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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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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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405년 전인 1620년 9월 6일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가로질러 3000마일을 항해하여 두 달 만에 보스턴 남쪽에 있는 플리머스에 102명이 도착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이 도착했던 그해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기에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며 46명이 죽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인디언들이 혹시라도 알게 되면 공격해 올까봐 한밤에 몰래 얼어붙은 땅을 힘들게 파며 사랑하는 가족들의 시체를 묻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그 겨울은 다시 생각하고도 싶지도 않을 만큼 시련의 계절이었고 떠나온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때도 있었겠지만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인디언들이 가르쳐 준대로 옥수수와 콩을 심고 다른 농작물도 심었습니다. 11월이 되어 곡식들을 수확하게 되자 들에 다니던 야생칠면조를 잡고 수확한 농작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인디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눈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864년 링컨 대통령은 11월 넷째 목요일을 Thanksgiving Day로 선포하면서 ‘우리의 경건한 조상들이 이 아메리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그 신앙을 자손만대에 이어주기 위하여 이날을 국가 기념일로 정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감사가 절로 나오고 하나님을 믿으니 모든 일이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아지거나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계획한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감사는 쑥 들어가고 걱정과 불평에 사로잡히고 기도해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같이 여겨집니다. 죄인 된 우리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참된 예배는 구원의 감격 속에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심령에 기쁨과 평강이 임합니다. 어느 달이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달이 없지만 특별히 11월을 감사의 달로 지킵니다. 그중에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시는 스토리가 나옵니다. 이번에도 사마리아인의 믿음이 주목받습니다. 감사를 동반한 믿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인 것을 보여줍니다. 온전한 감사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더 풍성한 감사의 열매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짖는 나병환자들(11~14절)
9:51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는 표현은 북에서 남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 두 지방 사이의 경계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즉 요단 강 동편을 향해 이스르엘 골짜기를 따라 이동했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오늘날의 에이즈와 같이 나병은 예수님 당시에 가장 무서운 병으로 알려졌습니다. 육신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부정하다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인 유다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사회와 격리되어 다른 나병환자들과 함께 바위굴 안에서 집단으로 모여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으로 인하여 눈썹이 빠지고 피부가 짓무르고 몰골이 흉악하게 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정결 규례 상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돌팔매질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멀리 서서”가 그들의 실상을 나타냅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 마을을 지나가면 다시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시선을 끌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들을 고쳐줄 수 없다는 절망감, 관계 단절로 인한 소외감,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서러움들이 복받쳐 그들은 필사적으로 외쳤을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의 간절한 합창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스승의 뜻을 가진 ‘랍비’가 아니라 ‘주인,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합니다.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에게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약했거나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에 이 호칭으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낫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외칠 때,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나병환자로서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똑같이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기에 그들은 함께 어울려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주변의 무리에게는 나병환자들의 외침이 그저 소음으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은 다른 사람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외쳤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나오는 자들을 물리치는 법이 없고,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은총을 베풀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라’는 과거 명령형이니 지금 당장 보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치유 여부를 판단 받아야 했습니다(레 14:2). 그런데 아직 낫지도 않은 상태로 제사장에게 가는 것은 무의미하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가다가 자기들의 몸에 변화가 나타남을 느꼈습니다. 빠졌던 눈썹이 다시 났을 것입니다. 문드러진 부분도 정상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 문둥병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사마리아인(15~16절)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는 다급하게 주님을 찾고 기도에 힘쓰다가 그 일이 해결되면 운이 좋아서 잘된 줄 알고 주님께 대한 감사를 곧잘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쉬울 때는 남의 도움을 열심히 구하다가 제 스스로 일어설 때쯤 되면 자기가 잘 했기 때문에 된 것으로 생각하고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스토리의 초점은 치유 자체보다 치유 받은 자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열 사람 모두 놀라운 치유를 맛보았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렸습니다. ‘돌아오다’는 진행하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단지 물리적인 움직임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바꾸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큰 소리로”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 미갈이 그를 업신여겼다가 자식이 없이 죽은 저주를 받았습니다(삼하 6:16~23).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가식이 없이 자기들이 경험한 사랑을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감사했습니다. ‘엎드린다’는 ‘경배한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외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감사하다’가 현재분사로 사용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발에 얼굴을 갖다 대고 지속적으로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감사를 표현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입술로만 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라는 설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은 독자에게 깜짝 놀랄 만한 역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처럼 취급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 주인공으로 드러났습니다.
믿음으로 칭찬 받는 사마리아인(17~19절)
사마리아인의 경배와 감사를 받으신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명 모두가 깨끗함 받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한 명만 돌아온 사실을 의아하게 여기시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연이어 던지시는 세 개의 질문은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표현하는 수사적 의문문들입니다.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을 만나거나 그 동안 하지 못하던 것을 하겠다는 소망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주셨다는 사실보다는 지금 자기들이 나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께로 돌아가려는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멸시를 했을지 모릅니다. 이방인 주제에 잘난 체 한다고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먼저 돌아가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께 감사를 하고 나서 제사장에게 가도 늦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에게 감사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들은 누구 들으라고 하신 겁니까? 함께 한 제자들이나 무리였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신 일에 공치사를 듣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구원’과 ‘깨끗함을 받음’이 별개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머지 아홉은 나병 치유의 은혜를 입었지만,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는 못했습니다. ‘구원하였다’는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사마리아인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인이 구원받은 시점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 때였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해주셨습니다. 감사는 육신의 치유를 넘어 영혼의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감사는 이 땅에서 하늘을 살아간다는 증표와 다름없습니다. 주님은 감사하는 이들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아 왔습니다. 더구나 나병에 걸렸기에 동족 사마리아인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는 등 이중으로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육신의 질병 치유뿐 아니라 영혼 구원 문제까지 해결을 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선언이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2번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4번이나 나옵니다. 먼저 여인들에게 하셨고(7:50, 8:48), 본문에서는 사마리아인에게 하셨고, 18:42에서는 맹인 바디매오에게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이 더해질수록 감사와 영광은 더 넘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20~21절)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 이미 그들의 눈앞에 임한 것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는 방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볼 수 있게’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행동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헛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에만 속한 것이 아니고, 경험을 통해 관찰되거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 나라를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영적이고 내적인 나라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병환자 치유 사건과 연결해서 이 말씀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15, 18절)의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께 사마리아인과 같이 ‘감사하는 자’(16절)의 마음에 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참된 예배자도, 감사하는 자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구약 성경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한 이방인의 마음에 임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돌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가던 열 명의 나병환자가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순종이 치유를 가져왔지만, 치유는 감사를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에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아홉 사람도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감사를 뒤로 미루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감사의 마음이 식어 버려서 형식적인 감사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일이 생기면 즉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가서 직접 감사를 드렸던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사마리아인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받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셨을까요? 감사는 전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은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교회는 시험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부터 행복하게 만드는 유익이 있습니다. 사탄도 감사가 넘치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감히 건드리지 못합니다. 비록 절망적이거나 고통스런 환경에 있더라도, 비록 얻은 소출과 결실이 보잘것없이 보이더라도 주님께서 오늘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능력과 힘을 공급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주변 이웃들과 가족들이 보여 주는 작은 배려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특이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가 그를 구원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토록 큽니다. 믿음이 감사를 낳게 한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적 한계와 장애를 넘어서거나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는 행위를 동반하는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믿음을 보인 사마리아인에게 병 고침과 더불어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적극적으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위기는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여부에 따라 삶에서 얻는 복이 다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가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자신의 영을 보내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사랑하는 자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지금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다이내믹한 교제를 가져야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믿음으로 붙들며 범사에 감사하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신 나병환자 열 명 가운데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육신의 회복뿐 아니라 구원의 문까지 열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아홉’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자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이 돌아와서 감사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척도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만이 갖는 놀라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환경과 상황을 초월해 감사할 수 없는 때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거기에만 집중해 있으면 도리어 무력감에 빠지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인이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근원은 믿음이요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뿌릴 때 감사의 열매들이 더욱 풍성히 열리게 됩니다. 감사를 자꾸 하게 되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건강에도 좋습니다.
추수감사절의 본질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봉헌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베푸신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으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감사절에 특별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베푸신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으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 부부, 형제자매, 자녀들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목회자들이나 목자와 사역부장들, 경배팀으로 수고한 교우들, 기도회에 참석한 교우들, 친교 준비에 수고한 교우들, 그 외에도 다양한 사역에 수고한 분들에게 직접 감사의 말을 전하거나 카톡이나 메신저 등을 통해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삶의 열매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한 해를 결산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우리의 소산의 맏물을 주님께 기꺼이 드려야 합니다. 주신 복을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며 나누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