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열두 사도와 하나님 나라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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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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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6:12~26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은 공동체를 갈구합니다. 공동체가 영어로 community인데 ‘com’과 ‘unity’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com은‘같이, 더불어’, unity는 ‘하나됨’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개별적인 인간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공동체 형성을 효율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본 단위가 소그룹입니다. 우리 교회 같으면 목장이 대표적인 소그룹입니다. 목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삶을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섬기는 성숙한 성도들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열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소그룹을 통하여 인류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성격이 급한 사람, 이념이 다른 사람,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헌신된 제자들로 길러내셨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제자들 중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평지로 내려오셔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소위 평지설교(20~49절)를 하십니다. 산상수훈을 영어로 ‘sermon on the mount’라고 하는데 평지설교는 ‘sermon in the plain’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세 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20~26절은 첫 번째 단락으로 산상수훈의 팔복과 유사하게 ‘사복사화’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왜 부르시는지, 어떤 사람들을 부르시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모두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자, 복 받고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열두 사도의 선택(12~13절)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택하시기 전에 밤새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기도로 온 밤을 보내시고’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명령하시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기도’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기도하신다’라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관하신 기도라는 뜻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신 것은 열둘을 세우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은 후 예수님은 열둘보다 더 많은 수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중에서 열둘을 택해 ‘사도’라고 칭하십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왜 ‘제자’와 ‘사도’를 구분해서 사용할까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해서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내심을 받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3:13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를 부르셨다는 것은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주님을 선택하고 따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제자들은 주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으며 그들의 삶의 여정도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오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 왔다는 것은 제자들의 결단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초점을 둡니다. “나아오다”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떠나오다’가 됩니다. 제자가 되려면 과거의 삶과 결별하여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전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자기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으로(마 6:33)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명단이 제시된 마가복음의 병행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셔서 따로 세우신 목적이 나옵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막 3:14~15).
-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함입니다(to be with him)
제자들은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사역을 배우고 가장 훌륭한 mentor가 되시는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 제자들을 보내기 위함입니다(to send them)
제자들은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의미에서 그들을 ‘사도’라 부릅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전에 해보지 못한 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제자들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전도하다’로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선포하다’입니다. 예수님의 사자가 되어 왕의 소식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둘은 예수님의 메신저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쳐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명단(14~16절)
선택받은 제자들의 명단이 신약 성경에 네 번 나옵니다: 막 3:16-19; 마 10:2-4; 눅 6:14-16; 행 1:13. 열둘은 이스라엘의 지파 수인 열둘을 연상시키므로,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세우심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회복하시려는 계획을 암시합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이루어지지만 영적 새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열두 제자를 세우신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명단에 베드로의 이름이 언제나 먼저 등장합니다. 시몬에게는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란 이름이 더해집니다. 요한복음 1:41에 의하면 베드로는 안드레의 권유를 받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는 그리시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 16:16)라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셨을 때 성령 충만함 받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앞세워 기록한 반면, 누가는 시몬 베드로에 이어 그의 동생 안드레를 언급합니다. 안드레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시몬 베드로와 함께 이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5:10). 그들에게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을 가진 보아너게라는 이름이 더해집니다. 그들이 질투심과 명예욕이 강하고 다혈질인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을 지날 때,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흥분하여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제안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하였고 요한은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면서 온갖 박해와 수난을 겪었습니다.

빌립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최초로 부름을 받은 제자 중에 속합니다(요 1:43). 그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려 하실 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나이다”(요 6:7)라고 하며, 믿음보다 자기의 경험을 앞세우는 계산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빌립은 요한복음에는 세 차례 등장하나, 공관복음에는 12제자의 명단에만 나옵니다. 그는 베드로, 안드레와 같은 동네 출신입니다. 바돌로매는 갈릴리 가나 사람으로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처음 보셨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시면서 그의 신실하심을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자로 알려져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멀리서 바라보던 자로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합니다(막 15:40). 누가가 열 번째로 기록한 ‘셀롯이라는 시몬’은 마태, 마가가 열한 번째로 기록한 ‘가나나인 시몬’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나나인’이란 단어는 지역 이름이 아니라 ‘셀롯’(눅 6:15)에 해당하는 아람어입니다. ‘셀롯’은 예수님 당시에는 ‘열심당원’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지만,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열심당원’이라는 뜻의 전문용어였을 것입니다. 아마 시몬이 열심당원과 같은 종류의 혁명 운동의 추종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 중에 로마 제국에 협조하는 세리 출신 마태와 로마 제국에 반대하여 투쟁하고자 하는 시몬이 있었음은 예수님이 양극단을 포용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마태와 마가의 복음서에 기록된 ‘다대오’는 누가가 열한 번째로 기록한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상응하는 이름으로 보입니다. 그가 어떤 사역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대오가 주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세 복음서 모두 가룟 유다의 이름이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가룟’이 유다 자손이 기업으로 얻은 에돔 경계에 인접한 성읍을 가리키는 것이 맞는다면 그는 유다 지파 사람으로 유일하게 비갈릴리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예수를 파는 자 될’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기를 팔 자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찬양’인데 그가 제자 사역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탐욕의 노예가 되어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로 생을 마치면서 ‘예수를 파는 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17~19절)
예수님이 열두 사도와 함께 평지로 내려오셨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제자와 더불어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장소에 모인 것이 이례적입니다. 시돈 지역은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신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를 상기시킵니다(4:26). 각지에서 모여든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병자들은 병 고침을 받았고, ‘더러운 귀신’으로 고통 하던 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썼는데, 누가는 그 이유를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고 언급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 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의 진정한 접촉을 원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치유의 능력이 모든 사람을 낫게 했다는 언급을 통해 누가는 예수님의 회복 사역이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암시합니다. 평지에서의 치유는 산에서 드린 기도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사역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의 선언(20~23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무리와 제자들이 대상이지만(5:1~2), 본문의 평지설교는 제자들이 대상입니다. 평지 설교는 ‘복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복은 받을 자가 원해서 얻는 것이라기보다, 주고자 하는 사람이 줄 만한 자를 보고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은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깃든다는 뜻으로, 만사형통, 무병장수, 부귀영화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바라보심, 기억하심, 인정해 주심, 돌보심이 곧 ‘복’입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복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주님이 간절히 필요했기에 주님을 원했고, 주님을 원했기에 주님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가난하다고 표현하였을 때 (시 40:17; 86:1), ‘겸손하다’‘하나님만을 의지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에 의해 실현될 모든 복을 포괄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복 선언이 ‘지금’이라는 부사로 시작하면서 좀 더 실감나고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주린 자’와 ‘우는 자’의 상태도 ‘가난한 자’의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과 주림은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는 구약적 약속을 반영합니다. 그것은 종말적 잔치를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넷째 복의 선언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박해를 다룹니다. 박해는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인한 것이기에 환난 받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박해는 그들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요, 그들에게 상(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주님의 길을 제대로 따라가면서도 아무런 고난이 없다면 도리어 이상히 여겨야 합니다.

화의 선언(24~26절)
예수님이 선언하신 네 가지 화의 대상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풍요와 만족과 평안 때문에 자신의 영적인 빈곤과 굶주림과 가련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의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인정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바리새인들도 여기에 해당됩니다(16:14~15). 여기서 ‘부요한 자’는 경제적 부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세력도 포함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배부른 자’, ‘웃는 자’도 ‘부요한 자’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림과 애통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야말로 위험신호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현재의 상황을 불안하게 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 바른 말을 한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며, 예수님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믿음 때문에 무시를 당하거나 소외를 당하는 것 또한 제자가 당연히 자신의 몫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재물을 갖지 말고, 먹지 말고, 웃지도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안락하고 평안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를 호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마 25:24~3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분명하게 선택하게 하고, 그대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 좁은 길을 갈 때, 주님이 함께하시는 복이 있고 그 길 끝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닮으려 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어떤 인물들인가 보다 그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제자들의 배경이나 출신을 살펴보면 세상적으로 볼 때 평범하고 보잘것없고 허물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 어부들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습니다. 넉넉한 자도 있었고 가난한 자도 있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거나 강한 의지의 소유자도 있었습니다. 로마를 위하여 일하면서 민족의 배반자라고 미움을 받던 사람도 있었고 로마의 압제에 무력으로 대항하려는 운동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한 자도 있었고, 다대오 같이 별로 언급이 되지 않는 희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께 나왔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택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헌신했습니다. 우리 또한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부족한 자를 불러 주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크고 작은 선택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에 기도하시지 않고 선택하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선택이 일치하도록 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열두 제자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는 참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이 각자에게, 가정과 직장에, 가는 모든 곳곳에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각지에서 몰려 온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에게 사복사화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무슨 말씀입니까? 심령의 가난함이든 물질의 가난함이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그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라면 주님처럼 땅의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소수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프고 미움 받고 공격당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주님의 복을 누릴 수 있음을 믿으며, 자신들이 세상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기뻐 뛸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 다른 질서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주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율법과 안식일을 새롭게 규정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새 이스라엘의 초석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열두 사도를 택하셨습니다. 출신과 직업이 다르고 기질과 관심사도 달랐지만, 주님께 ‘부름’을 받고 또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세상에서 부름 받고 세상으로 보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평지 설교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 그리고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이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는 자들이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복들은 현재적이면서도 또한 미래적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은 장차 누리게 될 완전한 복의 증표가 됩니다. 부를 복으로, 힘을 의로 여기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열두 사도와 그들의 뒤를 잇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왔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요, 특권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날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모세도 시 90편을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여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를 판 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동참한 성도들에게는 ‘영혼을 구원한 자’‘주님을 기쁘시게 한 자’등등의 아름다운 타이틀이 붙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 앞에 어떤 타이틀이 붙여지기 원하십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