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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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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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7:18~35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기득권을 놓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위협한다고 생각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으려고 합니다. 각자를 돌아봅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혈기를 부리거나 갑질하거나 근거 없는 비방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갑작스런 등장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으로 되어 있지만 John the Baptist, 즉 ‘세례자 요한’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한 강력한 메시지와 회개 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이스라엘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쉬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하니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을 괴롭히던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바짝 마른 스펀지가 물을 잘 흡수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존재도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껄끄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붙여서 무언가 흠잡을 거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의 스타일은 전혀 달랐지만 그들 모두 종교지도자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본문을 보니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이 오실 그분, 즉 메시아인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듣고 본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 후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시며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십니다. 다가올 새 시대를 알리는 요한과 예수님의 등장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배척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려면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18~20절)
약속된 메신저의 삶을 산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의심이 찾아왔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는 질문은 그의 흔들리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해들은 요한이 품었던 의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보면 그분은 능력이 많으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고”세상의 악인과 의인을 심판하실 분입니다(3:16~17). 요한이 묘사했던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들려오는 예수님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악한 세상을 끝낼 심판자를 기대했는데, 도리어 자비와 긍휼을 이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례자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불의한 핍박을 받아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로잡힌 자에게 자유를”(4:18) 주겠다고 선포하셨는데 요한은 놓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오실 그이’를 직역하면 ‘그 오실 자’입니다. ‘오실 그이’는 창세가 49:11과 하박국 2:3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사고 속에서 사용된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킵니다. 특히 신명기에서 모세가 후계자를 언급하면서 거론했던 종말론적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답변(21~23절)
예수님을 찾아온 요한의 제자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이 각종 병자와 귀신 들린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과 많은 맹인이 보게 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여기서 ‘맹인을 보게 하다’라는 말은 직역하면 맹인에게 시력을 아무런 대가없이 주셨다는 뜻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22절은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답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여섯 가지 항목 중 다섯 개는 이사야서 35:5~6과 61:1에서 종말에 임할 구원과 회복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예언되었습니다. 단지 나병환자가 깨끗해진다는 예언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기적들은 나사렛 회당 설교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실제로 행하신 것들입니다. 맹인 치유는 4:18에, 저는 자 치유는 5:17~26에, 나병환자 치유는 5:12~16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은 7:11~17에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된 말씀을 인용하셔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악한 세력을 쫓아내고, 죽음의 증상들을 치유하고,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시며, 쉼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거절한 자들을 향한 심판은 지연되었지만 그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은혜의 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 어디서든 주님을 믿기만 하면 새 생명과 새 창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답변과 더불어 누구든지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실족’은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의 동사 ‘스칸달리조’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스캔들이 파생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고전 1:23). 예수님은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지만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이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를 자멸하게 만드는 존재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믿을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24~28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열광하며 그를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메시지’에는 무관심했고, 그가 예비한 ‘메시아’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시대)에만 머물 뿐 예수님과 함께 성취된 새 시대(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났을 때, 예수님은 요한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표명하시며 그와의 연대감을 확인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예수님은 무리를 향해서 이 질문을 연달아 세 번 던지셨습니다. 처음 두 번에서는 요한이 아닌 존재를 묘사하십니다.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요단강에는 갈대가 무성했습니다. 갈대는 의지가 약해서 쉽게 변심하고 흔들리는 인물을 상징합니다. 요한이 만일 그런 인물이었다면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을 핍박한 인물은 다름 아닌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왕궁에 있는 사람’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을 던지실 때 비로소 요한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선지자자들보다 훌륭한 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할 길을 예비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대한 것은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예수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약 성경이 언급한 하나님의 전령이라고 소개하시며 말라기 3:1을 인용하십니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그런데 말라기 3:1에는 ‘네 앞에서 네 길’대신에 ‘내 앞에서 길을’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3:20에서 ‘네 앞서’라고 할 때 ‘너’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누가복음에서 ‘너’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대표이면서 하나님의 대표이므로 ‘네 길’은 이스라엘의 길이면서 하나님의 길입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큼과 작음을 함께 언급하셨습니다. 이 두 평가는 상호 모순인 것 같지만 구원 역사의 두 관점에서 볼 때 모순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라는 말씀은 구약의 관점에서 그를 본 것입니다. 그는 옛 언약의 시대에 속한 선지자로서 메시아를 보았고, 그분께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3:2)라는 말씀은 그가 구약에 속한 선지자임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표현이 신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는 구약의 모든 약속이 성취될 시대가 임박했음을 친히 목격했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옛 언약 시대에 속한 선지자이지, 언약 성취의 시대에 발을 들여 놓은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시작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며, 요한보다 크고 복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세대의 상반된 반응(29~35절)
백성과 세리들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유대적 관용어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자신에게 잘못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세대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로 알려진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 즉 종교의 주류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지를 실례로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대’즉,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는 불신의 사람들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요한과 자신을 ‘우리’라는 표현으로 함께 묶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요한이 하나님의 종말적 성취를 위해 보냄 받은 자로서, 현재 백성에 의해 함께 배척당하고 있는 공동 운명임을 드러냅니다. 백성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심판을 받아 하나님에게 배척당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피리를 부는 것은 결혼식 놀이를, 곡하는 것은 장례식 놀이를 각각 가리킵니다. 이런 놀이는 서로 반응해 주고 참여해야 재미있는 반면, 아무런 반응과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놀이는 금방 깨지고 맙니다. 이 세대의 사람이 복음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한 것을 빗대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33~34절에 비추어 보면 세례자 요한은 금식하면서 회개를 선포했기 때문에 곡하는 놀이를 한 아이에 비유되고, 예수님은 복된 소식을 전함으로써 피리 부는 놀이를 한 아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요한의 금욕적인 사역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이었고, 예수님의 축제적인 식탁 교제는 하나님 나라의 복과 잔치에 걸맞은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이 들렸다 하고,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권능도 아니었습니다. 기득권과 사회적 명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으로 비유를 마치십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그 행하신 일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모든 자녀’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자기가 행한 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뜻일 수 있고, ‘지혜이신 예수님은 그분을 알아보는 자녀들에 의해 그 정당함을 인정받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
-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전하고 예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할 것과 겸비할 것을 촉구함으로 주의 오심을 준비시켰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 교사들이 아니라 백성과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낮추어 회개의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혈통적 특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고 그분이 주시는 복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 반응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 같으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마음의 변화나 후회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깨닫고 가치관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마음에 조금 찜찜하게 생각은 하지만 살아가는데 큰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지은 우리를 본다면 우리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고 아파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애통하게 됩니다.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이미 현존해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신의 죄를 겸손히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헌신이나 선행이 아니라,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개요 주님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 받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질문을 듣고 온 그의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치유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는 메시아 예언에 대한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로써 자신을 증명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자로 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와 능력으로 함께하셔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함께하심과 만져주심으로 회복된 우리는 주의 생명의 복음과 능력으로 세상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 복음이 살아 있는 현장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예배의 자리 너머 전도와 선교, 구제 봉사와 섬김의 자리에서 주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전도는 미련해 보이나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전도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됩니다.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이렇게 죄를 깨달은 사람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도록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마지막 말씀으로 명하신 일은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 28:19-20; 행 1:8). 우리는 모두 복음의 빚진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가 맞는지 묻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상이 변화되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부름 받고 회복을 경험한 우리는 주의 생명의 복음과 능력으로 세상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주님의 오심을 예비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워진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위대한 선구자이지만, 우리는 그가 보지 못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기에 그보다 더 영광스럽습니다. 세상에는 회개와 천국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도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복음 전파자를 비난하는 완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도 받지 않았고 예수님이 전한 복음도 듣지 않았습니다. 울어야(회개) 할 때 울지 않았고 웃어야(죄 사함) 할 때 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종교적 행위나 선행을 자랑하는 자는 결코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 말씀대로 순종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무감각과 무반응, 무관심의 세대 속에서 우리도 죄와 은혜, 말씀과 공동체에 대해 점점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 받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며 준비했듯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 주님이 정하시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