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신적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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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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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욱 5:12~26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기가 막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본문에 보니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몸의 어느 부분에서 흐름이 막히거나 제한될 때 그 부분에 무리가 생겨 마비가 옵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를 돌아봅시다. 혹시 어느 부분이 마비가 되어 있거나 되고 있습니까? 순환이 잘되지 않아 생기는 신체적인 마비, 제대로 되는 일도 없는 것 같고 모든 것이 귀찮아 생기는 감정적인 마비, 누구를 미워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지나치다 보니 생기는 인간관계의 마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여 생기는 영적인 마비 등등. 어떻게 하면 우리 각자가 고침 받아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중풍병자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권세, 병 고치는 권세, 귀신 쫓는 권세 외에 또 다른 권세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나병환자의 치유(12~14절)
본문은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기적과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고 치유하신 기적이 언급됩니다. 이 두 기적은 예수님의 사역이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후 행하신 첫 사역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고(마 8:1~4; 막 1:40~45)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 때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병은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환자들은 피부 질환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그 질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사회적 인식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으며,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만약 나병 환자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사람들에게 접근할 경우에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정함을 인해 성전이나 회당의 출입도 금지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온몸에 나병이 들렸다고 합니다. 나병의 정도가 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자기의 병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격리되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을 어긴 채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치유를 간구하는 모습은 나병환자의 절박함과 다급함을 잘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는 부정한 자신을 당장 깨끗하게 해달라고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정과 공동체와 성전으로부터 격리되어 사는 자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주권적인 뜻을 구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율법 규정을 어겼다고 되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연민의 마음으로 부정한 그의 몸에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즉시 떠났습니다. 제사장이 아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평범한 장소에서, 접촉하면 부정해지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얹어 안수하신 것은 그분이 제사장, 성전, 희생 제물보다 크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함입니다. 당시 나병은 치유가 불가능한 병으로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나병 환자의 치유가 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4장을 염두에 두시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십니다. ‘보여라’, ‘드려라’두 동사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고 지금 당장 드리라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있는 나병환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이 치유되었음을 보이고 율법에 규정된 제물을 드린 후에 돌아오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나병환자의 낙인에서 벗어나 하루 속히 사회의 일원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구약의 규례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앞으로 유대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그를 위한 배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법이 바라보았던 실체요, 율법의 완성이십니다. 예수님의 나병 환자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했음을 알려줍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15-16절)
예수님의 소식이 더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이 치유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온 질병에서 자유롭게 된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병 환자의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막 1:45) 동네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셨습니다. 마가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어려워졌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에서 ‘나아오더라’는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어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모여 오되’도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몰리는 사역도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러가사’도 미완료형 시제로 되어 있어 과거에 반복된 습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종종 사람이 없는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귀찮아서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성을 위해,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유지를 위해 하나님과의 은밀한 공간이 필요하셨습니다. 물론 이로 인한 사람들의 일시적 원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기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태도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17~24a절)
나병 환자 치유에 이어지는 중풍병자 치유 사건 이야기는 마가복음 2:1~12, 마태복음 9:1~8과 병행을 이룹니다. 당시 참석자들에 대해 마가는 단지 ‘많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누가는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특별히 언급합니다. 그들이 갈릴리의 각 마을은 물론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이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무엇인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찾아 온 것입니다. 중풍병자 치유 사건은 치유 자체보다는 그러한 비난의 근거를 조사하려는 문맥 속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5:17~6:11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을 다루는데 이 단락은 그중 첫 번째 논쟁 기사입니다. 마가와 달리 누가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주와 함께했다’라는 설명을 더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 ‘가르침’과 ‘병 고침’은 동전의 양면처럼 복음의 내용을 구성하는 불가분의 요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중에 사람들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메고 왔습니다.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데려온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계신 집은 모여든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심지어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리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갈 수 있을지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을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이 서 계신 곳 위의 지붕을 통해 침상을 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기 위해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막 2:4)라고 표현한 반면, 누가는 ‘기와를 벗기고’라고 기술합니다. 마가가 사용한 어휘와 표현은 팔레스타인의 가옥구조를 반영하는 반면, 누가의 표현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가옥 구조에 어울립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집은 기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팔레스타인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만큼 그리스식 가옥 구조가 갈릴리 지역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은 누가가 독자들에게 익숙한 로마-헬라 가옥의 지붕을 염두에 두고 기와를 언급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중에 갑자기 지붕에서 무슨 소리가 납니다. 천장 한쪽에 구멍이 나며 훤해지더니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이 줄에 매여 내려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것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구를 뜻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는 내키지 않았는데 친구들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그곳까지 왔다면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다르게 반응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중풍병자 본인의 믿음도 친구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이 능히 고치시리라는 확신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누구의 믿음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유가 믿음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복음서 초기부터 계속 언급되었던 ‘죄 사함’(1:77; 3:3)이란 단어가 본문에서 처음으로 선포됩니다. ‘받았다’는 동사가 완료형이므로 죄 사함이 이미 완료되어 지금은 용서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회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선 회개 후 죄 사함’의 공식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는 일련의 과정을 ‘회개’로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 앞에 제대로 섰습니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종교지도자들의 당혹감과 영적 무지를 드러냅니다. 물론 죄 사함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보통 인간으로 알았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며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죄인으로 간주했고 병자는 그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때까지 회복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언을 종교지도자들이 신성모독으로 여긴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합니다. 랍비들 특유의 대화방법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선언이 더 어렵지만, 선언하는 것만 놓고 보았을 때는 결과를 당장 검증할 수 없는 죄 사함의 선언이 쉽고 당장 눈에 드러나는 치유 선언은 어렵습니다. 수족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걸어가는 것은 눈에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는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 대응입니다. 죄 사함이 있어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도 가지셨음을 입증하고자 치유를 행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다니엘 7:13~14에 나오는 하늘 구름을 타시는 신적 존재인 그 ‘인자 같은 분’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은 메시아 시대의 약속입니다(겔 36:25-27).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24b~26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가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해서 가라’는 뜻이며 완전한 치유가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중풍병자는 곧 일어납니다. 온 몸에 힘을 얻고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갑니다. 중풍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받던 병자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것을 본 모든 사람이 놀라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이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현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오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앞둔 종말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무리의 반응은 예수님의 치유와 사죄 선언의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던 그 집은 기적이 나타난 집, 기쁨이 충만한 집,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집이 되었습니다. 팔로마한인교회도 주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교회, 기쁨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가는 것을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어떻게 하면 눈의 가시 같은 예수를 죽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 우리의 자세
-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는데 그들 중에 누가 고침을 받았습니까?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나왔던 중풍병자입니다. ‘중풍병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육신적인 중풍은 무서워하면서 영적으로 마비된 중풍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주셨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훗날 주님 앞에 면목 없이 서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평강 가운데 서려면 자기의 부족함과 한계와 죄악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을 인해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드리며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무리로 인해 집 안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친구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기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시라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습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인간적 한계와 장애를 넘어서거나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는 행위를 동반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 주님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미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의 치유 능력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과 일치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는‘엄마의 자궁’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어미는 자식이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마음으로 연약한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민과 겸손으로 가득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 믿음 생활에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무리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다는 것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보여드려 그를 낫게 해주겠다는 의지가 더 컸기에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친구의 문제를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끈질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함께 궁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지붕을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릴 때는 그의 영혼의 구원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친구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병도 나았을 뿐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받았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자가 나은 것을 보고 아마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행동과 친구를 향한 사랑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시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웃에 무관심하거나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육신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과 같은 믿음과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특히 영적 중풍병자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나가면서
나병은 가정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와 하나님으로부터 그를 분리시키고 소외시킵니다. 사실 육체적인 부정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 도덕적 부정함입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선언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죄인을 정결케 하는 사역임을 암시합니다.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중풍병자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힘으로 들것을 들고 걸어 나왔습니다. 육신의 병을 치료 받았을 뿐 아니라 영혼의 병인 죄까지 용서 받았습니다. 치유가 죄 사함의 증거로 행해집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면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써 믿음을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종교적 지식이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용서하고 치유하신 사건도 영적으로 부정한 죄인들이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분께 간구하며 우리의 소원이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치유와 회복이 있고 풍성해집니다. 제자는 많은 일을 행하는 것보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상황과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철저히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분이며, 육체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을 모두 고치시는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런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주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지상 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필요, 질적인 필요, 영적인 필요가 있는 분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가 받았던 상처, 아픔, 고통을 인하여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고 섬겨야 합니다. 삶 속에서 놀라운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시고 주변의 이웃들과 그 경험을 나누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함으로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