지난날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는 일에 앞장섰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하게 된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깨달아지며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바울은 기쁨이 충만하여 실라와 더불어 찬송을 불렀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대림절을 맞이하여 세 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이 촛불은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쁨’을 주제로 빌립보서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복음’이라고 할 만큼 기쁨의 분위기로 가득 찬 서신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복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곳에서 자기를 지키는 시위대 병사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여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동안에 바울을 경쟁상대로 여기는 일부 신자들이 시기심으로 열심히 전도하였을 때 바울은 분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면서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고 했습니다. 2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2:2)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3장에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3:8)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언제 끌려 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감옥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원망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옥 밖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며,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체험하는 기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에도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역경에서 좀처럼 벗어날 길이 없는 것 같아 절망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하였든지 상관없이 문제는 생깁니다. 다만 믿음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문제를 대하는 반응에서 나타납니다. 문제에 사로잡히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잊고 불안해하고 기쁨을 잃게 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연말의 분주함, 경제적인 어려움, 관계의 갈등, 건강의 문제 등에 시달리다 보니 ‘기뻐하라’는 말씀이 공허하게 들리지는 않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그 기쁨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기쁨을 잃게 된 배경(1~3절)
공동체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게 되고 서로 다투기까지 합니다. 교인들끼리 사이가 좋을 때 흉허물 없이 지내다보니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둘 사이에 틈이 생기면 알고 있던 상대방의 허물이나 약점을 떠벌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끼리의 갈등이 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왜 갈등이 생깁니까? 상대방이 자기 생각대로 해주기를 너무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잣대에서 상대방을 자꾸 재어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 유럽에 와서 최초로 개척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바울을 도와 주의 일에 함께 수고한 빌립보 교인들, 나중에 주 앞에 섰을 때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도록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지방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밖으로 드러나는 생활을 별로 하지 않고 언제나 남자들에게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니아 지방의 여자들은 오늘날의 맹렬 여성들과 같이 모든 면에 적극적이고 리더십도 있고 공직생활도 하였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하면서 바울은 그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요, 한 때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그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였고, 서로의 자존심을 내세우다 보니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이 길어지다 보니 교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교인들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다 보니 갈등이 깊어지고 교회는 기쁨을 잃었습니다. ‘좋은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유오디아와 ‘행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순두게가 서로 다투니 교회 안에 악취가 나고 행운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쓰면서 너희에게 갈등이 있으니 당장 그치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의견의 일치를 보라 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온전히 하나 됨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겸손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주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전처럼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애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부르는 익명의 사람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다른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의 이름들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전과 같이 하나가 되어 사역에 힘쓰기를 원하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쁨의 근원: 주님과의 관계(4절)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기도와 말씀과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자라고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은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주님의 겸손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러 오신 주님의 섬김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고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4장에서 다툼으로 인하여 기쁨을 잃어버린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 주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거나 인정할 때 그에게 약간의 허물이 있어도 별로 문제 삼지 않고 같이 있기만 해도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하나하나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갈라디아 5:22에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언급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니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열매 중에 희락, 즉 기쁨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기뻐하지 못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움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사랑이 식어졌는지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사는 자는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이 있었기에 바울은 감옥에 던져져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행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 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좀 풀리면 기뻐하고 그렇지 못하면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어떠한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로 인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에 유다 왕국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습니다. 나라 안에는 불의와 불법이 여전히 횡행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장차 유다에게 임할 환난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지 않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으며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나지 않고 밭에서 농작물이 나지 않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 되시므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합 3:17~18). 무화과, 포도, 감람나무, 곡식 등 농작물이 열리지 않고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들이 모조리 약탈을 하여 남는 것이 없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삶도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을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음을 하박국은 보여주었습니다. 진정한 기쁨의 근원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바울은 ‘기뻐하라’를 반복하며 기뻐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상황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라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비록 광야 같은 삶을 살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광야에 길을 내고 오시는 분임을 알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그분이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적극적으로 기뻐할 이유를 찾으며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의 이유: 주께서 가까우심(5절)
바울은 성도들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관용을 보일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여기서‘알게 하라’로 번역된 단어는 수동태 명령형으로 ‘알려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용납하기 싫어도 자신을 위하여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자기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자꾸 판단하는 하려는 사람을 보면 그와 그의 가정 혹은 그의 삶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사과를 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존심이나 고집 때문에 기회를 놓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집니다. 관용이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이며 부드럽고 점잖은 성품이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는 합법적으로 권리를 가졌으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권면을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고백과 연결시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까? 만남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설렘이 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분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두려움은 환희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 해결자이신 주님이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울이 옥에 갇혀있었고, 초대교회도 박해 당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은 “마라나타”라는 인사를 나눴는데, ‘주님, 어서 오소서’라는 의미이지만,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날이 곧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가 나서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어차피 이길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 싸움을 걸어오는 이들이 오히려 안쓰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우들 간에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갈등이 있으면 누가 옳으냐 보다는 누구 편을 들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동하기보다 이해관계나 인정에 이끌리어 갈등에 휘말립니다.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한쪽 이야기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하는 실수를 합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어지고 활기를 잃게 됩니다. 가정이나 직장 생활도 잘 풀리지 않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헤매기 때문이요 일단 먹이를 발견하면 좀처럼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인간은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씩씩댑니까? 그런 모습은 현재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지 못한 증거가 됩니다. 금년이 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남을 축복하되 선을 행하는 자에게 뿐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기에 그런 마음을 달라고 엎드려야 합니다.

기쁨을 유지하는 비결: 기도와 감사(6~7절)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염려가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감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염려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불필요함입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없다’(마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유해함입니다. ‘염려’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은 ‘나눔’, ‘분열됨’입니다. 염려는 마음을 나뉘게 하고 분열시킵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해칩니다. 세 번째는 ‘전염성’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해를 끼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을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밤새 통곡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염려는 하나도 이로운 것이 없습니다. 염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정도를 반영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골리앗만 나오면 이스라엘의 군대는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힘도 세고 전쟁의 경험이 많은 골리앗을 앞에 두고도 염려하기는커녕 도리어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며 달려가 골리앗을 거꾸러뜨렸습니다. 성도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염려하지만, 신자는 기도합니다. 불신자는 생존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추구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불신자의 삶은 생존에 대한 염려가 주도하지만, 신자는 생존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소명을 위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살핌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

바울은 염려 대신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기도, 간구, 구하는 것 등 비슷한 단어를 세 번이나 나열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자기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성도들에게 있어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선의 방책입니다. 기도하되 또한 감사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자기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도록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가까우시다’라는 종말적인 고백에 기초해 고난과 불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와 믿음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즉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넘어서서 넘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지킨다’는 단어는 군사 용어로 군인들이 도시를 경계하며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와 같이 주님께서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나가면서
빌립보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주제가 ‘기쁨’입니다. 본문 역시 기쁨을 강조합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믿는 자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면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화해하고 손을 마주 잡을 때에야 비로소 주 안에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텐데, 그것을 참지 못해 다투고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매 순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관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뻐하고 관용하며 살고자 하더라도 세상에는 염려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우리에게 염려할 만한 일이 생겨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그것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염려할 일을 감사함으로 아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적으로 그렇게 할 때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 시기에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같은 마음을 품어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 주님과 신실한 관계를 가지고 형제자매들과 사랑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인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불안해하면 교감신경이 주로 움직여 심장에 부담을 주고 몸이 약해진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뻐하고 봉사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부교감 신경이 활발하게 움직여 심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서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이 귀한 성탄의 계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면서 심신이 강건해지고 영적으로도 기쁨과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