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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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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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8:26~39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변소가 집안에 있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집 뒤편에 있었습니다. 낮에야 상관없지만 밤에 변소를 가는 것이 어린 제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세식 변소가 아니었기에 밤에 일을 보러 가면 밑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구멍 위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낮에 아이들과 귀신 이야기라도 했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머리털이 쭈빗 서며 긴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서 무엇이라도 나올까봐 변소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손전등 켜서 이리저리 비추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할머니와 함께 가자고 해서 밖에 기다리시도록 한 적도 있었습니다. 공포 속에 떨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본문을 보니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26절에는 ‘그들’이 이르렀다고 하는데, 27절에는 예수님이 내리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저녁 내내 풍랑에 시달렸다가 예수님이 잔잔하게 한 후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탈진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에 도달하니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석회암 동굴이 많아서 밤에 보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보통 무리가 모여들어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 밤에 예수님의 일행을 맞이한 것은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 불과 수 시간 전에는 풍랑에 떨었는데 그때는 귀신들린 자 때문에 떨었습니다. 제자들의 생애에 그날처럼 공포에 질렸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배 안에서 떨고 있었는지 아니면 배에서 내려서 어느 곳에 숨어 있었는지 누가는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군대 귀신 축출 사건은 8장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와 사탄 나라 사이의 두 번째 영적 전쟁 기사입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에 이어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사탄 나라의 패배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막강한 파워를 과시했던 군대 귀신이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명령 한마디로 축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종말적 구원의 성취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결국은 이 싸움에서 자신이 패배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탄의 정체가 폭로되고, 사탄에 의해 비인간화되었던 한 청년이 온전히 회복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tough한 삶의 현장에서, 혹은 시련의 때를 지낼지라도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매인 것이 풀리며 주님의 크신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바로 알고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거두어 훗날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으시기 바랍니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26~27절)
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거라사인의 땅’으로, 직역하면 ‘거라사 사람들의 땅’입니다. 주전 4세기 말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전역과 근동 지방을 정복한 이후로 이 지역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한 열개의 도시들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들을 데가볼리라고 불렀는데, 그중 하나가 거라사입니다. 갈릴리 지방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인들과 함께 거주했지만, 데가볼리는 유대인들이 거의 없는 그리스인들의 거주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귀신 들린 자는 거라사 도시 출신의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사람에 대해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옷’은 겉옷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는 벌거벗었다기보다 속옷만 입고 살았던 것입니다. 둘째, 집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노숙을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홀로 지냈습니다. 셋째,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그는 불결한 영(귀신)에 들렸을 뿐 아니라 불결한 장소인 무덤(민 19:11-14) 사이에 살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엄청난 파워를 가진 귀신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떠나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소망 없이 살았고,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에 의하여 철저히 조종되는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야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찌르며 피투성이가 된 채 처절하게 살았습니다. 자기를 채웠던 고랑과 쇠사슬을 끊고 부술 수는 있었지만 그런 힘을 제공하는 마귀의 올무는 풀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없이 죽음을 향해 달음질치는 인생, 죄와 사탄의 종노릇하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인의 땅에 오신 이유는 더러운 귀신에 매인 그를 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3:27절을 보면 인간의 상황을 ‘강한 자’인 사탄에게 결박돼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럴 때는 사탄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사탄을 결박해야 비로소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더 강한 자’로 거라사에 오셨습니다.

귀신과 대면하신 예수님(28~33절)
귀신 들린 청년이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엎드려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가 왜 예수님께 달려왔을까요? 29절에 보면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귀신에게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많은 귀신에 들렸는데 29절에서는 이 귀신들이 단수로 언급됩니다. 단수로 언급된 이 귀신은 많은 귀신의 대표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존재를 알고 계셨습니다.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귀신이 그 사람의 몸을 강하게 붙잡고 여기 저기 끌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광야로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광야는 악한 세력의 본거지로 여겨졌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28절).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탄의 권세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함으로 예수님에 대해 기선을 제압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방법이 예수님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귀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귀신을 제어하기 위한 첫 단계입니다.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대’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은 당시 로마 군대의 편제로서 보통 6000명 정도로 구성된 보병 군단이었습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평범한 단어이지만 1세기 사람들은 ‘레기온’이라는 말을 들을 때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로마 군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요 무적의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자신들을 군대로 소개하는 이유는 사탄의 막강한 파워로 무장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사로잡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이제는 쫓겨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귀신들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고 대신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이란 뜻의 형용사가 명사로 쓰여서 ‘심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저갱은 신약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데, 악한 귀신을 가두는 감옥(벧후 2:4; 유 1:6)이나 땅끝(롬 10:7)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계시록에서 ‘무저갱’은 짐승과 사탄이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지기 전에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임시로 갇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11:7; 17:8; 20:1-3). 군대 귀신이 가고 싶어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눅 8:31), 그곳은 매우 고통스러운 장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허락하셨습니다. 마가는 돼지의 수가 약 2천 마리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단지 ‘많은 돼지 떼’라고 묘사했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면서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했습니다. 출애굽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을 해하려고 홍해로 달려온 애굽 군사들이 바다에 빠져 몰살당했습니다(출 15:4-5). 마찬가지로 영적인 출애굽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 진 후 갈릴리 호수에 ‘군대’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주민들(34~37절)
돼지 떼에 일어난 일을 보고 돼지 치던 자들이 깜짝 놀라서 성내와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성내’로 번역된 ‘폴리스’는 영어로 ‘city’인데 도시를 의미합니다. ‘마을’은 도시 주변에 위치한 마을들을 말합니다. 돼지 치던 자들은 주민들에게 자기들이 본 것, 즉 귀신 들렸던 자에게 일어난 일, 돼지 떼가 바다로 치달아 몰사한 일 등을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주민들도 놀라서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고자 사건 현장에 몰려왔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과 함께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몇 시간 전에는 제자들이 광풍을 인하여 무서워 떨었는데, 이제는 동네 사람들이 돼지 떼가 몰사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의 회복된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의 말을 듣고 큰 두려움이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된 이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회복된 영혼보다 돼지 떼의 손실을 더 아까워했습니다. 차라리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기들의 돼지들만 안전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기들로부터 떠나기를 요청했습니다. 물질에의 강한 집착이 주님을 알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습니다. 물질이 그들의 주가 되었기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온전한 정신으로 회복시켜주는 예수님의 신령한 능력이 자기들의 구부러지고 그릇된 부분들을 바꿀까 두려워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 일어난 변화가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렸던 자의 반응(38~39절)
사탄의 목적은 단지 돼지들을 죽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거라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그 동네서 쫓아내었기에 그의 시도가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역을 그냥 떠나신 것이 아니라 온전해진 청년을 남겨 두셨습니다. 귀신 나간 사람은 자신을 귀신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예수님에게 자신도 함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보내시며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보냄’은 제자들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귀신의 종이었던 사람이 변하여 예수님의 제자와 증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집’은 그가 사는 집을 가리키기보다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가 과연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였을까요? 사실 귀신 나간 사람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과 더불어 지내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시는 장면이 언급됩니다. 갈릴리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는 유대인들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7병 이삼어로 이적을 행하신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 땅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방인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들었습니까? 누가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온 성내에’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큰일을 행하셨는지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하신 일이 너무나 생생했기에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한사람이 온전하게 되어 사명을 감당했더니 이방 땅에 엄청난 복음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시 갈릴리를 향하여 배를 타고 갔습니다. 지난 밤 풍랑이 있었던 바로 그 갈릴리 호수를 다시 지났습니다.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들은 제자들에게 산 교육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더 알고 더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 떼 몰사 사건의 의미
돼지 떼 몰사 사건은 귀신들렸던 자를 위한 주님의 배려와 거라사 인들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자세와 관련해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귀신들렸던 자를 구원하는 이적이 정말 일어났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돼지 떼가 몰사함으로 그는 귀신들이 자기에게서 완전히 나갔다는 것과 또한 귀신들이 다시는 자기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주민들이 가진 세속적이고 타락한 가치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짐승처럼 살던 한 불쌍한 청년이 귀신들의 무서운 속박에서 풀려난 이적을 보았으면서도 주민들은 한 사람의 회복된 영혼보다 돼지 떼의 손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보다 돼지가, 영적인 해방보다 경제가 더 중요했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실족시켜 얼마든지 돼지 같이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민들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돼지나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풍랑을 헤치고 한밤에 거라사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 지르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우리를 이 밤에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셨을까 하며 의구심을 품지 않았을 까요? 아무도 제어할 수 없어 포기했던 그 한 사람을 위해 그 밤에 풍랑을 뚫고 호수를 건너 거라사 지방까지 건너오신 것은 군대귀신에 휘둘린 청년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귀신 들렸던 청년의 회심을 계기로 하여 데가볼리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큰일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훗날 제자들이 이 사건을 떠올릴 때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이방 땅까지 가신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잃어버린 한 영혼이라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다가가시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 예수님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죄와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나 한 영혼의 구원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는 사람들조차도 세상의 강한 유혹을 인하여 알게 모르게 주님께 무관심하고 이웃에 무관심하기 쉬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 우리 삶의 터전이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일시에 무너지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돼지 떼로부터 인연을 끊게 하셔서 귀신들렸던 청년처럼 치유를 받고 온전한 정신으로 주님 앞에 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귀신들로 가득 찬 돼지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때로 낭떠러지로 몰아내십니다. 우리의 돼지 떼가 벼랑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가혹하게 느껴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과 이 땅의 기름진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도 거라사 주민들처럼 주님을 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탄의 권세에 억눌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풍랑으로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또한 거라사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동네에서 나가달라고 하여 거라사 지방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게 방해했으나 귀신 나간 자의 전도로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처럼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에서도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영혼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습니다. 귀신에 사로 잡혔던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온전하게 된 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데가볼리 전 지역을 다니며 예수님이 자기를 치유하신 역사를 전파함으로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우리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본문뿐만 아니라 뒤이어 나올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소생 사건(40~56절)의 핵심이 되는데, 이는 또한 9:1~6에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열두 제자에게 부여하는 영적 권위의 근거가 됩니다. 귀신 들린 청년은 죽은 자들과 이웃하며 비인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를 제어하던 귀신은 너무나도 강력한 군대귀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그 귀신을 제어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이방인들에게 열심히 전함으로써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사역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모습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폭풍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무서워 떨던 제자들을 풍랑에서 건지신 주님, 오랫동안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소망이 없던 청년을 온전케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신 주님,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이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주님의 능력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을 여전히 회복시키시고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기도를 인하여 주님의 능력의 손이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신앙 경주는 계속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함께 달려야 합니다. 교우들이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건강의 매인 것에서, 관계의 매인 것에서, 사역의 매인 것에서 풀리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이 누구인지 바로 알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파악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며 베푸시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영혼이라도 귀하게 여기는 구령 사역에 힘쓰면서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