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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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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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제자들에게는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도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실 때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 해서 사역의 전면에 나서야 했습니다. 믿음에 근거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본 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적이고 들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그들의 경험을 전도의 현장에서 보여 주고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또한 빈 들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단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으며 그분만을 의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또한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어려움이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풍성함과 안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면서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때를 따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열두 제자의 파송(1~6절)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불러 전도하러 보내셨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부각되는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신할 새로운 언약 공동체가 열두 제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마가복음 3:14~1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첫째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함이요, 둘째는 그들을 보내기 위함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때가 되니 제자들은 ‘따르는 자’에서 ‘보냄 받은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을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원래 예수님께 속한 것이었는데, 이제 제자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병자의 치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괴로움을 해결해주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사탄의 지배에서 인간의 실존을 해방시켜 전인적인 치유를 가져다주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누가는 예수님의 전도 여행을 기록하면서 한 번도 예수님의 여행 지참물을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인 전도 지침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마저 챙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팡이는 야생동물이나 강도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였고, 배낭은 주로 양식을 담는 작은 자루인데 끈을 달아서 오른쪽 어깨에 걸고 허리 왼쪽 부분에 부착했습니다. ‘돈’은 ‘은전’을 지칭했습니다. 여분의 것을 갖고 가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자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삶의 스타일을 가짐으로써 전도 사역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전도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람들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따라서 전도자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돈이 없어 힘들고 배고팠습니까? 22:35에 보면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둘째,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숙박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 전도자들이 성도들의 환대를 기대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는 생면부지의 손님도 잘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동네를 가든지 처음 받아들이는 집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한곳을 전도의 전초기지로 삼으라는 전략적인 권고였습니다. 전도하러 왔다면서 더 나은 대접하는 곳을 찾아다니거나 불편하다고 옮기는 것이 결코 덕스럽지 못하고 도리어 복음의 진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영접 받지 못하면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반면에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거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배척당했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쉬운데, 그 감정을 빨리 떨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 있다가 돌아올 때는 발에 먼지를 떠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먼지’는 흙이나 다양한 이물질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증거를 삼기’위해서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주어진 임무를 다했다는 증거이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증거입니다.
당황하는 헤롯(7~9절)
당시 갈릴리를 통치하던 분봉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주전 4년에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은 후에 그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갈릴리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아 주후 39년까지 다스렸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들었던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전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 마을에 파송된 열두 제자들은 복음 전도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해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는데,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헤롯은 심히 당황했습니다. 여기서 ‘당황’이라는 표현은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곧 그는 매우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헤롯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라고 말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자 요한으로 간주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던 헤롯은 결국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셔서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23:8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기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다’는 누가의 설명을 고려한다면, 헤롯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빈들의 만찬(10~17절)
예수님은 전도 실습을 다녀온 제자들의 보고를 받으신 후에 사역에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려고 벳새다로 떠나셨습니다. 벳새다는 ‘어부들의 집’이라는 이름처럼 어업이 주요 산업인 동네였고, 가버나움에서 동쪽으로 3.5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빌립, 안드레, 베드로가 이곳 출신이었습니다(요 1:44; 12:21). 무리가 모인 장소는 빈들이었으므로, 벳새다 밖의 광야인 가버나움 북쪽 언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가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제자들과 조용히 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도 좀 쉬자’하시며 역정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무리를 영접하셨습니다.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환영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쉴 틈 없이 바쁘셨지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던 그들의 상태가 메마른 광야와 같은 것을 아셨기에 가르침과 병 고침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빈들에서도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빈들에 있는 굶주린 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지팡이와 신발 외에는 아무 것도 갖고 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굶주리지 않았고,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쳤고,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전도 하는 곳마다 능력을 주신 예수님이 빈들에서도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빈들이라는 상황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인근에 동네도 없습니다. 모인 사람은 남자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문제만 보았지, 문제해결의 열쇠를 가진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 계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녁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열심히 가르치실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며 지극히 상식적인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를 섬기는 것을 이제는 제자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음식을 대량으로 구입하지 않는 한 그들이 가진 것으로는 많은 무리를 먹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 속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현실의 문제를 잘 분석해도 예수님과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면 절망만 더 깊어갈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대답할 수 없는 ‘인생의 질문’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삭막한 광야 같은 현실에서 주님만이 우리의 해답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고 나서도 제자들처럼 믿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수 있기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매 순간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계에 부딪쳤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주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니까 빈들에서도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명령을 하셨습니다. ‘떼를 지어 50명씩 앉히라’는 것이었습니다. ‘떼’로 번역된 헬라어 ‘심포지아’는 특별한 종류의 유대 관계나 결속을 뜻하는 용어로 연회나 만찬 모임에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심포지엄’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인해 새롭게 생겨난 공동체가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을 암시합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라고 기록함으로써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보여 줍니다. ‘오십 명씩’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 단 한 번 등장합니다. 3년의 기근 막바지에 엘리야는 아합 왕의 신하 오바댜를 불렀습니다. 오바댜는 아합의 부하였지만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자기가 했던 일을 말했습니다. 이세벨에게 위협받던 선지자 100명을 오십 명씩 동굴에 숨기고 그들에게 떡과 물을 공급했다는 것입니다(왕상 18:13). 선지자들의 목숨을 구하고 음식을 공급했던 오바댜의 행동, 그리고 선지자 엘리야와 연관성이 ‘오십 명씩’이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됩니다. 무리가 다 앉자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들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감사하며 경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모습은 마치 다락방에서 행하신 새 언약의 성찬식과도 같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22).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다’가 미완료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받은 것을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떼다”는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다, 찢다’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심으로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몸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십자가 사건의 예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잔치를 예표합니다(사 25:6; 렘 31:14). 떡과 물고기의 양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떼어 주실 때 늘어났는지, 아니면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줄 때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간 만나를 먹었을 때 모세는 기도를 통해 만나의 양을 늘리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유사한 기적은 선지자 엘리사가 어떤 사람이 가져온 보리 떡 20개와 한 자루의 채소로 100명이 배불리 먹고 음식을 남긴 사건입니다(왕하 4:42~44). 그런데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이 먹고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사보다 크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빈들에 있던 무리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배부르다’라는 단어는 ‘음식으로 꽉 차다’라는 뜻으로 내면의 충족까지 나타냅니다. 많이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족스럽게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주린 영혼’과 함께 ‘주린 배’도 채워 주셨습니다. ‘열둘’은 남은 음식의 양을 말하기도 하고, 또한 상징적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공동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집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의미
오병이어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냅니다. 기적으로 사람을 먹이는 일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이 행한 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었고(왕상 17:8~16), 엘리사는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을 배불리 먹였습니다(왕하 4:42~44). 그런데 예수님도 광풍을 잔잔케 하셨고, 군대귀신을 제압하셨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고치셨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적인 능력과 성품을 지니셨고, 선지자들이 했던 활동을 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선지자도 하지 못했던 인류 대속을 위한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둘째, 열두 제자의 활약이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제자들은 조용한 관찰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달라졌습니다. 날이 저물자 열두 사도는 무리의 필요를 살피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예수님께 제시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파송 사건 이후에 나타난 변화로 보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물정 모르는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제는 직접 무리를 돌보며 책임지는 자리로 나아가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오십 명씩 앉혔고, 예수님께 떡과 생선을 받아 나누어 주었습니다. 셋째, 오병이어 사건은 십자가를 예고합니다. 먹고 배부른 현장은 잔치 자리였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계 19:9). 빈들에서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기뻐하는 중에 종말에 완성될 천국 잔치를 맛본 것입니다. 이 사건의 앞뒤에 헤롯 안티파스의 위협과 다음 주에 살펴볼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나타납니다. 보다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 보다 많은 천국 백성을 얻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빈들에 방황하는 목자 없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영육 간에 풍성한 것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 34:23).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방황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상처를 받은 영혼들을 찾아내고 돌보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역을 이제는 우리를 통하여 하기 원하십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영혼들을 주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 4:2)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지팡이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초라하고 볼품없던 지팡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는 어린아이 한 끼 식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가 주님 손에 들렸을 때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일단 주님 손에 들리고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론 주님은 오병이어가 없어도 얼마든지 무리를 먹일 수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 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이 움켜쥐고 있어도 우리 손에만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가치는 우리 손을 떠나 주님께 옮겨질 때 나타납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진 것만이 가치를 발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오병이어. 우리도 풍성해지고 이웃이 함께 풍성해지는 믿음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시간, 물질, 달란트를 믿음으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부름을 받았고 보냄을 받았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현장에 처음 나갔을 때 그 느낌을 상상해 보세요. 귀신들렸거나 병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의지해서 사역을 감당했을 때 그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그분이 베푸시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사역의 궁극적 지향점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천국잔치로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최고의 만찬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초대장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거둔 열매를 가지고 제자들처럼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벳새다 빈들에서 벌어지는 잔치는 세상적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모인 잔치요, 오병이어로 시작된 초라한 잔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잔치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 잔치였습니다. 영의 양식과 육의 음식이 함께 그리고 풍성하게 주어진 생명의 잔치였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만나가 다시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예수님이 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의 풍성한 삶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빈들이라 인적도 드물고 바위투성이요, 바람이 부는 광야지만 그 곳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합리적인 생각을 믿음보다 위에 두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받은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다시 내어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의 것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의 백성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잔치는 우리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때 시작됩니다. 그럴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요셉과 같이 형통하고 다윗과 같이 점점 강성해져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