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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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8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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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게 모르게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외모가 이렇게 생겼으니 이런 성격을 가졌을 것이다, 저 사람은 어디 출신이니 그런 행동을 할 것이다 등등. 때로는 섣부른 판단이 예상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금주에 수요예배 시간에 사도행전 10장을 다룰 텐데 거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주선하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임했던 환상에 대하여 들으면서 자기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보았던 환상을 연결시키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행 10:35). 하나님은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그가 가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에도 보니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이 전부터 알던 사람으로 알기에 예수님을 불신하고 심지어 배척합니다. 혹시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에 이웃을 무시하거나 배척한 적은 없습니까? 그런 행동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능력과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이 그분을 칭송했다는 15절의 기록과 달리, 본문은 예수님이 자라신 고향 나사렛에서 첫 설교를 행하신 후에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전하신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이 무엇이며, 그런 사역이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알게 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누구나 죄 사함을 받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자마다 모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은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사명의 길은 우리를 부르신 그분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앞서 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시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첫 설교(16~21절)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신 것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라나신’이라는 표현은 유아기부터 성년기까지의 기간 전체를 가리킵니다. ‘늘 하시던 대로’는 ‘자기의 습관대로’라는 뜻인데, 단지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시던 습관이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치시던 습관을 말합니다. 1세기 회당 예배는 쉐마(신 6:4-9) 암송, 공동 기도문 암송, 모세 오경 낭독, 예언서 낭독, 그리고 읽은 구절들에 대한 설명과 축도 등의 순서를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성경 낭독자와 설교자는 회당장이 선택하는데, 특히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있는 손님이 예배에 참석한 경우 그에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행 13:15). 성경을 읽을 때는 일어서고, 가르칠 때는 앉았습니다.
이사야서가 쓰인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시자 예수님은 61장을 펼쳐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종의 사명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지금은 성부께서 성령을 성자에게 내리셔서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언을 성취하실 분이 그 예언의 글을 직접 읽고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성령이 임한 결과 두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내게 기름을 부르셨다’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보내셨다’입니다. 기름을 부으신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자에게’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포괄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가난한 자’는 누가복음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그들은 단지 재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라기보다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병든 자와 영적으로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 즉 소외되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보내신 목적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원래 이사야 61:1~2에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 앞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침’이 있고, 2하반절에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두 부분을 인용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사야 35:6에서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과 58:6에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함’를 인용하여 추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강조되는 것은 구약적 희년 개념과의 연속성입니다. 희년은 7년 안식년을 일곱 번 보낸 다음 해, 즉 50년째 해입니다. 희년에 관한 규례는 레위기 25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희년은 대제사장이 수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부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희년에는 땅을 쉬게 했으며, 모든 빚진 것을 탕감해주고, 땅의 소유권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자유민이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해방의 해인 희년이 이사야에 의해 은혜의 해로 선포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레위기 25장에 언급된 구약적 희년의 시행을 문자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메시아가 성취하려는 종말적 구원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희년 언어 두 가지가 사용됩니다. 첫째, 노예를 풀어 주고 얽매인 부채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자유’입니다. ‘자유’라는 단어는 ‘죄 사함’과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두 번째, ‘주의 은혜의 해’라는 표현입니다. 홍수로 심판하심으로 노아의 방주를 구원하듯, 하나님은 죄를 멸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서는 슬픈 자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포하신 은혜의 해는 곧 죄인들에 대한 심판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읽기를 마치시고 두루마리를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셨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일제히 예수님을 주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풀어서 여러 내용을 전하셨겠지만, 누가는 한 문장만을 기록했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가 그것입니다. 직역하면 ‘너희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오늘 응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공생애 사역,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고난까지 이어지는 구원 사역의 전 기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로서 자신을 통해 이사야가 한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청중의 반응(22~27절)
회당에 있던 청중이 다 예수님을 증언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씀에 놀랐으며,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증언하다’는 직역하면 ‘좋게 이야기하다’입니다. 예수님의 탁월함에 대해 칭찬하고 감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대하여 놀랍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청중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면서 자기들이 알던 인간 예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가진 선입견 때문에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인식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3:23)라는 기록과 일치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들은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사야를 통한 예언의 성취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청중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입 밖에 내지 않은 그들의 마음속 생각을 정확히 짚어 내십니다. 그들이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속담은 의사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 내뱉는 비난의 말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는 말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킬 만큼 놀라운 기적들을 보이라는 요구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당하던 비극적인 전통이 자신에게도 적용됨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심은 예수님이 참된 선지자임을 입증하는 증거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인 엘리야와 엘리사의 스토리를 언급하십니다.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3년 6개월 동안 큰 흉년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는 시돈 땅에 있던 이방인 사렙다 과부에게 보냄을 받아 굶주린 과부의 집에 밀가루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왕상 17:8~16). 엘리사 때에 아람 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이스라엘에도 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나아만 한 사람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은 후에 깨끗이 나았습니다(왕하 5:1~14). 두 사건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거역하고 회개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주어진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나사렛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면 그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갈 수 있다고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은 유대인 전체의 불신앙을 예견하며,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도리어 촉진하고 정당화합니다.
분노하는 청중(28~30절)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청중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이방인들에게 보내진다는, ‘말도 되지 않는’해석을 예수님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발적인 설교를 들은 청중은 격분해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지나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분노를 무력화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고난의 길이며, 그 고난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누가는 왜 나사렛이 산 위에 건설된 도시임을 언급했을까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의 동네는 산 아래 세계에 자신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드러나야 할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나사렛들의 배척은 나중에 ‘온 이스라엘’이 일어나 메시아를 기소하는 장면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산 위의 도성이 감추어질 수 없듯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교회는 세상에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 본을 보이는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주님의 빛을 비춤으로 온 세상이 칭송하며 그 도성으로 인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왕으로서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안식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습관을 들이면 이후로는 그 습관에 지배를 받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죄의 성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죄가 우리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죄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포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며 성령의 기름 부음을 경험하신 후에 귀신 들린 사람들과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사역을 능력 있게 시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치유와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61:1~2을 인용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의 우선 대상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곧 예수님의 관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두셨다면, 우리의 관심사도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과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삶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들은 은혜로운 말씀에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불신은 사렙다 과부의 믿음과 나아만의 순종과는 분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분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셨지만, 그들은 도리어 분노로 가득 차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할 뿐 아니라 우리 삶에 손해와 불이익을 가져옵니다. 인생의 내용과 방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결정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 주님이 말씀을 통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하시는데도 강퍅한 마음으로 화를 내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 생각이 병든 사람들은 어떤 감동적인 영적 현장과 은혜로운 말씀 앞에서도 완악한 고집을 꺾지 않고 주님을 극구 거부합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 주님의 일에도 배척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은 거치게 하는 것이기에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 은혜를 누릴 수 없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천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은 곳이고(마 13:44)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순종해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눅 14:33) 다른 사람들의 반발과 배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런 반응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벧전 4:4). 세상의 배척 앞에서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과,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를 배척하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이미 심판에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의해 배척을 받더라도 우리가 담대하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복음을 위해 사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메시아를 통해 전파될 하나님의 은혜를 예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신 후에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메시아임과 동시에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참된 자유와 회복의 희년을 다시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인류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해방의 희년을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주님이 주시는 참 자유와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희년의 복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 희년 제도의 궁극적인 완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노라면 예측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이 우리를 압박해 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회복과 안식을 선포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이 자유함과 회복과 안식을 맛보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받은 은혜를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말씀 속에 담겨진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알고 사모하고 누려야 합니다. 교제와 봉사를 통하여 받은 복을 나누고 서로 섬기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귀한 은혜를 힘입었다면 우리 또한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눈멀고, 눌린 것을 인하여 참된 해결책을 가지지 못하고 고민하며 아파하는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 주님만이 주시는 자유와 회복과 안식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