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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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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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 성경 전체를 흐르는 가장 핵심단어가 무엇입니까? 그 역시 사랑입니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 555번 나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시려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가 담당해야할 죄의 삯을 그에게 대신 담당케 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사랑하느냐”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회복시켜 초대 교회의 귀한 리더로 삼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을 회심시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붙드시고, 베드로와 바울을 붙드신 하나님은 그 끈질긴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까? 그 사랑이 날로 깊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그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어떻게 표현하기 원하십니까? 율법교사의 질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르다와 마리아 스토리는 얼핏 보면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영생’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바로 알고 실천함으로써 영생을 누리고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역질문(25~28절)
70명의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다녀온 후 자신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로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에 대해 기뻐하심을 넘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짐을 성령의 감동 가운데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10: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7:22). 여기에 귀신들이 축출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 나라 선포와 각종 기적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도 눈으로 보기를 원했던 구원 약속의 성취임을 밝히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달갑지 않게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일어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서기관으로도 불리며 처음에는 율법을 필사하는 일을 하였는데 점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랍비로도 불리고,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율법을 해석하여 다시 세칙을 만들고, 이것을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얻다’로 번역된 단어는 ‘상속받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가나안 땅이(민 26:55) 각 가족에 속하여 상속되었습니다. 이 재산의 소유권은 계속 유지되어야 했고 이전할 수 없었습니다(레 25:23). 그러므로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표현은 영생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훗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영생’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악한 시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끝이 나고, 메시아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새 시대’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은 곧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습니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방법입니다. 너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당당하게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근거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개역개정은 전치사구를 동사처럼 ‘다하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동사는 ‘사랑하라’입니다. 이 구문을 직역하면 ‘너의 모든 마음으로, 그리고 너의 모든 생명으로, 그리고 너의 모든 힘으로, 그리고 너의 모든 뜻으로’입니다. ‘모든’은 어떤 한 조각이나 한 부분도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우상이나 물질에 마음을 조금도 빼앗기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은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목숨’은 ‘감정, 욕망’을 포함하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생명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힘’은‘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킵니다. 온 힘을 다해 봉사하며 재능과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뜻’이라는 단어는 신명기 6:5에 없는데 새롭게 첨가된 것으로, ‘이해력, 통찰력’등을 가리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갖고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전인격적이어야함을 나타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런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바울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2) 하면서 삶 전체로 하나님께 헌신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이 우리의 가정이나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레위기 19:18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언약 공동체 소속인 형제들로 국한됩니다. 레위기 19:33-34에는 이웃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이웃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온전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셨지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부자 청년의 질문에도 그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18:18~23). 영생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는 말씀도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이미 얻은 제자로서 마땅히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9~37절)
율법교사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고자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그의 말에는 어떤 사람은 내 이웃이고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이 아니라는 구분이 전제가 되어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주에서 사마리아인과 함께 이방인이나 세리와 창녀, 죄인을 제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범위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신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두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17마일쯤 떨어진 동네로,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많이 거주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 여리고는 해저 258m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지형도 험하고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였으므로 혼자 여행하는 것이 매우 위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두드려 맞고, 가지고 있던 것은 다 털리고 길가에 버려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아마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의 땅에서 유대인 강도에게 당한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사람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지나갔는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았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유대인들은 당연히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good guy들이니까 부상당한 여행자를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의 계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동족 형제가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는 데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다’를 직역하면 ‘길 다른 편으로 가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에게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는데, 이는 제의적 정결을 더 염두에 둔 행위였을 것입니다. 레위기 22:4~7절에 의하면 제사장이 시체와 접촉했다면 물로 씻고 해질 때까지 성물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사랑이 정결 규례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정결법 위반이 아니었기에 이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여행 중인 사마리아인이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다가 신음하던 그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33~34절에 보면 사마리아인이 취한 행동이 7개의 동사로 표현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고, 붓고, 싸매고, 태우고, 데리고 가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타고 가던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을 밤새 보살피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날이 밝자 자기 길을 가기 전에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그를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을 돌보다가 혹시라도 돈이 더 들면 나중에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비유는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하던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가 있고, ‘나’를 기준으로 세상이 돌아가며, 판단의 기준과 근거가 ‘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사람이 중심이고 ‘나’는 거기에 올바르게 반응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이 위독한 이웃을 보고서도 자기를 합리화하며 감수해야 할 돈, 시간, 그리고 체면 때문에 의도적으로 외면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결코 좋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유대인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는 알지만 차마 그 입으로 사마리아인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둘러서 대답했습니다. 그는 아마 얼굴이 발개졌을지 모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초점은 강도를 만난 자에게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이었습니다.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38~42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웃 사랑에 대한 것이라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소개합니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라는 묘사는 이때 예수님과 마르다가 초면임을 의미합니다. 마르다가 살던 마을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단지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 갈 때에 마르다를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 집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 따라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녀의 집에 여동생 마리아만 언급된 것으로 보아 배우자나 다른 가족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집에 오신 예수님을 잘 대접하겠다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기에 도와줄 마리아를 찾았는데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주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은 복종의 태도이며, 제자가 스승 앞에서 갖추는 자세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를 직역하면 ‘그녀에게 나를 돕도록 말하세요’입니다. ‘말하다’가 과거 명령형이니까 지금 당장 말하라는 명령입니다. 당돌한 마르다의 항변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나’를 세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두 번씩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로 하여금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타이르셨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잘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재촉하고, 결국 일을 위해 관계를 희생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범했습니다. 물론 본문이 성도들의 수고와 봉사를 폄하하는 의도를 가진 말씀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 예배드리고 나서 친교는 각자 알아서 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하나만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마르다가 준비하는 ‘많은 것’과 대조되므로 한 가지 음식만 대접받아도 된다고 하시며 당신을 위한 식사 준비를 최소화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일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여기며 그 관계 안에 거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봉사하는 열정적 섬김이 자칫하면 주님에 대한 관심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최우선의 임무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신 말씀의 식탁에 앉아 먹는 것은 그분을 다른 방법으로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는 것은 그냥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영생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신자는 영생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됩니다.
-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강도를 만날 위험도, 경제적 손실도 감수했습니다. 긴급한 도움뿐만 아니라 충분히 회복하도록 추가 비용까지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웃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이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그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이 없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들입니다. 가깝게는 자기 가족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우리의 이익의 대상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지체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지금 주위에 있는 이웃을 위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금년이 다가기 전에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찾아 그를 섬기며 그의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려면 그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삶을 살려면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루에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고 있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서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우리 모두 영생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참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유대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슈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시각을 뛰어넘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를 넓히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가 이웃의 범위를 정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을 이웃으로 여겼지만 신명기 16:11에 의하면 주위에 살고 있는 노비, 나그네, 고아, 과부와 같이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웃의 범주에 넣고 있습니다. 지금 같으면 비기독교인, 타종교인, 타국인, 심지어 원수들까지 이웃의 범위에 포함됩니다. 우리를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유월절 전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시작되었고 장차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시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신자에게 중요한 세 개의 중심은 거룩함과 사랑과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와 같이 버려진 우리를 싸매시고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만입이 있은들 다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영생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분에 걸맞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