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전도를 기뻐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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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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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0:1~24


‘고구마 전도왕’으로 잘 알려진 김기동 목사에 관한 글을 보았습니다. 고구마를 삶을 때 솥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러 보면 익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 한 마디만 던져 보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 믿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믿는다고 대답하면 잘 믿으시라고 축복하면 되고, 질문에 관심을 보이면 복음을 전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익지 않은 생고구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집은 불교입니다’‘우리 시댁은 제사 지냅니다’‘삶이 안정되면 믿을 겁니다’등의 이유를 둘러대면, 굳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너무 좋습니다’하는 말만 덧붙인다고 합니다. 그들과 논쟁하거나 설득하려고 애쓴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를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정말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자의 말에는 능력이 있기에 그 말에 찔림을 받은 생고구마 같은 사람은 만남의 횟수를 더해갈수록 익어가게 되고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젓가락으로 찌르기 전에 항상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이라 합니다. 누구든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서 훨씬 쉽게 대화할 수 때문입니다. 전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도를 하다가 거부를 당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까? 전도의 열매를 인해 기뻐한 적이 있습니까?

복음서 저자 중 유일하게 누가만이 12 제자 파송과 70 제자 파송 기사를 모두 보도합니다. 본문은 네 문단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문단(1~12절)은 70인의 파송에 관한 기사이고, 둘째 문단(13~16절)은 메시지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요, 셋째 문단(17~20절)은 70인의 사역보고와 주님의 충고이며, 넷째 문단(21~24절)은 주님 자신의 기쁨과 감격의 선언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듣기에 좋은 말, 쾌락, 허황된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상황을 인해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전도에 힘써서 거둔 열매를 인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70인 제자 파송(1~3절)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이 계속됩니다. ‘그 후에’란 문구는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에’라는 뜻으로, 9장에 기록된 사건과 교훈 이후의 시점을 말해 줍니다. ‘그 후’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되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신다’는 9:51과 관련시키면 예수님께서 그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후에도 변함없이 그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내다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을 중단하기는커녕 오히려 70인을 세우셔서 당신이 가시려는 마을로 앞서 보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을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만약 ‘그 후에’를 12제자 파송과 관련된 9:1~6과 관련시킨다면 하나님 나라 선포를 12제자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 즉 70인을 파송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숫자 󈦦’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그의 세 아들을 통해 온 세상에 퍼진 70종족(창 10장), 하나님이 모세의 짐을 덜어 주시기 위해 온 백성을 대표해 성령을 받게 한 70인 장로(민 11장), 가나안 7족속의 10배수, 그리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은 앞으로 세상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추수될 것을 예고합니다. 70명의 제자는 영적인 추수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추수꾼들과 그들을 통해 구원받을 백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제자들을 ‘둘씩 앞서’파송하셨습니다. 왜 둘씩이었습니까?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함이라는 측면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믿을만한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신 19:15). 이런 맥락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요한, 바나바와 사울, 바울과 실라가 동역한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1절의 ‘주’와 2절의 ‘주인’은 모두 그들을 파송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추수의 주인도, 추수할 일꾼을 세우시는 분도, 추수할 밭의 주인도 모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전도하는 일을 하나님 나라 백성을 모아들이는 추수에 비유하시며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라고 요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중석에 앉은 구경꾼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서야 합니다. 제자들이 마주치는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탐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전도자들을 환영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공격할 틈을 노립니다. 마치 양이 이리 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들은 늘 위험하고 조마조마한 일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위험에 대처하는 제자들의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0:16에 의하면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은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결함이 없는 지혜는 거짓이 되기 쉽고, 지혜가 없는 순결함은 악의 이용물이 되기 쉽습니다. 뱀은 자기가 당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들을 미리 감지하고 신속하게 피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둘기 같은 순결함은 세상의 탐욕과 자신의 야심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며, 거짓이 없는 정직한 성품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매사에 신중하고 사려 깊게 처신함으로 사탄의 간교한 음모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말씀의 순수함을 지켜 악한 세상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뛰어 넘을 때, 신자는 비로소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의 지침(4~9절)
예수님은 12제자 파송 시 규정했던(9:3) 가볍고 소박한 여행 준비(전대, 배낭, 신발 소지 금지)에 덧붙여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사 금지 명령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 그만큼 복음 증거의 사역이 긴급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전도자는 거리나 들판이 아니라 집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수행해야 할 전도의 방식은 먼저 한 집에 들어가서 평안의 인사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버려지지 않고 평안을 빈 사람에게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 집에 머물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일꾼에게 사례를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접하면 그것을 당당히 누리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최소한의 질서와 예의를 가지고,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집에 머물면서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치유와 선포는 서로 의존적인 것입니다. 병 고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는 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차려놓는 것을 먹으라’는 말씀은 이방 선교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정결 전통이 만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방인이 차린 음식을 먹으라는 의미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의 사명으로 연결됩니다. 여전히 추수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습니다. 현 상황에 맞는 현대적 복음 전도의 방식이 분명 있겠지만, 전도자들은 70 제자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배척하는 자들이 받는 심판(10~16절)
고라신과 벳새다에 화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뜻밖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입성을 거절했던 사마리아인의 마을에서 조용히 돌아가셨던 예수님이(9:52~56) 증인들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매섭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증인들을 거부한 것은 곧 그들이 전한 복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들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거절당한 자가 느끼는 인간적인 분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자에게 주어질 필연적인 결과에 대한 선언입니다. 복음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지만, 결과는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구약에서 ‘주의 날’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에게 자유과 기쁨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근거가 됩니다. 발에 묻는 먼지를 떨어 버리는 행위는 단절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도자 개인이 복음을 거부한 개인과 단절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도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로부터의 단절입니다. 바울은 이 ‘저버림’을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심’(롬 1:24,26,28)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하나님의 진노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쉽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동네’의 대표적인 예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드신 이유는 사역 과정에서 경험하셨던 반대와 거절 때문일 수도 있고, 이제 파송 받아 나아갈 제자들이 그 도시들에서 반대와 거절에 직면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70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심판 선언은 자신들이 맡은 직무의 엄중함을 일깨웠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위임받았다는 분명한 소명 의식과 자기정체성을 되새기게 했을 것입니다. 파송 받은 제자는 반대와 거절을 만났을 때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파송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70인의 사역 보고(17~20절)
전도 활동에 참가했던 70인은 예수님이 위임하신 권위를 가지고 매우 능력 있는 사역을 펼쳤다는 사실을 보고하며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열두 사도의 흥분된 보고의 열기(9:10) 못지않게 돌아온 70인의 보고의 열기가 감지됩니다. 처음 파송 받았을 때는 사역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돌아올 때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귀신들이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초자연적이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들이 둘씩 짝을 지어 나간 제자들 앞에서 물러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귀신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무기는 ‘주의 이름’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은 문맥상 축귀와 관련된 예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주의 이름’을 일종의 주문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고 있음을, 그리고 그분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함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귀신은 꿈쩍하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은 관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은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짐을 언급한 이사야 14:12과 사탄이 패배할 것을 언급한 요한복음 12:31, 계시록 12:7~10을 고려할 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짐은 사탄이 권세를 잃었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번개’는 갑작스러움을 표현하는 말이므로 사탄이 갑작스레 몰락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므로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짐을 보셨다는 것은 종말에 발생할 사탄의 패배를 예수님이 미리 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이미 권세를 잃었고, 계속되는 사탄의 활동은 최후 심판 전의 마지막 발악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응답은 사탄을 제어하는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므로 제자들은 안전하다는 약속입니다. 뱀과 전갈은 영적인 원수인 사탄의 능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이미지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을 향해 광야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을 언급한 신명기 8:15, 시편 91:13을 연상시키며, 동시에 하나님을 은신처로 삼는 자들에게 주어진 보호의 약속을 암시합니다(91:1). 사명자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시고 제자들도 회당과 공회에 끌려가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십자가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셨듯이, 박해의 날에도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담력을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응답은 참으로 기뻐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초자연적인 기적보다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더 놀라운 기적이니 그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키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의 본질도 일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것이 기쁨과 감사의 본질입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시는 예수님(21~24절)
예수님은 기쁨에 찬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말의 의미는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전율하셨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을 넘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짐을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하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문은 요한복음 17장에서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아버지-아들이라는 매우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 기도에는 ‘아버지’가 5번, ‘아들’이 3번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로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대화하며 아버지가 하신 일과 성품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들’이라는 호칭을 반복 사용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처리할 권한을 위임받은 합법적인 상속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초월적 존재인 사탄을 인지할 뿐 아니라 그를 제압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 가는 일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 즉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자격과 능력이 없어 보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맡겨졌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 가운데 실행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그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복된 자들입니다. 물론 그 복은 70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고 체험했던 복은 그들에 의해 돌아오게 될 수많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고 계시기에 우리의 삶에 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야 하며 주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해 가야합니다.

우리의 자세
전도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전도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몇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추수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복음 전도자요 추수할 일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준비된 일꾼에 비해 추수할 것이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를 바라보시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추수하는 일에는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의무가 제자들에게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준비된 일꾼들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사탄에게서 하나님 백성을 되찾아오는 영적 전투인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전도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연약한 마음을 담대하게 하시고, 지혜를 얻게 하십니다. 전도 대상자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전도의 첫 단추인 기도가 끼워질 때, 전도의 문은 더 활짝 열립니다.
- 평안을 빌어야 합니다
전도자들이 머물 집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평안’은 히브리어 ‘샬롬’에 해당하는 말로 유대인들이 나누는 인사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그 집의 잠자리에 누우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주시려 한 참 평안이 그 집에 가득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평안을 준다고 약속하지만 실제로 평안을 줄 능력은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물질, 건강, 성공 여부에 의해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안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전능자의 평안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확신함에서 오는 진정한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가진 자는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그 평안을 누리고 또한 선포해야 합니다.
-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70명의 전도자들은 그리스도께 권세를 위임받아 이스라엘의 각 마을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하나님의 대사였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들을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70명의 전도자들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욕심을 따라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하는 스승을 따른다고 합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허황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라고 했습니다. 때와 상관없이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죄악 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 그대로 끈기 있게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이 70인을 파송하신 가장 큰 이유는 제자 그룹의 적극적인 복음 전파 사역 참여를 통해 교회의 선교 사역에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70인 파송은 사도행전에서 언급되는 선교 사역에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향해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계속됩니다. 우리의 이름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사탄은 물러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는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날마다 살아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 기쁨을 날마다 누리며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여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