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들

Author
Date
2025-08-21 21:13
Views
344
성경구절 : 눅 7:1~17


치유라는 말 자체가 매력적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단어입니다. 한국 관광지를 소개하는 팸플릿을 보면 치유의 숲길, 힐링의 최적지 등의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그만큼 치유라는 주제가 현대인들에게 중요하고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치유가 필요한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아픈 데가 많습니다. 사람은 매우 강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한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사고나 질병, 폭력, 관계의 단절 등으로 몸과 마음과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자신의 건강, 자신의 성공,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치유와 쉼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줍니다. 6장에서 예수님은 평지 설교를 통하여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주린 자/우는 자/미움을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애통해하며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이웃을 사랑하라/주의 말을 듣고 행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주일 설교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6:32~49을 보면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말과 행실이 우리의 생각과 인격, 신앙의 어떠함을 드러낸다고 하십니다. 말과 행동을 아무리 그럴 듯하게 할지라도 그 사람의 됨됨이와 마음의 실상까지 감추거나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과 행동이,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만큼 위선적이고 위태로운 신앙은 없다고 하시며, 그것은 자신과 주님을 기만하는 것이며, 주추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는 많은 말이 아니라 진실한 순종으로 주를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7장을 보니 예수님은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시며 열매 맺는 삶의 본을 보이십니다. 혈통적으로, 사회적으로 율법적으로 소외당하던 이방인(1~10절), 과부(11~17절), 죄를 지은 여인(36~50절)에게 자비의 손을 내미십니다. 세상이 거절하고 밀어낸 소외의 자리에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서 보여 준 신앙, 곧 오직 그분의 말씀만 듣고 이에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통해 요구하신 천국 백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나인 성 과부에게 다가가셔서 그녀를 위로하시고 그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죄로 죽어 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리십니다.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의 칭찬을 듣고 나인 성 과부처럼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알고 실천하면서 때를 따라 주님의 자비를 받고 누리시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의 치유를 요청한 백부장(1~5절)
예수님이 평지설교를 마치시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로마 속주 갈릴리의 북쪽 국경에 가까웠으므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놀라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백부장인데, 그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6에 의하면 그 종이 중풍에 걸렸다고 합니다. 1세기 로마 제국에서 종은 인간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종은 그저 살아있는 소유물에 불과했기에 주인은 종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사랑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귀하게 여기는’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일개 종이지만, 백부장은 그 종까지도 인격적으로 대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종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 자신의 종을 고쳐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인 간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그가 유대인과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결정하는 유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일반 로마 군인들과 달리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유대 사회를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을 받았을 때 장로들은 마치 자기들 일처럼 예수님을 찾아와 종의 치유를 간청했습니다. 백부장은 참으로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을 존중하고 유대교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도‘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만류한 백부장(6~8절)
예수님께서 단지 유대인 장로들의 간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백부장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시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전합니다. 이는 유대인이신 예수님이 이방인 집에 출입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하실 것을 염려한 배려입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에서 ‘주’는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이나 자기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감당할 수 없다’은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 장로들이 힘주어 말한 것은 He is worthy, 합당하다고 했는데 백부장은 I am not worthy, 자신이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고, 또 그분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지금까지 예수님은 자기에게 온 병자들을 직접 손을 대시거나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며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이 멀리서 명령만 하셔도 충분히 권능을 나타내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군대의 명령 체계를 언급하며 자신의 요청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동시에 상관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권위 아래에 있는 어떤 병사에게 가라고 하면 그가 가고, 다른 병사에게 오라고 하면 그가 오며, 종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면 그가 행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휘하에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면 그들이 그대로 행하는데, ‘주님’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면 안 될 일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친구들을 통해 전한 말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아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9~10절)
백부장은 병들어 죽게 된 종을 낫게 하는 데에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리적인 거리도 초월해서 역사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말씀의 권위를 믿은 백부장을 예수님은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놀라움’은 유쾌한 놀라움 혹은 감탄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의 선행을 칭찬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고백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이스라엘 중에서도’라는 표현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기대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물론 백부장에 대한 칭찬이 이스라엘의 믿음에 대한 비판을 암시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중 믿은 사람이 처음 믿은 사람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격려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백부장이 고백한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었음을 확증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단지 종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방인에도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순수하고 온전한 믿음이 위대한 역사의 장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주님과 사람들을 감동시켜 많은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11~17절)
본문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이방인 남자인 백부장에 이어 유대인 여자인 과부를 찾아가 자비를 베푸시는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 사가랴(1:68,78)가 선포한 바 있는 ‘하나님의 임하심’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특히 이 기사는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왕상 17:8~24)과 매우 정교하게 병행을 이룹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영적인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더욱 왕성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와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 성으로 향하셨습니다. 그곳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을 만나셨습니다. 죽은 사람은 한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당시에 과부로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유일한 희망이던 아들마저 잃었으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백부장의 경우에는 그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섰지만 나인 성 과부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3절) 하며 누가는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에게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에게 더 큰 기대를 갖게 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서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시체가 있는 관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일이지만(민 19:11,16),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요,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다스리는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병자들에게(4:40, 5:13) 손을 대셨는데, 이제 죽은 자에게도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 손은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명하시니 그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그가 살아났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다시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신 사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눈앞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자연스런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일어났다’는 말이 수동태로 나타난 것은 이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소문은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죽음을 몰아내시고 생명을 회복하신 사건은 장차 그분이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을 예표합니다.

우리의 자세
- 공감해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깊이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깊이 닿을 수 있는 공감 능력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아주 필요합니다. 백부장에게는 병들어 죽어 가는 종이 있었습니다. 당시 종들은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이 백부장은 종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종이 병에 들자 그의 치료를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나인 성 과부는 남편이 없는 탓에 큰 슬픔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외아들의 죽음으로 여인의 미래에는 더 큰 절망과 외로움이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이 겪었던 아픔과 겪게 될 고통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다가가셨고 죽은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인정받는다는 느낌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라 서로 돕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감동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 다른 사람에 대한 애통함은 치유와 기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을 향해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돌아보며 공감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 치유를 간구해야 합니다.
-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에 가셔서 종의 머리에 안수하심으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응답해주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가 감히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간구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는 백부장의 고백은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은 뒤 “주여 나를 떠나소서”(5:8)라고 고백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백부장이란 지위에 오르기까지 그는 오랜 군대 생활을 통하여 권위에 익숙한 자였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명령을 하면 순종해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 아래 있지 않은 분이시며, 질병을 치유할 권세도 가진 분임을 고백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 한계,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그런 겸손의 자세가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자격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늘 우리의 곁에 머물 것입니다.
-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드러나셨습니까? 가르치는 권세, 병 고치는 권세, 귀신 쫓는 권세,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본문을 보니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가 추가됩니다. 이것들을 온전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으로 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믿음대로 종의 병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닥쳐와도 주님 안에 있음을 믿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일상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주님께 달려갈 이유가 됩니다. 천국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으며 그분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줄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한다고 응답이 언제나 바로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더딜 때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이 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생명의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게 합니다. 우리도 백부장의 모습을 본받아 겸손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신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4:18) 그리고 제자들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대하는 일에 있어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6:36). 본문은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시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역을 통해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던 민족적, 정치적, 군사적 왕의 모습이 아니라,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들(이방인, 과부)을 외면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시며 구원하시는 구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던 당시에 이방인인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인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병든 종을 향한 긍휼과 압제받는 민족을 향한 호의, 주 앞에서 보인 겸손과 믿음, 이 같은 이방인 백부장의 신앙과 삶은 ‘참 신앙’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의 삶은 훗날 주님으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겨자씨만한 믿음도 좋게 보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든든한 격려와 지원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스토리는 예수님이 단지 죽은 청년을 살리고 슬픔에 빠져 있던 외로운 여인을 위로한 사건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죽은 자를 살리는 신적 권세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전통을 성취하시고, 종말의 시대에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시선과 언어, 동작 하나하나에서 따뜻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참빛과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소망과 기쁨과 능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만을 듣고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감이 생겼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도 직접 눈으로 주님을 보지도 못하고,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다. 소문보다도 더 확실한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며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위하여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십니까? 겸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굳게 믿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전달하는 전달자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소외된 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경험하며 주님을 높이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