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천국 백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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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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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6:27~38


탈북자인 이순옥 집사가 20여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후 국정원 직원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을 죽이고 행복하던 자기 가정을 파탄으로 이끈 그 인간들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데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면서 믿음을 갖기까지 갈등을 많이 겪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인간’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 힘든 대상이 원수일 것입니다. 원수란 나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나지 말아야 할 대상이고, 만일 만난다 해도 복수하거나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 줘야 할 대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지에 서서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 즉 가난한 자들에게 복되다고 선포했고, 하나님에게 냉담한 부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평소에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던 말씀들입니다. 천국 백성으로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말씀대로 살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훗날 주님 앞에 설 때 칭찬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 사랑의 원칙과 구체적 실천(27~31절)
‘너희 듣는 자’라는 문구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과 유사한 것으로, 주의 깊게 경청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내용 전개상 27절에서 시작해서 35절에서 끝납니다. 이 단락의 화두는 원수 사랑입니다. 명령의 대상이 처음에는 ‘너희’(27~28절)였다가 ‘너’(29~30절)로 바뀌고, 다시 ‘너희’(31절)로 돌아옵니다. ‘너희’는 공동체를 가리키고, ‘너’는 개인을 가리킵니다. 27~28절에서 ‘너희’를 향해 주시는 명령은 네 가지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첫째 명령은 대원칙을 제시한 셈이고, 이어지는 세 가지 명령은 원수 사랑의 실천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네 문장은 동일한 주제를 말하고 있으므로 ‘원수’는 곧 ‘너희를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22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백성, 즉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24~25절에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 저주, 모욕에 자주 노출되었습니다. 미움, 저주, 모욕이 ‘너희’를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 간의 대립이나 다툼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가 사회로부터 핍박당하는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첫째,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대, 즉 잘해 주는 것입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받아치면 미움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미움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둘째,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분노와 갈등을 겪으며 밤을 새우며 괴로워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주를 저주로 받아치면 서로 망하게 되지만,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면 살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욕한다는 말은 단순한 욕을 포함해서 인격 모독과 생명 위협 등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사랑하라, 선대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라는 네 개의 동사는 원수에 대해 선을 추구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실질적인 진정성이 담겨진 적극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행위입니다(신 32:25; 롬 12:19). 29~30절에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언급됩니다. 원수들은 단지 말로 괴롭히는 데 그치지 않고 뺨을 치는 폭력도 가합니다. 마태복음에 ‘뺨을 치는 일’과 관련해 구체적인 진술(마 7:39)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교해 보면 ‘이 뺨’은 오른 뺨에 해당하고 다시 돌려댄 ‘저 뺨’은 왼쪽 뺨을 의미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뺨을 때리는 행위는 큰 모욕을 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른손으로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손등으로 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며 이 행위는 최고의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때 원수를 선대하는 방법은 같이 그의 뺨을 치며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 뺨까지 돌려 대는 것입니다. 원수는 겉옷을 빼앗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겉옷을 빼앗는 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의적으로 징발권을 행사한 로마 군인을 가리킵니다. 그럴 때 그를 선대하는 방법은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원수에 대해 포기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고, 강제로 빼앗은 자에게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31절은 27~30절에서 가르치신 제자의 삶을 규정하는 대원칙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구약 성경의 핵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 황금률은 원수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상호 호혜의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고,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는 특징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을 반영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마음이며, ‘자신과 같이’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대로, 당한 대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받은 대로가 하니라, 받고자 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은 것’아니라 ‘받고자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해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은 사랑(32~36절)
32~34절에 나오는 세 쌍의 질문과 문장은 황금률을 심화, 실천하는 방법을 말해 줍니다. 황금률은 내가 받고자 하는 만큼, 혹은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는 예의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자기를 선대하는 자만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도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궁색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꾸어 줌’은 사랑과 선대와 마찬가지로 자선과 자비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이 세 구절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칭찬’으로 번역된 명사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은혜’로 표현하셨습니다. 35절은 32~34절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오직’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러나’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접속사를 사용한 것은 주고받기 원칙을 뛰어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나에게 사랑과 선대를 베푼 적이 없는 낯선 사람뿐 아니라 원수에게까지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는 가르침은 빚이 탕감되는 면제년이 다가와도 돌려받기를 포기하고 빌려주라고 명한 신명기 15:10과 관련됩니다. 이 신명기 명령은 이방인에게 빌려주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지만(신 15:3), 예수님은 제자들을 박해하는 죄인에게까지 그렇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구약 율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큰 ‘상’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상은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자비를 경험하여 회복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나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 준 사람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운 분들이 계십니까?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 안에 담긴 하나님 사랑의 놀라운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이웃 사랑(37~38절)
예수님은 비판(판단)도, 정죄도 말고 용서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세 동사 ‘비판하다’, ‘정죄하다’, ‘용서하다’에 대한 생략된 목적어는 ‘원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할 행동은 원수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종교인, 특히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현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기능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기능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허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은 잘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남에게 끼친 해는 생각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남으로부터 받은 해는 잘 기억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상대를 비판하는 기준이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남을 평가하는 기준과 그 기준으로 내린 판결이 그대로 자신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쉽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다’, ‘정죄 받다’, ‘용서받다 는 모두 신적수동태로,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이심을 암시합니다. 형제를 용서해주지 않고 심판하면, 그 심판 때문에 우리도 마지막 날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약 2:13). 우리도 용서받은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요 14:4).
우리도 비판받고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대로 행하라는 하늘 아버지의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원수뿐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도 실행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분위기가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일은 결국 너그러움, 베풀고 나누는 넉넉한 마음과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주라’고 명하시며 ‘너희가 재는 되로 너희에게 재어 줄 것이다’라는 유대인의 속담을 인용하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재는 기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재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너그럽게 큰되로 퍼서 후하게 주면, 아버지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갚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풍성한 갚아 주심은 “너희 상이 클 것이요”라는 약속과 일치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동에 대한 결과를 즉각적으로 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지금 당장 눈앞만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당장은 손해보고 피곤하게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갚으실 것을 믿으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기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 백성이 사는 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 원수를 사랑하라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사랑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라는 말 속에는 개인과 공동체에 박해를 가하는 모든 세력이 다 포함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랑을 십자가에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듯이 우리도 행해야 우리가 천국 백성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자신을 버리는 오랜 훈련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 속에 예수님의 공동체가 갖는 영적 위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의 공동체를 핍박하는 일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적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대적에게 그대로 갚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손해를 감수하며, 대접받고자 하는 그대로 상대방을 대접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만, 실제 이 방법으로 교회는 로마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사랑과 축복이 세상을 이기는 필승의 무기입니다.
- 남을 먼저 대접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인간관계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이는 랍비 힐렐이 율법의 요약이라며 말했다고 하는 ‘남에게 당하기 싫은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긍정문으로 바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접을 하고 나면 당장 대접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기대한 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 백성은 조건 없이 베풀고 하나님께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법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실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게 원수인 사람이 하나님께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자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까지 이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 자비를 실천하기 원하십니다. 물론 자비를 베푸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도덕이나 법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원수에게 분노하고 보복하려 합니까?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죄인을 위해 아들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는 오직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탄뿐입니다.
- 남을 비판하지 말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이러한 특성을 아시고는 잘못된 태도를 버릴 것을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받고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인해 용서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은혜를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카로운 비판력이 아니라 거룩한 분별력을 갖기 원하십니다. 판단은 영혼과 공동체를 무너뜨리지만, 분별은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론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선택해야 할 결론 역시 사랑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허물이나 약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자신의 허물과 약점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의 모든 윤리적 가르침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라는 자의식 위에서 성립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친히 그 가르침대로 사셨음을 기억하면서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제자도의 기본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고,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며, 대가 없이 꾸어 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처럼 자비롭고, 비판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이 불가능하게 보이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사랑의 방식을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신앙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의 의도를 지혜롭게 파악해야 합니다. 종교적 핍박이 아닌 범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생명과 신체에 위험을 느끼는 경우에 자기 방어를 할 수 있습니까? 사회의 악을 제어하고 불평등을 교정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1세기 박해가 예상되는 로마 제국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자들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받으며 살아 왔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나누고 베풀고 포기하고 용서할 때 다른 누군가가 우리에게 나누고 베풀고 용서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칭찬하시고 상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일 것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은 결국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천국 백성의 위엄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의 법을 따라 살아갈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특히 언어생활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말과 감사하는 말과 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을 황폐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말인 비방, 조롱, 멸시하는 말과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 인정해 주는 말을 하면서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이루어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라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삶, 약속된 복을 받고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