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권위 있는 예수님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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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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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4:31~44


귀신에 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귀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는 없고, 그저 귀신에 이끌려 하루하루를 소망 없이 살아야 합니다. 오직 귀신 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나야만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귀신에 홀릴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귀신도 있지만 넓게 생각한다면 하나님 외에 지나치게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자원들을 낭비하게 만드는 세상의 풍조나 이 시대의 정신이 귀신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술기운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도박이나 마약이 우리를 홀리게 합니다. 한국에 가서 지하철을 타보면 젊은이들이나 노인들 구별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각자를 돌아보면 알게모르게 나의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자칫 좋지 않은 것들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 유혹이나 영향력보다 더 강한 힘이 우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 힘을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 전형적인 일과를 보여줍니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위와 능력을 가지시고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참된 안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첫 사역에 대한 묘사는 그분이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하신 자유와 해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긍휼과 은혜는 예수님의 사역이 정치, 경제적인 해방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과 그 비참함에서 건져 내는 구원의 사역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별로 쉴 틈 없이 꽉 채워진 스케줄 속에서 열정적으로 사역하며 많은 열매를 거두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주님을 본받아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후회없는 섬김의 삶을 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 바랍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31~32절)
나사렛 회당에서는 청중이 예수님을 배척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심판적 설교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 해변에 위치한 도시이자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세관, 병영, 회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갈릴리 사역의 전진 기지로 삼아 하나님 나라 전파에 힘쓰셨습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가르치시매’(31), ‘가르치심’(32a), ‘말씀’(32b)이라는 표현을 통해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가르치시매’가 분사로 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행동’이 일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마가복음 1:22에 의하면 평범한 무리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지금까지 자기들을 가르쳤던 서기관들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를 느꼈습니다. ‘권위’라는 우리말은 ‘권위주의’라는 단어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를 줄 수 있지만, 원어는 ‘감동을 주는 내용이나 전달방식’을 뜻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시니 듣는 자들의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갖추어진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말을 듣는데 익숙하던 무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하시는 말씀이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웠습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말씀에 이어지는 그분의 행동에서 뒷받침됩니다.

권위 있는 축귀(33~37, 41절)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메시아 즉위식을 가지신 후에 광야에서 사탄과 영적인 전쟁을 시작하셨습니다.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을 했으나 그때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얼마 동안 떠났다가 다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입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축귀 사건은 일반적으로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첫째, 귀신이 자신을 쫓아내는 자를 인식하면서 갈등이 고조됩니다. 둘째, 예수님이 축귀를 명령합니다. 셋째, 귀신이 떠나가고 상황은 조용해집니다. 넷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칩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히브리 사람들의 관용구로 상대방에 대한 분노를 표시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의 대용어입니다. 상대방의 신분을 드러내면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는 귀신의 의도가 담겨 있으나 그런 술책이 예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으며 그 사람에게서 잠잠하고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회당 안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무리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말씀의 능력과 영적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여 있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능력 있는 ‘선생’으로서의 권위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다시 한 번 입증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집니다.

해질 무렵, 즉 안식일이 끝나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그날 회당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시몬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였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막 1:33). 졸지에 시몬의 집 앞에는 병을 나아보겠다는 사람들, 예수님이 어떻게 고치는지 구경삼아 보겠다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입니다. 병자들 중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그들의 질병 배후에 귀신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을 이러한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사탄의 속박과 억압에서 건져 내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입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했던 이 세상에(4:7) 하나님의 종말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드디어 나타나셨고, 자신들이 그분으로 인해 쫓겨나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거룩한 고백이 더러운 영의 입을 통해 나오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선언은 고백과 찬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단지 병이나 고치고 귀신을 쫓으며 기적을 행하는 자로 이해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섣불리 알려지면 앞으로 사역하시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위 있는 치유(38~40절)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때는 오후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시몬의 집’은 실제 시몬 자신이 소유한 집일 수도 있고 시몬의 처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본래 베드로의 고향은 벳새다인데(요 1:44), 결혼에서 가버나움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아직 시몬을 비롯한 어떤 제자들도 부르시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시몬의 장모를 치유한 사건은 시몬이 회심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건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준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안에 들어가셨을 때 시몬의 장모는 극심한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여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가가서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1:29~31에 의하면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는데, 누가는 예수님이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심으로’열병이 떠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서서’를 직역하면 ‘그녀 위에 서서’입니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병행 기사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는 이 표현을 사용해서 열병에 대한 예수님의 우월한 권위를 보여 줍니다. 앞서 축귀 사건에서 사용된 동사 ‘꾸짖다’와 ‘떠나다’는 다시 사용됨으로써 열병의 배후에 마귀가 있었다는 암시를 줍니다. 치유된 여인은 ‘즉시’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의 수종을 듭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증명합니다. ‘수종들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음식 대접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모여든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귀신 들린 사람과 시몬의 장모에게 안수하지 않는 것과 대조됩니다. 말씀 한 마디로 모든 병자들의 병을 고치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단순히 무리로 보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따뜻한 손길을 기대하는 영혼들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늦은 시간까지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아닌 사랑의 돌봄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전도(42~44절)
밤늦게까지 치유 사역을 감당하셨던 예수님은 날이 밝자 ‘한적한 곳’(광야)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와 쉼을 위해서입니다(막 1:35). 예수님은 아무리 중요한 일도 ‘아버지와의 교제’보다 앞서지 않게 하셨습니다. 무리가 힘들게 찾아 헤매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헬라어 본문은 무리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날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거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떠나시지 못하도록 만류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해 붙잡아 두려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답변은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사명선언과 맥을 같이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와 ‘보내다’와 ‘전파하다’(개역개정에는 ‘전도하다’)라는 단어들이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신 대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시면서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뜻에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요구에 끌려 다닌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아시고 사명에 따라 사역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와 환호에도 ‘소명’이 흔들리지 않고,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떠날 수 있었던 힘은 분명한 소명감 그리고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또한 흔들렸던 소명과 잃어버린 삶의 질서와 쉼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무리들의 이해는 피상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가버나움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고 긍정적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귀신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신 것에 놀랍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다 돌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갈릴리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는 무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고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무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1:3을 보면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역의 귀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늦게까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느라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분주한 하루의 사역 후에는 쉬셔야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잠시 떠나 하나님을 만나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기도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겟세마네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간구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적으로 충전하는 기회를 가지셨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자신이 이 땅위에서 하실 일을 아시고 또한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역에 필요한 능력을 충만하게 채우셨습니다. 채움이 없는 부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위로부터 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 있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아야 합니다.
- 주님의 만지심을 구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종종 고난을 경험합니다. 질병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보다 크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가시고, 온갖 병자들 위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셨듯이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만져 주시며 일으켜 주셔서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신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시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사탄의 지배에서 인간의 실존을 해방시켜 전인적인 치유를 가져오십니다. 탄식을 자아내는 세상 속에서도 슬퍼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주의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내게 주님의 만지심이 필요한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 섬기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오전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해가 질 무렵부터 몰려든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느라 밤늦게까지 일하셨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데는 낮과 밤에 구별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행동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예수님의 섬기려는 열정을 본받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 사명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함께 있기를 소망하지만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분명한 소명 의식을 가지셨기에 세상의 인기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섬기신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나라 확장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고 믿어 복된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는 아직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은혜를 누구에게 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단순히 놀라거나 호기심을 가지기보다 회개와 순종과 사명을 감당함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참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고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쉽 없이 가르치시고, 사람들의 간구에 응답하여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통해 모든 것을 회복케 하는 ‘은혜의 해’(4:19)가 시작되었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도하신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부어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모든 결박을 풀어주시며 자유케 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육신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인간관계의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각종 스트레스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만지심을 구해야 합니다. 받은 사랑과 은혜를 인하여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섬기려는 주님의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응답을 받았으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지상 명령을 감당하는 성숙한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며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