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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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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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월은 휴가철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내어 들로 산으로 바다로 놀러갑니다. 세상과 일에 지치고 피곤한 삶의 현장을 잠시 떠나 재충전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의 사전적 의미는 휴식 또는 쉼입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하면 삶의 의욕도 높아지고 건강도 좋아지고 일의 능률도 오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일주일에 하루를 쉬도록 안식일을 정하셨습니다(출 20:8-11). 이 안식일이 신약시대를 지나면서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안식일은 옛 창조가 마쳤음을 가리키는 일주일중 마지막 날입니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기억하는 일주일 중 첫날입니다. 안식일은 율법과 관련된 날이요,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날입니다. 초대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의 첫날에 모였습니다(행 20:7, 고전 16:1-2).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 할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과 더불어 타협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을 것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어난 두 사건을 통하여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을 선포하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일이 기다려집니까? 직업상 주일에 문을 열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주중에는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데 주일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나서 남은 시간에 밀린 일을 하고 취미를 즐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의 이해를 뛰어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밝혀 주시며 안식일을 정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회복하십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과 관련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안식일의 의미를 바로 알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만이 주시는 참된 쉼을 누리시고 나누시기 바랍니다.
안식일 추수 논쟁(1~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나가십니다.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은 안식일 전날에 안식일에 먹을 양식을 예비해 두고 예비 된 그 장소에서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마태복음 12:1에 의하면 제자들이 시장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시장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집을 떠나 여행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 전도하러 다니던 중에 그곳을 지나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행동을 추수행위로 규정하고 안식일을 어겼다고 정죄합니다. 신명기 23:24~25에 의하면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지만 많이 갖기 위해 그릇에 담지는 말라고 합니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가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되지만 많이 거두기 위해 낫을 사용하지는 말라고 합니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제자들이 규례를 어긴 경우 그들의 스승을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에 대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출 20:8~11에 의하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는데 어떠한 일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미쉬나라는 구전법을 통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39가지를 정해 놓았습니다. 씨 뿌리는 일, 밭가는 일, 수확, 타작, 떡을 반죽하는 것, 빵을 굽는 것, 사냥, 글씨 쓰는 일, 물건 나르는 일 등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려는 열심 때문에 다양한 규정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돈이 있고 한가한 사람들에게야 법조문을 따질 시간이 있지만 당장 생계를 걱정하는 일반 서민들에게 규정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은 사치스럽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규정을 불이행으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의 제기에 대해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성경 인용은 종교 지도자들보다 우월한 그분의 지식과 성경 해석의 권위를 보여 주며, 동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무지와 보지 못함을 폭로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무엘상 21:1~6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을 가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일반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떡은 없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준비했던 거룩한 떡만 있었습니다. 레 24:8~9에 의하면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라고 규정되었습니다.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도록 구별된 떡이었으나 아히멜렉은 그 떡을 배고픈 다윗에게 주었고 다윗은 자기와 함께한 무리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진설병을 먹은 것을 인해 정죄 받지 않았던 것을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의 행동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에는 다윗과 같은 이에게 그런 예외적인 일이 허락되었다면 다윗이 바라보았고 다윗보다 뛰어난 메시아이신 자신에게는 얼마나 더 가능하겠느냐는 논리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낡은 부대가 새 포도주를 담아낼 수 없듯이(5:37) 예수님이 가져온 새 시대의 안식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제자들의 행동을 트집 잡고 비난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일의 진짜 주인이라는 선언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의 ‘자구’에만 갇힌 채 안식일의 참 의미를 몰랐을 뿐 아니라, 안식일의 목적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래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레 23:3).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인자(5:24)로서,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줄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십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정체성 선언 앞에 한 문장이 더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폐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맥락에서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기보다 창조의 완료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거룩하게 하다’는 히브리 동사 ‘카다쉬’는 본래 ‘구별하여 분리시킨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처럼 노동을 쉬고 휴식함으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날을 복되게 한다는 것은 그 날로 인해 혜택을 입는 인간에게 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심으로써 훼손된 안식일의 의미를 회복시키십니다. 또한 안식일을 보편적인 인간의 차원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안식일을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한 유대교의 주장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사회적 약자를 포함해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출 20:8~11; 마 22:36~37)는 의도가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를 창조의 맥락에서 언급하신 것은 예수님이 종말론적 새 질서를 가져오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의 핵심이 ‘날 지킴’에 있지 않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림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식적 신앙, 문자적 신앙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 치유 논쟁(6~11절)
6~11절은 5:17부터 시작된 논쟁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거기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회당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을 데려다 놓았는지, 마침 그 자리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생명이 위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식일에 하는 사소한 치료행위도 금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담이 무너져 어떤 사람이 깔렸으면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았으면 깔린 데서 구조할 수 있었으나 부러지거나 다친 것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깔린 사람이 죽었으면 다음날까지 시체를 치우지 않았습니다. 치우는 것을 일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자세는 융통성이 없이 아주 경직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뚤어진 시선은 ‘엿보다’라는 단어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을 고발할 수단으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은밀한 생각을 아시고 안식일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에게 “한 가운데 서라”고 명령하십니다. 손 마른 자의 안타까운 상태를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그것이 옳으냐를 묻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예상치 않은 질문에 그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당연히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대답하면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그들은 잠잠합니다. 마가복음 3:5에 의하면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에 탄식하시고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고 합니다. 진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것이 가증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에 개의치 않았으나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과 언제나 함께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도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공감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내밀다’는 동사는 평소 뻗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힘껏 뻗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마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빛이 있으라’(창 1:3)라고 명하셨을 때 빛이 생겨난 창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대인들도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에라도 목숨을 구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은 위급한 환자는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위독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안식일에 허용된다면 생명의 충만함과 온전함을 손상시킨 질병이나 상처를 치유하는 일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신 것은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 노기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놓고 의논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 부분과 병행되는 마가복음 3:6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기다가 헤롯당이라는 또 다른 그룹이 등장함으로써 예수님과 적대자들 간의 갈등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당은 헤롯왕을 지지하는 정치적인 유대인 집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원수로 여기던 헤롯당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를 고집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실천하셨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안식일 논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의 권위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써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안식일의 참 의도를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오그라든 인간의 몸과 영혼을 온전케 하고, 탐욕에 찌든 인간을 구원하여 참 안식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되고 온전한 안식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왕이십니다. 안식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심으로 안식을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을 지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쉼을 누려야 합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
- 주님과 함께 하는 날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참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안식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6일간의 창조와 7일째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게 만드는 ‘노동’의 고단함과 번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놀고 하루 쉬는 삶을 살 때 안식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노동이 건전할 때 제대로 된 쉼을 가질 수 있습니다. 6일 동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한다면 7일째에 제대로 된 쉼을 갖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감동과 의미가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손을 놓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도,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이런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있던 손 마른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의 손을 내밀자 깨끗이 나았습니다. 주님은 예배의 자리에 나온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기 인생이 오그라들면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치유되어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나와야 치유를 받습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예배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근본 가치를 외면하고 형식적 의식주의에 몰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아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날임을 보이시며 그들의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을 간접적으로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의 고통에는 눈을 감았고,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은 죽이려 했습니다. ‘나’만을 아는 삶에서 떠나 소외와 고통 중에 있는 ‘남’을 돌아보고, ‘주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 때 참 안식을 ‘함께’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참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모르고 소위 율법이라는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근거하여 판단했습니다. 이런 신앙 때문에 은혜의 깊은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전통이나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낡은 부대 속에 새 포도주를 넣으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전통이나 관습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안식은 쉼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쉬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쉬는 날과 노는 날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쉼은 회복입니다. 노는 것은 즐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라고 안식일을 주셨지 그저 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쉼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있던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손의 회복과 아울러 삶이 회복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손 마른 사람이 낫고 안 낫고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손 마른 사람은 그저 예수를 고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해야 하는 안식일에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분노하고 예수를 죽이려는 악을 행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에 이루어져야 할 것은 생명의 치유와 쉼의 회복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쉼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과의 거룩한 교제와 지체들과의 친밀한 사귐, 그리고 이웃을 향한 따뜻한 섬김에서 약속된 생명과 쉼을 누려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잘못된 가치와 뒤틀린 신앙, 주님을 향한 불신이 있는 한 참된 기쁨과 안식은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안식일의 정신을 회복하여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성도가 누리게 되는 안식의 한 부분입니다. 주일은 안식을 맛보며 장차 임할 완전한 안식을 바라보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자신을 믿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일에 돈을 쓰느냐 일을 하느냐를 따지기보다 주님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는 비결을 알고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병든 손을 고쳐주시고 피곤한 손을 강건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영원한 참된 안식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이 귀한 주일에 주안에서 영육 간에 쉼을 얻으며 평강을 얻고 주의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