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엄과 예수님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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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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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어도 건강, 자녀, 사업, 관계 등등 다양한 문제가 예측할 수 없이 피할 수 없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돌아보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문제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더 이상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여전히 문제는 일어납니다. 갈등은 생깁니다. 그렇다면 문제에 부딪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으로 믿고 그냥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면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합니까?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가 정말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 계기가 되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냐”라고 물으실 때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인도되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을 때 예수님은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적인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수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변화 산에 올라가 장차 갖게 되실 영광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산위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모습과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산위에 초막을 짓고 계속 머물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산 위의 영광’과 ‘산 아래의 고통’이 대조적이었습니다.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사탄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9명의 제자들이 실패한 귀신 축출을 말씀 한마디로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문 다음부터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오늘도 산 아래서 살아갑니다. 살다보면 문제에 부딪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산 아래에서의 고통(37-41절)
마태복음, 마가복음의 병행 본문과 비교할 때 누가의 기록은 간결한 반면,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묘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 ‘이튿날’에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열 두 제자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9:1). 그런데 아홉 명의 제자들이 달라붙어도 아이에게 있던 귀신 하나를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볼거리가 있나 하여 점점 모여드는데 귀신이 떠나지 않으니 제자들은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무리 중에 있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자신의 아들을 돌보아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외아들임을 강조했습니다.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한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다면, 산 아래에는 귀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진 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산 위의 영광을 뒤로하고 산 아래로 내려오셔야 했고, 또 예루살렘을 지나 골고다까지 오르셔야 했던 것은 그 ‘외아들’처럼 사탄에 매인 인류를 구원하여 부활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자기 아들의 형편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39절은 ‘보라’로 시작합니다. 아이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귀신이 아이를 잡으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잡다’는 ‘소유로 삼다’는 뜻입니다. 귀신이 아이를 소유로 삼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아이에게 임하면 큰 소리를 지르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고, 몸을 몹시 상하게 하고나서야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는 증세는 마태는 간질이라고 합니다(마 17:15). 요즈음은 간질에 걸린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지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월요일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서 있는 동안 간질로 인하여 땅바닥에 쓰러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하는 학생들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설명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누가 듣고 있었습니까? 제자들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큰 무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이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말해주었습니다. 제자들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리로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니 예수님께 누를 끼쳤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믿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세상은 가차 없이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삶에 변화가 없고 믿는 자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변화 산에서 본 영광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산 아래 세상은 어둠과 절망, 좌절과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악한 세력 앞에서 무기력했습니다.
여러 마을을 다니며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헤롯왕을 심히 당황하게 만들었던(6-7절)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개역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오’라는 감탄사가 들어갑니다. “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세대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목격한 것처럼 예수님도 산에서 내려와 귀신과 싸워 이기지 못하는 무능한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하시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는 권세, 병을 고치는 권세, 귀신 쫓아내는 권세,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믿음 없이도 발휘될 수 있는 은사나 능력은 없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이고, 신념이 아니라 신뢰이기에 늘 돋우고 다져져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예수님은 이제 떠나실 때가 되었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의 믿음은 주위에 있던 무리, 아이의 아버지와 별로 다르지 않게 보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명령형이니 지금 당장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 치유(42-43a절)
누가복음에는 아이를 고치기 전에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주님은 바로 그 아이를 고치시지 않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치기 위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서 물어 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묻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아이를 고칠 수 있었지만,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는 그 아버지로 하여금 그가 현재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과 예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느끼게 함이요, 또한 둘러선 무리에게 이 아버지와 아들이 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들려줌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으시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막 9:22). 부탁을 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아이를 반드시 고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문을 듣자니 귀신을 쫓아내고 병도 고친다고 하니 예수님도 나름대로 무엇인가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말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헬라 원어에는 ‘무슨 말이냐’하는 표현은 없고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만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믿는 자에게는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연약한 믿음을 책망하실 뿐더러 그 아버지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합니다(히 4:12).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아버지에게 부딪치니 그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순간 자기의 부족했던 점이 깨달아졌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자기 집의 문제는 아들에게 있으니 아들만 고침 받으면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 지금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내 아들의 귀신 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에게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치유 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믿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질병의 치료는 잠깐으로 그치지만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육신의 병보다 아버지의 영혼의 병인 불신앙을 먼저 치료하셨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연약함을 깨닫고 절규하는 아버지의 진실한 고백을 예수님이 듣기 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어 의심의 안개로 가려졌던 예수님과의 장벽이 새롭게 가진 믿음을 인하여 무너지니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 나갔습니다. 귀신이 그 아들을 땅에 넘어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할 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하신 후, 그 아버지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는 논평으로 이 이야기를 끝냅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위엄을 믿어야 합니다. 믿을 때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43b-45절)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사역에 대해서 모두 놀라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아 두라’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당장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하실 말씀이 아주 중요한 것이므로 온전히 마음속에 담아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두 번째 예언입니다. 이사야 53:12은 이 종이 많은 사람의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배반을 당하여 사람들 손에 넘기어져 죽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사탄을 무력화시킨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두 가지 이유로 인자의 수난 예언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이 예언이 숨겨졌다는 것이었습니다. 18:34도 ‘숨겨진 것’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18:31~33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수난, 죽임 당함, 부활에 관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45절에서도 ‘숨겨진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위엄과 영광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와 죽음의 길을 걸어야 하셨습니다. 물론 이러한 역설은 제자들이 미처 깨달을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두려워서 예언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환호와 열광에 도취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은 애써 그 말씀을 외면하고 묻는 것조차 회피했습니다. 다 이해하거나 수긍해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고, 자기들의 무지와 욕망이 드러날까 두려웠습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의 제자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의 영광을 뒤에 두고서 산 아래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의 제자들이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더욱 신뢰하고 사모하도록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또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어찌하여 자식을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시며, 그 아이를 고친 후에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것들이 병들거나 망가지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그것들을 우리의 손에서 받아내기 위해 오늘도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나아오기를 주저합니다. 그 문제가 어떤 것이든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주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제자란 믿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첫 단계는 먼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시고 진정한 쉼을 약속하십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해결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 들려 고통 받는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아들을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탓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친 삶의 현장에서는 이 믿음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집에 들어 왔을 때에 자기들은 왜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17:2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제자들은 믿음이 작았기에 작게 기도하였고, 작게 기도하다보니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전히 자기들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신앙은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더 생각하며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
- 주님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걷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길’을 온전히 걷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와 동행한다 하면서 결코 만나지 않는 평행선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생각하기보다 안락하고 편한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산 위’의 영광에 머물지 않고 ‘산 아래’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셨고,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에 도취되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고, 사명감도 투철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실감할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지만 육신에 머물러 활동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머물러야 할 것을 소명으로 느낀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사모하는 가운데 이 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명이 있기에 삶의 이유가 분명하고, 아버지 집을 바라보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산 위의 영광을 기억하며, 산 아래에서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귀신에 붙들려 있다고 호소하고 구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주기를 구했으나 그들이 못했다고 하소연하면서 말입니다. 이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향해 가셔야 하셨기에 그들이 속히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서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치유해 주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 주신 후 제자들에게 당신이 당할 수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실 십자가의 길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우리 앞에 주어진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야 합니다. 참다운 성도의 능력은 직분이나 신앙경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의 신실하고도 지속적인 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능력 있는 제자가 되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불신과 회의로 가득한 세대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건강하며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