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른 고백과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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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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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9:18~27


신앙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한다고 모두 같은 성도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종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름과 형식만 갖춘 교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교우들이 있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교우도 있습니다. 그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외형이나 육체의 변화가 아닌 속사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 대한 질문이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도전의 메시지였습니다. 교인은 많으나 성도는 많지 않고 무리는 많으나 제자는 적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는 경제법칙을 신앙생활에도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과 정성을 많이 들이지 않고 천국행 티켓을 얻으려고 합니다. Bonhoeffer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cheap grace’(값싼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희생 없이 구원만 받으려는 얄팍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꼬집었습니다. 진짜보다 짝퉁을 더 진짜같이 보이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사탄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시니 적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계시니 악령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속기 쉽습니다. 각자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거듭났는가? 혹시 짝퉁 제자는 아닌가? 무늬만 교인은 아닌가?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수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그분의 첫 번째 예고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서 감당해야 할 그분의 근본적인 사명의 성격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메시아의 사명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제자도의 교훈은 예수님이 가시게 될 십자가의 길이 제자들이 따라가야 할 길임을 보여 줍니다. 물론 궁극적인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만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나는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인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며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질문
-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19절)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 것과 무리를 해산시키신 일을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마 14:22; 요 6:15). 예수님이 제자들을 무리에게서 즉시 떼어 놓으신 것은 그들이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무리의 반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간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새벽에(마 14:25) 호수 한복판에서였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내용도 생략하고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신의 입을 통하여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으셨습니다. 자신의 삶과 사역을 보면서 제자들 스스로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권세 있는 가르치심, 병자를 일으키심, 귀신을 쫓아내심, 바람과 바다까지도 잔잔케 하심, 죽은 자도 살리심, 오병이어 기적 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 내용은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헤롯의 신하들이 예수님에 대한 무리의 생각을 반영했음을 시사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을 능력이 뛰어난 선지자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이면서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평소에 듣던 대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며 세례자 요한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시니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큰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능력 있는 가르침을 듣고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만을 보고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을 했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21절)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메시아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과 무리에게 알리기 원하셨던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는 바울의 말과 같이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아직 정확히 몰랐으나 어쨌든 예수님이 단순히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는 자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에서 무리보다는 낫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왕으로서의 메시아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의 정의를 이룩할 육신적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사 11,32,42).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메시아가 고난의 종으로 오신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온전하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섣불리 예수님을 전했다가는 도리어 혼란만 가중될 수 있기에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경고하셨습니다. ‘경고’라는 동사는 귀신을 축출하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경고가 아주 엄중함을 시사합니다.

수난의 첫 번째 예고(22절)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와 두 번째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고백을 갖게 하시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역을 감당할 제자들만큼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곧바로 수난의 첫 번째 예고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단어대신 ‘인자’란 표현을 쓰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고난이 설 자리가 전혀 없었고, 오직 영광과 권세와 위엄밖에 없었습니다. ‘인자’라는 단어는 다니엘 7장에 소개된 하나님 나라의 예언과 관련이 있습니다(단 7:13~14). 예수님은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자 드디어 그리스도로서 자신이 어떤 사역을 감당하실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네 개의 동사(고난 받다, 버린바 되다, 죽임을 당하다, 살아나다)가 사용되었습니다. 수난의 절정은 부활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백성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도(23~27절)
‘무리에게 이르시되’에서 ‘무리’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무리’로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모두’로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무리’란 번역은 ‘그들 모두’로 되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입술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삶을 통해 끊임없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 가지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존감을 버리고 무조건 자기를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욕구를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만족만을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정욕과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갈 5:24). 인간적으로 볼 때는 손해요 자신을 잃는 것 같이 여겨지나 실상은 진정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쳐서 날마다 주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매순간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 자기 십자가를 지라
당시 중범자들에게 십자가형이 주어졌습니다. 그 형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형장까지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하여 일부러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녀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 즉 희생을 의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수난을 밀알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도리어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기꺼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의 칭찬은 같습니다. 언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부터 당장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지금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지금 당장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 나를 따르라
그렇다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따르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주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1세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생사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받아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스데반과 야고보는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고후 11:23-27).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신앙으로 인한 육신적인 핍박은 없더라도 더 교묘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를 바쁘게 하고 지치게 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린 후에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싸움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원한다면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해야 비로소 주님과 함께 승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특권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섬김의 길임을 강조합니다. 제자도란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헌신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세상의 물질, 권력, 명예를 얻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승자라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면목 없는 패자가 되고 맙니다. 누구를 위한 삶이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것”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만방에 알려야 할 기쁨의 소식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스승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면 제자의 길도 당연히 십자가의 길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길과 십자가의 길이 공존할 수 없음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위해 살 때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고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과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가깝게는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심판을 받는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을 위해 잃은 삶은 결코 낭비가 아님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식적인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대상입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은 물론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육신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도, 옛 선지자도 훌륭한 존재이며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기도와 말씀과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인격적이고도 다이나믹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참제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생각과 뜻을 맞춥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일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섬긴다면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만족을 느끼지만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도 불평이 있고 허무를 느낍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혹은 하기 싫다고 다른 사람이 섬기는 것까지 막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섬김의 자리도 섬김의 능력도 섬김의 마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섬김의 기회를 가진다면, 그러한 기회를 가진 사실 자체에 감사하며 온 마음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사실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소망 중에 인내합니다. 지금의 고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롬 8:18).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십자가 지는 것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제자는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갈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럴 때 훗날 우리를 결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하는 칭찬과 더불어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나가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주님의 질문은 결국 “주님이 우리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눈이 가리어질 때 주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도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무리처럼 표적만 구하지는 않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짝퉁 제자는 아닙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말했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 지 오래 되었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4)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이 가진 흔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이었습니다. 그 흔적은 바울이 하나님의 택한 종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생깁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좁은 길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바른 신앙고백과 더불어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반면에 세상의 유익을 얻기 위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이 영광으로 오실 때에 그들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물론 제자의 삶이 언제나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자기의 옛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성화의 삶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예수님께만 순종, 희생,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도 포함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도를 실천하며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는 열정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참제자들이 팔로마한인교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팔로마한인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주님이 칭찬받는 교회요,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는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담대하게 말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세상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