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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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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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100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믿음의 시련을 겪은 후에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창 22:12)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란 칭호를 얻기까지 그는 험악한 삶을 살았고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더불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고 그곳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궁극적으로 복을 받지만 그 과정에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합니다. 욥이 노년에 두 배의 복을 받은 것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열 자녀를 모두 잃어버리고 재물을 다 잃어버리고 건강까지 잃어버리고 친구들의 정죄까지 받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에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지금 어떤 시련의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일까요?
본문은 두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샌드위치 구조로 연결했습니다. 야이로의 딸 치유 기사를 시작(40~42절)과 마지막(49~56절)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혈루증 걸린 여인의 치유 기사(43~48절)를 끼워 넣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소위 ‘power story’의 특징은 문제의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제자들이 만난 바람은 그들 생애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막강한 power를 가진 광풍이었습니다. 거라사 인의 땅에서 한 청년을 사로잡았던 것은 군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power를 가진 귀신들이었습니다.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죽음을 향해 가는 자였고, 야이로의 딸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 장례식만 남겨 놓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어떻게 다루시며 그들의 믿음을 도우시는지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될 뿐 아니라 받은 은혜 감격하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40~42절)
예수께서 거라사 땅에 가셨다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가버나움 지역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거라사 주민들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했는데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무리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예루살렘 한 곳밖에 없지만 회당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율법의 말씀을 배우는 곳으로 동네마다 있었는데 회당장은 회당 사용 허가를 주거나 집회를 주관하는 인물로 유대인 사회에서는 아주 유력한 인사였습니다. 그의 사회적 신분으로 보아 일반 평민들보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중에 지인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6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니 아마 야이로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딸의 병을 고칠 이는 예수님 밖에 없다 생각하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왕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병든 딸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딸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차라리 딸 대신에 내가 아플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야이로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전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 전하시는 것을 들었거나 갈릴리에서 이적을 베푸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물론 야이로의 행동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을 잘 고치신다고 하시니 자기 딸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간구하다’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으니 반복해서 간구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무리가 몰려들어 예수님을 에워싸며 따라갔습니다. 야이로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이제 예수님이 집에 가시기만 하면 내 딸은 살 것이라는 기대 속에 조금 전까지 그에게 드리웠던 어두움은 사라지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나타난 여인(43~48절)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기 때문입니다. ‘옷 가’로 번역된 단어는 옷 모퉁이에 다는 ‘옷 술’을 가리킵니다(민 15:38-39). 율법에 따르면, 월경이나 출산 때문에 하혈을 한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부정해져서 일정 기간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레 15:19-27). 율법적으로 볼 때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으니 여인의 부정함이 예수님께로 옮겨져 예수님도 부정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의 부정함이 예수님께 옮겨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의 거룩함이 여인에게 옮겨져 여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인간의 죄와 만날 때 공의의 원리가 적용되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은혜로 만나 주실 때는 그분의 거룩함이 인간에게 옮겨져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밀려서 누군가 손을 댄 것이니 예수님은 신경 쓰지 마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직역하면 ‘만졌다 나를 누군가가’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만진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로 자신의 능력이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떨면서 나온 이유는 허락도 없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을 인해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손에 닿으면 불결하게 되는데 여인의 행동은 율법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예수님의 옷 가에 손 댄 이유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고백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녀가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실을 말했다고 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녀가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과 그 결과를 그녀의 직접적인 간증을 통해 모든 백성에게 알리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가는 이 여인이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재산을 허비했지만 오히려 병이 더 중해졌다고 밝혔습니다(막 5:26). 예수님은 여인을 꾸짖지 않으시고 친근하게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부르심은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이 여인을 이제는 이스라엘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하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세상에 주고자 하신 평안을 바로 그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문맥상 질병으로부터 치유 받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제는 누가복음을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중풍병자 친구들이 믿음으로 죄 사함 받습니다(5:20). 죄 많은 여인이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7:50). 맹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8:42).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음의 위기에 처한 야이로(49~50절)
예수님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을 하실 때에 야이로의 믿음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살아 있다면 치유될 가능성이 있지만, 죽었으니 이제 모든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서 딸의 장사를 치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때 야이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은 여인이 간증하는 동안에도 슬쩍 야이로의 표정을 살피셨을 것입니다. 여인의 간증이 계속되면서 점점 초조해지던 야이로, 그러다가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다는 것을 인하여 야이로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믿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떠나면 ‘좀 더 잘 해 주었어야 하는데’하는 아쉬움이 들게 마련입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예수님을 모시러 갔더라면, 내가 조금도 일찍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했더라면 저 여인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자책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정한 예수님은 당장 생명의 위협을 받지도 않는 여인에게 붙잡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살리려고 했던 딸이 죽었다는 실망감과 자기 앞에 있는 저 여인 때문에 지체가 되어 자기 딸이 죽었다는 원망감이 뒤섞였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믿음의 위기에 직면하여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계속해서 가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떠나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혈루증 걸린 여인 뿐 아니라 야이로에게도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끝까지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믿음이 흔들리는 야이로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두려워하는 것을 멈추고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네 딸이 나를 통하여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또한 여인의 혈루증이 낫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야이로의 딸이 죽었거나 살아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딸의 소식을 가져온 자의 말은 야이로를 낙심케 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야이로의 꺼져가는 믿음의 불씨를 되살려주었습니다. 딸은 비록 죽었지만 그는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딸을 향하여 갔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자기의 죽은 딸을 어떻게 하실지 야이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야이로에게 심어주시기 위하여 주님은 잠시 길을 멈추신 것입니다. 만약 병에 걸렸던 딸이 예수님의 안수를 통하여 나았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께 간청하면 응답을 주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난 이 사건은 병들었다가 나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 경우입니다. 이를 계기로 야이로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깊이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주님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실상은 예수님께서 야이로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믿음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능력(51~56절)
야이로의 집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리와 아홉 제자들을 남겨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습게 알거나 호기심으로 주님의 주변을 서성이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계시의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집 안에는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가 죽으면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대신 소리 높여 울게 함으로 장례식의 슬픈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고 있다는 것은 그 아이가 확실히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는 소리를 듣는 야이로의 마음에 다시 파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다는 것은 깰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아이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하며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딸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명령하시니, 아이의 영이 돌아오고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은 소녀가 ‘다시 살아남’을 ‘영이 돌아옴’으로 묘사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난 현상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발견됩니다.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의 부정이 전달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예수님이 손을 대시니 오히려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혈루증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 술에 손을 대고 치유 받은 현상과 유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불결이 전염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불결을 몰아내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일어나다’는 단어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되어 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소녀가 다시 일어났을 때 부모가 놀랐다고 하였는데 마가복음 16:8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었다고 합니다. 장차 죽음에서 부활하실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고 귀신들린 청년을 온전케 하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하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살아난 아이의 건강을 회복시키려 하실 뿐 아니라 이 아이가 확실히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쓰시며 영육 간에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는 욥의 고백처럼 야이로는 귀로 듣는 믿음에서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섣부른 오해를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본문의 키워드는 ‘믿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셨고,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으로는 질병에서 벗어나 육체가 온전해지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뿐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그분이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치유만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발걸음을 멈추시고 여인을 불러 세우시고,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야이로에게는 죽은 딸을 다시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것은 권면을 넘어 도전이었고 초청이었습니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혈루증도, 심지어는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죽음도 예수님 앞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믿음’만을 요구하셨습니다. 여인에게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발을 움직여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손을 움직여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입을 움직여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여인과 같은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충고와 더불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비웃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불신앙적인 주위 상황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새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백성을 회복시키시며 제자들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도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주님의 평강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불안과 좌절,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 줄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계신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평안은 ‘하나님을 향한 확신 속에서 얻는 고요함과 안전함과 건강’입니다. 거라사의 황폐화된 청년에게나, 오랜 세월 혈루증으로 시달리던 여인에게나, 죽어가는 딸을 지켜보고 나중에 죽은 딸을 마주 대한 야이로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님의 평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평안을 준다고 약속하지만 실제로 평안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삶의 무게와 받은 상처로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무거운 어깨를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평안히 갈지어다.’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도 평강이 임합니다. 그런 체험을 한다면 우리도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주님의 평강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보다 더 심한 질병을 앓는 분들이 계십니까? 야이로의 딸처럼 죽기 직전 아니 이미 죽어 버린 것과 같이 소망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질병도 죽음조차도 주관하시고 회복시키는 분이 바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의 것으로 하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요 끈질기고 간절하게 그리고 겸손히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문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이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주님은 능력은 믿고 구하는 자에게 역사 합니다. 시련이 없을 수 없지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일어나시고 주님의 치유와 회복과 부활의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맛보며 주님의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