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깨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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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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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 28:36~51


새벽기도를 몇 십 년 동안 했고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려면 알람이 울려야 일어납니다. 전에는 알람 기능이 있는 라디오를 사용했지만 요즘은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가끔씩 알람 setting을 하지 않아 새벽기도 시간에 지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급하게 교회에 오면 교우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도착’이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됐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이 단어가 황제가 로마 제국의 광활한 영토내의 도시에 행차할 때 쓰였습니다. 대림절의 ‘待’자는 ‘기다릴 대’이고 ‘臨’는 ‘임할 임’이므로, 문자적으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해 성탄절 전야까지가 대림절인데, 처음 오신 주님을 감사할 뿐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오셨다는 확신과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제대로 기다리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깨어 있음’이라는 주제가 노아의 역사적 사건(36~42절), 집주인과 도둑의 비유(43~44절),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45~51절)에서 반복됩니다. 오늘 불을 켠 첫 번째 초는 기다림과 소망을 상징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삶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할지라도 기쁨으로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상치 않은 때 오실 예수님(37~44절)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아무도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재림 하실 때에도 전혀 예상치 않은 때에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맞이할 준비된 자들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찾지도 않았는데,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오십니다. 그분의 오심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이 가까이 왔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모순으로 들리는 이 말씀은 종말의 때에 관해 질문했던 제자들에게 혼란과 긴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자가 다시 오실 정확한 시기는 제자들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아들도 모르고.”예수님 지식의 제한이 언급된 유일한 구절입니다. 이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신적인 속성을 제한하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야 성육신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마 28:18, 요 17:1~5).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예수님도 모르시는 일을 아는 척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 not yet)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언제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초조감과 그때를 기다려야 하는 인내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결국 말세에 예수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지만 동시에 언제 오실지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관심이 “그날과 그때”가 아니라 ‘어떻게’그날을 맞을 것인가에 두라고 명하십니다. 세 개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 말세의 특징은 ‘깨닫지 못함’입니다.
- 노아의 때 비유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인자가 임할 때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아 당시 상황을 비유로 드셨습니다. 비유의 초점은 노아 당대 사람들의 준비되지 못한 모습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홍수의 때를 정확히 예측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에 항상 준비된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는 당시 사람들의 상황을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방탕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에게만 주는 경고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니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결혼하지도 말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결혼함은 가정을 세우며 아기를 낳아 미래를 꿈꾸며 번성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상에 빠져 있어서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기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자의 재림을 앞둔 지금의 세대도 노아 세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상사에 파묻혀 시대의 징조를 보지 못하는 것이 이 시대의 불행입니다. 현세적인 것에만 마음을 쏟으며 영적이고 주님의 재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불시에 임할 인자의 날에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 일하는 사람들 비유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일상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는 경우와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 경우는 평범한 일상을 보여 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이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의 마음과 태도에 따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데려가다’와 ‘버려두다’라는 동사는 수동태가 사용되었습니다. 곧 이것을 행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데려감’과 ‘버려둠’이라는 단어가 현제 시제인 것은 문맥상으로 볼 때 그 일이 미래에 일어날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갑작스럽고 예고 없이 이루어질 것임을 의도적으로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를 올바르게 삶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문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재림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자의 본분은 인자의 재림의 때를 아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는 ‘왜냐하면 내가 다시 올 때는 갑자기,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홍수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쳤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깨어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핵심 명령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보초와 같이 잠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날에 주님이 임하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라는 권고의 이유를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너희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우쳐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즉 다시 오실 분은 우리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러 모아 우리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 도둑 비유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은 도둑 비유를 통해 더 강조됩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는 ‘너희는 이것을 알라’라는 강한 명령입니다. 도둑이 예고 없이 와서 훔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을 명심하라는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도둑하면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불법으로 훔치거나 빼앗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도둑일까요? 요즘 한국에서는 마음에 든다는 말을 ‘착하다’로 표현합니다. 싸고 질이 좋은 물건을 파는 가게를 ‘착한 가게’라 합니다. 싸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을 ‘착한 식당’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생명을 주러 오시는 분이니 ‘착한 도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서 도둑같이 갑자기 오신다고 하시면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둑같이 임하셔서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가져가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인자가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준비해야 합니다. 학생이 시험을 보는 날짜와 장소와 시험범위를 정확히 잘 안다고 시험을 잘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의 징조를 관찰하고, 열심히 종말론 세미나를 참석하여 종말론 지식이 누구보다 많다할지라도 각 사람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나 시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과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신앙적인 도전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느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45~51절)
예수님은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를 수사의문문으로 시작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45). 여기서 종의 사명은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주인의 집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집 사람들을 때에 따라 먹여야 합니다.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은 주인이 없음에도 마치 주인이 있는 것 같이, 주인이 맡긴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그 종이 열심히 섬기고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맡길 것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의 사명을 잊고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등 방탕하게 생활합니다. ‘술친구들’은 ‘술 취한 자’, ‘술에 중독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마 평소에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주인이 오기 직전에 자기가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계획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와서 종의 악한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엄히 때리다’는 문자적으로 ‘둘로 쪼개다’라는 뜻입니다. 두렵고 가혹한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로, ‘찍어 쪼개다’, ‘산산조각 내다’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는 ‘악한 종들을 가려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제자 공동체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보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을 받는 이유는 종의 신분과 사명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종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종말의 심판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제자들이 형제들을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고통당할 자가 맛보게 될 깊은 후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형제를 섬기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면 종말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깨다’의 의미는 활동적이고 부지런하며 책임을 다하는 섬김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
평소 공부를 성실히 하는 학생은 시험을 언제 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경건하게 사는 성도에게 언제 주님이 재림하실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재림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재림의 날짜와 시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는 믿음과 그에 따른 준비입니다. ‘어떻게’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합니까?
-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를 보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절) 는 말씀은 천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고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고, 결단이 없는 신앙생활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 생활의 염려 등으로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절망감과 분노, 좌절과 한숨으로 사로잡혀 있지 않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기에 귀 담아 들어야 합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미래, 안위, 평안, 자아실현에만 매달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이라도 예수님이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6, 18). 성령이 충만할 때 성령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로 주님과 다이내믹한 교제를 가질 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그 말씀에 나의 삶을 비추어보고 시대의 흐름을 영적으로 분별하며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늘 재림하실 수 있다는 영적인 긴장 속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생이 시험을 보는 날짜와 장소와 시험범위를 아무리 정확히 잘 안다고 시험을 잘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범위 내용을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언제’재림이 있을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재림을 준비하느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삶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방탕과 영적인 무감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언제 오시든 상관없이 그날을 기다리며 주님이 맡기신 권세를 가지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상황 속에 적용하는 능력이라면, ‘충성’은 그 지혜가 삶으로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지혜와 충성’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충성은 말씀에 대한 정확하고 지혜로운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하며, 지혜는 반드시 충성스런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혜와 충성을 함께 나타내고 있는 종의 특징은 “주인에게 맡은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것입니다. ‘종’이 누가복음 12:42에는 ‘청지기’로 되어 있습니다. 청지기는 집을 맡은 자로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수하의 종들을 돌보고, 주인이 보지 않는 가운데서도 모든 일을 충성스럽게 이행합니다. 깨어 있는 종, 준비된 종은 복이 있습니다. 종이 받을 복은 주인의 인정과 더 큰 일을 맡는 것입니다. 특히 50절의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라는 중복적 표현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준비된 모습이란 재림의 때를 위하여 열심히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긴장하며 깨어있는 삶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몸을 주를 위하여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봉사, 친교, 구제, 전도에 부지런히 참여해야 합니다. 각자가 맺은 열매를 주님께 보여드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 구원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 것을 전제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28:19~20). 또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사단의 세력은 무너지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은 성도들을 모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신의 시간과 은사와 건강과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 공동체를 섬기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각자 주어진 위치와 영역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주님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더디 오실 것이라 생각하며 게으르고 안일한 자세로 방탕한 삶을 산다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엄하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하나님이 맡기신 영혼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잘 돌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님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말로만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가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맡겼는데 그 비유는 우리가 청지기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주어졌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재능이 주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자기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땅에 묻어 두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활용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이 땅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고 질책했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신 후 생명을 다해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재림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님이 오셔도 기다리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어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말세는 시작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성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이나 기근 같은 재앙이 일어나고 신앙의 핍박이 있게 될 때가 말세의 징조들입니다. 주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의 참 의미는, 어느 날에 주님이 임하실지 알지 못하지만 그날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주인이 맡기신 권세를 가지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잠자는 심령을 깨우는 영적 얼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깨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빛의 갑옷을 입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경건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대림절 4주 동안, 촛불을 하나씩 밝힐 때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소망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더라도 우리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태했던 우리의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대림절은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