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여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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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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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까지 전 세계 시계시장은 스위스가 주도했습니다. 몇 백 년의 전통을 쌓아 오면서 시계 하면 스위스 시계라 할 정도로 정확성과 내구성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스위스 과학자들이 쿼츠 시계, 즉 전자식시계를 개발하여서 자국의 시계업자들에게 선을 보였는데 태엽도 없는 시계가 무슨 시계냐 하며 무시를 당했습니다. 자국의 시계업계의 반응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특허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업체들이 전자식시계의 시장 가능성을 깨닫고 기술적으로 더 개발하여 실용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첫 양산제품이 1969년에 나온 세이코의 아스트론이었습니다. 전자식시계가 기존의 기계식시계보다 값도 훨씬 싸고 시간도 더 정확한 것이 알려지자 그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특허신청 안한 것을 후회하며 뒤늦게 스위스도 전자식시계 생산에 뛰어 들었으나 이미 주도권은 일본에 빼앗긴 뒤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과거의 올렸던 업적이나 전통에 집착하여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뒤로 처질 뿐 아니라 심지어 도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디지털 시대, 포스트 팬데믹 시대, AI 시대하면서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데 교회가 그 변화에 대처할 안목을 가지고 지혜롭게 나아가지 못한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산위의 도성으로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은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린 대로 5:17~6:11은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죄인을 보는 관점이나 율법을 이해하는 관점에 차이가 많다 보니,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 율법주의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로부터 촉발된 논쟁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과 연결되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새 시대를 여신 주님과 어떻게 하면 호흡을 맞출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레위를 부르시는 예수님(27~28절)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레위를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마태와 동일시합니다(9:9; 10:3).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영토와 빌립이 다스리던 영토 사이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레위는 아마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치하에서 일했던 관세청 세리로 보입니다. 당시 세리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과도하게 세금을 거두어 그 중의 일부를 자기 몫으로 챙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과 돈거래를 하기 때문에 정결법상으로도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될 수도 없었고 회당에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가족과도 사귀기를 꺼려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역시 다른 세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라’는 현재명령형이니 계속해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따르니라’가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으니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상태임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와 그 동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죄인 취급당하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예수님에 의해 건설되는 하나님 나라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차별 없는 은혜 때문에 우리가 부름 받았으니, 우리도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차별 없이 이 사랑을 실천하고 전해야 합니다.
식탁 교제에 대한 문제 제기와 예수님의 답변(29~32절)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이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이면서 동료 세리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레위와 예수님만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제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시빗거리를 찾았습니다. 여기서“죄인들”이라 함은 도둑이나 살인자들과 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라기보다 종교지도자들이 정해 놓은 의식적인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이 율법의 복잡한 규정을 제대로 지킬 만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다 보니 경건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레위 집에서 벌어진 잔치는 종말에 있을 천국 잔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그 잔치의 자리에 세리들과 함께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2:15)고 하면서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소외받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랐다고 합니다.
이 논쟁에 등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의 서기관’이란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이란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정결법 규정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했기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했지만 실상은 식탁 교제를 나누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공격한 것입니다. 이를 전해들은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직접 대답하신 것은 그들의 비난과 문제 제기의 취지를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라고 하시며, 그들의 질문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세상적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의사’는 예수님 자신, ‘건강한 자’는 ‘의인’그리고 ‘병든 자’는 ‘죄인’을 가리킵니다. 곧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병든 자인 것처럼,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는 ‘회개시키러’라는 표현이 없지만 누가복음은 회개의 필요성을 명확히 밝힙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죄인과 식탁 교제를 하시는 모습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받을 때가 왔음을 보여주고, 누가복음은 이 구원의 때에 회개가 필요함을 언급합니다. 의인은 원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율법의 모든 의무를 다 지킨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 즉 ‘자칭 의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병들었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대적했습니다. 예수님은 변두리 인생들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탁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금식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33~39절)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계속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다른 논쟁들은 어떤 현장에서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행한 말이나 행동이 문제가 돼 거기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만,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평상시의 관행’이 문제가 됩니다. 29~32절에서 논쟁의 주제가 먹는 것과 관련된 식탁 교제였다면, 33~35절의 주제는 그와 반대로 먹지 않는 것과 관련된 금식입니다. 구약에서 금식이 요구되는 때는 일 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일입니다(출 20:10; 레 16:1-34). 이 날은 음식을 금하여 몸과 영혼에 고통을 가하면서 회개하여 죄를 씻고 속죄제를 드립니다. 따라서 금식의 성경적 의미는 ‘참회를 위한 고행’과 그것을 통한 ‘죄로부터의 정결’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이러한 금식은 율법이 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금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의미(사 58:6)를 상실하고 형식적 율법주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금식 행위를 다른 사람들의 경건과 의를 판단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금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의 금식에 버금가는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금식하셨고, 산상수훈에서 금식에 관한 교훈을 하신 것(마 6:16-18)으로 보아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것(마 11:19)으로 보아, 예수님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이 금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율법의 형식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특징상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금식에 대해서 철저하게 강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을 결혼식 잔치에 빗대어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은 ‘결혼식에 참여한 손님들’로 비유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되었으며, 결혼 잔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뜻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식은 보통 며칠에 걸쳐서 큰 잔치로 진행됐습니다. 결혼식 손님들이 금식할 수 없는 이유는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기간을 말합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결혼과 결혼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 시대를 상징한다고 할 때,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이란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은 결혼 잔치에 와서 금식하는 것처럼 부적합하다고 말씀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기에 적합한 때는 신랑을 빼앗기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수난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이 부적합함을 ‘비유’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유’는 은유적 표현으로 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사람들이 새 옷에서 천을 찢어 낡은 옷에 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이 망가지고 찢은 조각 역시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아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낡은 옷을 살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 비유도 동일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포도주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아 발효시키거나 운반했습니다. 낡은 부대는 이미 여러 차례 팽창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했기에 신축성이 떨어져서 새 포도주가 왕성하게 발효할 때 제대로 팽창하지 못하면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와 가죽 부대 모두 못쓰게 됩니다. ‘못쓰게 되리라’로 번역된 단어는 ‘파괴하다, 죽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같은 단어가 마가복음 3:6에서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를 의논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고, 마가복음 11:18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새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파괴해버리는 어리석음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 죽이려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연결됩니다. 두 비유의 초점은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비유를 통해 형식적 율법주의와 새 시대의 복음을 구별하십니다. 39절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말씀인데, 낡은 전통인 금식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풍자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맛보면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마도 유대인들의 속담일 것입니다. 메시아의 도래도, 그분의 구원 잔치도 모르는 자들은 묵은 포도주에 길들어 그것만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감격 없이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에 갇혀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했으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낡은 율법주의에 생명력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 죄인을 부르시는 분
예수님은 자기 의에 빠진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새 시대의 복음은 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레위를 예수님이 은혜 가운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와 함께 죄인들로 분류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예수님은 쫓겨나고 버려진 양들을 되찾으시고, 종말에 그분의 양 무리를 모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분이 성취한 의로 그들을 덮어 주십니다.
- 새 시대를 여시는 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 옷의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낡은 옷이 찢어지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그 부대가 터집니다. 이와 같이 옛 시대의 생각과 삶의 태도는 새 시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질 때 영안이 떠졌듯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우리의 영안이 떠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식과 관습에 매인 곳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믿는 자로서 새 시대에 걸맞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다 죄인이요 영적으로 병든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요 건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만 모이는 곳이요 죄라고는 전혀 짓지 않은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과 병든 자들이 들어와서 의인이요 건강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칫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집합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면서 자신들이 온전하고 건강한 줄로 착각하고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천국의 복이 약속돼 있습니다.
- 주님과 교제를 가집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주님에 관한 우리의 마음 문이 열리고 우리의 영혼을 살찌울 영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그것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보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구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기도생활을 upgrade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절제하거나 포기합니다
영성 훈련 중의 하나가 금식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우리의 마음을 되돌려 다시 주님께로 향하기 위함입니다. 단지 음식을 들지 않는 금식뿐 아니라 주님과 깊은 교제를 위해 무엇인가 절제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각종 소셜 미디어, 쇼핑, 취미 활동 등 평소에 즐기던 것들을 때로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주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과 같이 어리석으며 때로 파괴적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수님은 치유와 회복의 사역을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행동을 계속 판단하고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바리새인들과 같이 행동하기 쉽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닌데 자기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방합니다. 자기만이 의롭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람들을 선동하여 당을 짓고 부정적인 생각을 주입시키려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에서 혹시 내 모습과 기질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끄집어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습관화된 기질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받은 은혜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시며 그들을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식탁교제를 회피하며 정결을 추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불결이 전염된다고 생각해 불결한 사람들과 접촉을 피했지만, 예수님은 의사가 병자를 치료하듯이 죄인들을 만나 그들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이 교제하면 그리스도인이 불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정결해집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시켜 하나님 백성 삼기를 간절히 원하신 주님을 본받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치유와 소망을 있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역을 감당하려면 때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금년도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 번 겸손히 돌아볼 때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비유와 새 옷 조각 비유,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고와 생활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죄 사함을 간구하는 자들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회개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돌이킨 사람들만이 훗날 그분이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특권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새 시대를 여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듯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의탁함으로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린 채, 형식적인 예배와 봉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이 주신 죄 사함의 감격과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신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그 생동감과 능력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새 시대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