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제자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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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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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power game이 시작됩니다. 누가 더 고참이냐, 누가 더 실세냐 등을 따집니다. 건설적인 power game은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도를 넘어선 power game은 덕이 되지 못하고 피차 해를 끼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power game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는 욕구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power를 좇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기쁨과 풍요함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평생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가져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함을 인하여 그의 후손들은 죄인의 혈통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십자가를 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온통 십자가 생각밖에 없으신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욕심을 좇다가 실수를 반복하며 주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사실 우리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논쟁과 더불어 수난을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취할 태도를 소개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비추어보며 반성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참 제자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리다툼하는 제자들(46~48절)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면서도 그들이 품은 생각은 예수님의 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려 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닌 대가를 원한 것입니다. 이왕이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좋은 것, 큰 것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누가 크냐”하는 변론으로 나타났습니다. 논쟁을 벌이는 중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며 자랑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실 때 우리 셋만 특별히 데리고 갔어. 우리들은 주님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으스댔을 것입니다. 산 밑에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께 함께 가지 못한 것을 인하여 섭섭해 하며 올라간 세 제자들에 대하여 시기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야 너는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말렸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는 책망을 들었었지. 이에 베드로도 질세라 아홉 명이나 되면서 귀신 하나 쫓아내지 못한 것들이 무슨 할 말 있다고.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보이려면 자연히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를 들추어내기 마련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는데 마귀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함께 지내면서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네가 크니 내가 크니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 동안 감추어졌던 섭섭한 부분들이 드러나고, 할 이야기 못할 이야기 다 나왔을 것입니다. 논쟁을 벌일 때 제자들이 입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했겠습니까? 가시가 돋친 말을 했을 것입니다. 남을 밟아야 자기가 올라서기에 그동안 관찰한 상대방의 문제점이나 허물을 끄집어내며 흠집 내기에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이런 논쟁을 벌였는데 예수님이 안계셨다면 그들은 아마 멱살을 잡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논쟁을 하고 난후 제자들은 서로 씩씩 대면서 말로 상처를 준 다른 제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않으시고 묵묵히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장차 자신들이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있던 독특한 현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이런 키재기 논쟁이 크든 작든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에서도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지 신경전을 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 믿는 자들은 다 주님의 종인데 종들끼리 자리다툼을 하면서 power game을 벌이니 얼마나 자기 주제를 모르는 행동입니까? 예수님의 표현을 빈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는 말씀은 주님 보시기에 첫째가 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많은 사람들 중에 끝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첫째가 되고 마지막이 되는 것은 세상 나라의 원리이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다 같이 한 형제자매요 서로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1세기의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은 인간적 존엄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섬긴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에게나 해당되는 섬김이라는 말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섬기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목숨까지 바치는 섬김의 극치를 보여주신 주님. 주님이 인정하시는 큰 자는 섬기는 자요, 섬기는 자에게 주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의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 세상에서 연약한 자들조차 섬기려는 자세를 높이 보십니다.
시기하는 제자들(49~50절)
내부에서 서열 다툼을 하던 제자들이 유익한 일을 행하는 외부인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귀신을 쫓는 사역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 외에는 자기들만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니 그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모든 권세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 아이에게 들렸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9:40)라는 창피스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어떤 사람의 축귀 행위를 금지시켰다고 예수님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아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믿되 제자 그룹에는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10장을 보면 열두 제자 외에 적어도 70명의 사람들에게도 축귀와 치유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요한의 보고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귀신 축출과 관련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적하지 않는 자는 제자들 편에 있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민수기 11:26~30에서 여호수아가 엘닷과 메닷의 예언 행위를 금할 것을 모세에게 요청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독점적인 예언을 모세의 감독 밖에 있었던 두 사람이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룹 내에서 더 높은 자로 인정받으려고 다투는 모습과 더불어 그룹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혈기를 부리는 제자들(51~56절)
51절은 누가복음에서 내용상 분수령을 이룹니다. ‘승천하실 기약’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표현되고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목적지가 언급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서부터 19:44의 예루살렘 입성까지 계속됩니다. ‘차다’로 번역된 동사는 하나님의 계획이 곧 실현됨을 뜻합니다. 율법을 전수하고 떠나간 모세의 경우처럼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시고 승천하여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굳게 결심하다’는 원어 상 ‘얼굴을 굳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지 공간적 이동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에서도 질적으로 다른 상태에서 사역을 전개하실 예정입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시고 십자가 사역을 이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가려면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유대와 사마리아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마주 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요단강 동편 길이나 서쪽 해안 길로 우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지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미리 보내신 것은 아마도 여행 중에 묵을 숙소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간다는 것을 알고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에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분노하여 사마리아인들을 불로 심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불의 내려옴’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리고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을 불로 사른 사건(왕하 1:9~12)을 상기시킵니다. 제자들은 아마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께서 충분히 하늘에서 불을 내리실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꾸짖다’라는 동사는 예수님의 축귀 사역 때도 사용되었습니다(4:32~41). 예수님은 배타적 태도를 보인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마리아 인들이 이방선교와 우선 대상임을 밝히셨습니다(행 1:8).
제자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57~62절)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던 엘리사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단호한 결정과 결단이 요구되는 삶입니다. 57~62절에 나오는 세 개의 대화는 예수님 따름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이 세 이야기의 공통되는 배경은 ‘길 가실 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단호한 의지와 열정을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본인이 나서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삶이 여우나 새보다 더 열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머리 두실 곳이 없다는 말씀은 그분이 걸어가시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알고 결단하지 못한다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는데, 부친의 장례를 먼저 치르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의무를 면제받는 자는 오로지 나실인(민 6:6-7)과 대제사장뿐이었습니다(레 21:10~11). 따라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나실인이 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부모 공경보다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제자의 길을 우선하라고 가르침은 예수님에게 신적 권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 말씀은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을 잘 보여 줍니다. 먼저 언급된 ‘죽은 자들’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 뒤에 나오는 ‘자기의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죽어 장례식을 치러야 할 사람들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살아난 자들로,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최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르려는데 먼저 가족과 작별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시 농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을 제대로 갈지 못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고난과 희생이 따르는 것과 가족의 일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앞세우는 것은 제자들에게 당연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가족마저 팽개치는 인정사정없는 행동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영광을 얻는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는 자는 세상의 일 때문에 망설이거나 지체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며 섬김의 자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큰 자가 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입니다. 큰 자가 되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대우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반대입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작은 자가 되라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방법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한자리 얻기 위하여 마음에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크고 작은 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한심한 제자들의 모습이 자칫하면 교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경 지식이 많거나 영적 체험을 더 한 것을 과시한다든지, 다른 사람보다 헌금을 많이 하거나 봉사를 좀 더 한 것을 인하여 우쭐댄다면 그것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요,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를 마치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인 양 착각하고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는 것,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만한 자세 등은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될 부분들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누구보다도 많이 수고하고 누구보다도 복음의 열매를 많이 거둔 바울이었지만 자기는 아직도 멀었다는 겸손의 자세로 주님의 일에 힘썼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제일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들어보세요. 이때 손을 들면 더 이상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인정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요, 자신의 부족, 한계, 죄임 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안에서 겸손한 자요, 형제자매를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관용으로 섬겨야 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면 은근히 시기하고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귀는 놓칠세라 섭섭한 마음 내지는 견제하려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그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말을 듣고 질투하거나 분해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드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 자기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위치를 알고 겸손히 주님께 길을 내어드렸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에 분노하며 불을 내려 멸하기를 원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도, 성령 강림 후에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길 기대하며 그들을 용납하셨습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세상을 저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쳐 ‘우리끼리만’하면 곤란합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팔로마 한인교회는 ‘우리들끼리’만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관용과 연합과 교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우선순위에 따라 섬겨야 합니다
살다 보면 다양한 일들이 생깁니다. 어떤 일은 ‘발등의 불’로 보이지만 어떤 일은 ‘강 건너 불’로 보입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즉 우선순위를 알지 못하면 발등의 불만 열심히 끄고 살아갑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승천할 때가 다가오면서 예수님은 비전과 사명에 집중하셨습니다. 요즘 우리의 마음을 끌고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여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이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으면, 내려놓기로 한 것들에 미련을 갖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접을 받기 위하여 첫째 자리를 노리며 자신의 인기나 명예를 위하여 동분서주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라고 하며 자기를 드러냈습니다. 이웃을 경계나 경쟁의 대상으로 대했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며 이웃을 섬길 때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겸손으로 대하게 됩니다. 인내로 대하게 됩니다. 기쁨으로 대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동을 절제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경쟁과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고난 없는 영광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안타까워하시던 주님께서 우리를 보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교만, 시기, 혈기를 부인하고 겸손, 관용, 인내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옛사람이 변하여 주안에서 새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요, 주님을 날마다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교만과 시기와 혈기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 충만을 받으니 겸손해지고 관용을 가진 자들이 되었고 인내하는 자들이 되어 초대 교회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혈기가 왕성했던 우뢰의 아들 요한도 그가 쓴 요한 일서를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라고 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겸손하게 섬기려면 우리를 씻기신 예수님에 대한 감격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아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고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요 이웃을 섬기며 넓은 마음으로 품는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며 훗날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칭찬 듣는 참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