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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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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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 들러리가 아무리 잘 생겼다고 해도 들러리를 보고 환호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신부와 신랑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불의 사자, 능력의 종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의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기 역할이 사라지면 무대 뒤로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본체가 되시는 예수님보다 들러리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계실 분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도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옆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버리셨던 영광의 일부를 잠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사건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속을 성취하실 때 그분께 임할 부활의 영광을 예비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영광 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누신 대화의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함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분께 순종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자원하여 가려는 모든 자들에게 임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들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27~29절)
예수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고난 받는 종으로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라는 표현은 변화산 사건이 27절의 약속의 성취의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영광과 능력의 실재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일’은 유대인들의 한 주 표현인 일’을 헬라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지만 누가만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음을 언급합니다. 이 산은 갈릴리 남부에 위치한 다볼 산이나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먼저 부름 받았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누가만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모’로 번역된 헬라어 표현은 ‘얼굴의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본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 즉 하늘의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단 7:9) 지극히 거룩하고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 임한 영광은 또한 시내 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출 24:15-16) 제자들은 자기들의 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그 천상적 경험은 인자의 고난에 대한 선언으로 말미암아 고민과 의심에 싸여 있었을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또한 세상 영광을 뒤로한 채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십자가를 향해 순종의 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격려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예수님(30~31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한 것은 공관복음에 다 나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났다는 것과 대화의 핵심 주제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변모된 예수님의 모습 뿐 아니라 그 곁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18:15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마지막 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변화산에 모세가 등장했다는 것은 시사한 바가 큽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통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였듯이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말라기 4:4-6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언급됩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9:37)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살랐습니다. 이 장면을 본 백성들은 일제히 엎드리면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9:39)라고 외쳤습니다. 엘리야가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 받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역할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로 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죽음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엘리야는 살아 있는 상태로 회오리바람에 의해 하늘로 올라갔고(왕하 2:11), 모세는 벳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지만,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신 34:6). 또한 두 사람 모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계시를 받았습니다(출 19:3; 왕상 19:1~18). 두 사람이 변화산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 사건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종말론적 사건의 성취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좀 더 매끄럽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곧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실 그의 떠나심’이 됩니다. ‘그의 떠나심’에 해당된 헬라어가 출애굽 사건을 가리키는 ‘exodus’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번째 출애굽 사건은 애굽에서 노예로 나왔을 때를 말하고, 두 번째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나왔을 때를 말합니다. 이제 또 다른 출애굽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Exodus에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여 년간 종살이 하였습니다. 심한 노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인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는 떠나기는 하되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출애굽인 영적인 출애굽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를 믿는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게 합니다.
베드로의 제안(32~33절)
세 제자가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났다’는 것도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이 깊이 졸았으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라는 언급은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 중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들의 영광이 예수님의 영광에 비하며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언급한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던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안했다는 것도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제안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초막’을 지어 봉헌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었던 것처럼, 메시아가 오실 때 새로운 초막이 지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슥 14:16~19)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범한 실수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자리에 두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레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세와 엘리야가 훌륭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둘째,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도록 권유한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를 말한 것은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고난을 당하셔야 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초막을 짓자는 제안은 예수님께서 산 아래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제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십자가를 통한 인류의 구원계획을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워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망각하고 오직 영광만을 기대했기에 하늘의 영광이 나타난 산 위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34~36절)
그때 구름이 그들 모두를 덮었습니다. 구름이 덮은 시점에 대한 언급 역시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현상은 하나님이 임하셔서 말씀하기 위한 예비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무서워했습니다. 구약에서 구름이 덮인 것은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출애굽기 40:35을 보면“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열왕기상 8:10-11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제자들은 이 구름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를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제자들에게 소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전에 언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하지만 그때와 달리 변화 산에서의 선언은 예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대신 ‘택함을 받은’이라는 단어가, ‘내가 그를 기뻐한다’대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는 이사야 42:1(“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을 연상시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님이 이사야 42:1이 언급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대속의 고난을 당할 것을 알렸습니다(사 53장). 예수님은 동시에 ‘나의 아들’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시 22:7).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구약에도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본문에서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왜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고, 모세에게도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에게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2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보다 권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들의 말씀을 들을 때 살 길이 열립니다.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기쁨과 감사의 길이 열립니다. 영광의 길이 열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소리가 그치자 구름이 사라졌습니다. 영광은 잠시뿐이었고 예수님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이 그들을 경청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한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마 17:9; 막 9:9). 베드로는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그의 서신에 기록했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7).
우리의 자세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 제자들은 변모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변화산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누가복음 9:28에 보면 예수님이 세 제자와 더불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되셨는데 제자들은 그 시간에 잠이 들었습니다. 육신만 피곤에 지쳐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도 깊이 잠들었습니다. 영혼이 잠들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겪는 순간에 변화산 경험은 제자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진리에 대해 밝은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깨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난의 메시아를 대변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영광의 메시아를 대변합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고난이 먼저 있고 이어서 영광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변화산은 내려와야 하는 산입니다. 그런데 신비한 체험을 한 제자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기를 구했습니다. 변화산에만 머문다면 십자가가 있을 수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의 길을 막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구원은 소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함입니다. 우리가 본 모세와 엘리야 때문에 우리가 지으려는 초막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당신이 당할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았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또 한 번 막았습니다. 이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앞서고 별로 희생 없이 주의 일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희한한 체험을 하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구한다고 언제나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약속된 복을 받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에 믿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수고한 열매에 따라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거나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나가면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기도 중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요 예언의 성취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여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큰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로 인해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는 끝이 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변화산 사건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변화산에 계속 머무시지 않고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현실의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기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약속합니다. 새 언약의 시대를 살게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함으로써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장차 얻을 영광을 확신하게 합니다. 그 확신으로 이 땅에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영광의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모든 자에게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주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권능의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