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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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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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150편의 시편 중에 절반 가까운 73편을 썼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이 여럿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시편 8편은 다윗이 양을 치던 목자 시절에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양을 치다가 들판에서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넘쳐흐르는 감동을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우주 만물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인간이 어떤 존재로 만들어졌는지,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돌아보면서 말로, 노래로, 때로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립니다. 물론 믿음이 있어야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이전에 단순히 보이던 풍경이 하나님이 만드신 오묘한 작품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시편은 그 찬양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면서 다윗과 같이 온 마음과 몸으로 감사와 감격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1상반절)
다윗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우주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격자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여호와 우리 주”라고 부릅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는 원래 왕을 부를 때 쓰는 말이지만,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주권자이십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고백으로 자연 만물과 인간의 모습을 통해 그 이름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되심을 높입니다. 유대인들에게‘이름’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의 인격과 그의 전인격적인 존재를 나타냅니다. 보통 아름다움은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게 발견하는 탁월한 만족이나 매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의미하는 것은 여호와의 위엄이 온 땅에 넘치므로‘하나님을 대면해 만나는 것을 간절히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찬양(1하반~2절)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말하면서 주의 대적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방식을 서술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주의 대적들’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부합니다. 반면에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은 연약함과 겸손함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어리고 약하다고 무시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입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자들의 입에 하나님의 이름을 주셔서 부르짖으며 신뢰의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보호해 주는 요새요 산성이 됩니다. 하늘 위까지 자신의 영광을 두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어린아이같이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대적들을 잠잠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연약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세리,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행위에 당혹감을 느끼고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하고 제자들에게 불만을 표출합니다. 이를 전해들은 예수님이 두 가지로 대답하십니다. 먼저 속담을 인용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시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세상적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의사’는 예수님 자신, ‘건강한 자’는 ‘의인’그리고 ‘병든 자’는 ‘죄인’을 가리킵니다. 곧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병든 자인 것처럼,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의인은 원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율법의 모든 의무를 다 지킨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 즉 ‘자칭 의인’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킴으로써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려 했고, 그것을 의로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병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만하는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대적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의 자리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변두리 인생들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탁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자기와 배경이나 환경이 다르다고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틀린 것으로 취급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지켜보시고 심은 대로 갚아주십니다. 연약한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능력이나 경험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그분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7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3~4절)
여호와께서 하늘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은 ‘그분의 손가락의 작품’입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작품을 만든 것처럼, 주님이 탁월한 솜씨로 우주를 만드셨고 달과 별들을 하늘에 고정시켜 두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다가 다윗은 그 권능의 하나님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존재인 인간을 떠올리며 놀랍니다. 이 놀라움을 인하여 “무엇이기에”라는 감탄 의문사를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노쉬’는 보통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자’로 번역된 ‘벤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욥기 4:19에서 인간을 ‘흙집에 살며 티끌로 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존재라고 합니다. 이사야 2:22에서는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드러냅니다. 모세가 인간의 수명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시 90:10). 아침에 꽃피웠다가 저녁에 마르는 풀과 같고(시 90:5, 6), 인간의 일생이 숨 한 번 쉬는 것과 같으며(시 90:9), 안개와 같다고(약 4:14)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보잘 것 없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돌보신다고 합니다. ‘생각하신다’는 것은 항상 기억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돌보신다’함은 주의 깊게, 지속적으로 보살피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우주를 보며, 그 위대함에 대조되는 연약한 인생을 신실하게 돌보아 주시는 인자, 히브리어로 ‘헤세드’를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 인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요 1: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우리도 다윗처럼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인간을 높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5~8절)
하나님은 비천한 인간을 존귀케 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를 두고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위치가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거의 가깝게 창조된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적 권위를 인간에게 위임하셨음을 뜻합니다. ‘씌우셨다’를 미완료형으로 사용해 하나님이 인생을 지속적으로 존귀케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그토록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을까요?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만물 가운데 있는 한 동물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원숭이가 진화하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원숭이는 처음부터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만물은 결코 사람의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나일강, 태양 등은 다 사람들이 만든 우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나 인간을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행위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도 자기의 구원을 자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엡 2:8-9).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두 가지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신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인간에게 위임한 데서 나타납니다. ‘주의 손’은 하나님이 힘과 권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다스리라’는 단어만 사용됩니다. 여기서 ‘다스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다스리듯이 통치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 하나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생각하시고 돌보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갖지 못한 특권이요 위임이기 때문입니다. 다스리게 하자는 것은 온 땅에 있는 피조물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사명이 인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으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인간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발아래 두셨다’라는 표현은 인간이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하나님이 권한을 부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의 동물들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소와 양’은 짐승들 중 길들여진 가축들을 말하며, ‘들짐승’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과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 즉 새와 물고기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을 기르고 잡고 사냥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이 연약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통치권을 부여하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고후 5:17) 우리는 그분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시키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충성스럽게, 최선을 다하여 섬김으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9절)
다윗은 시를 시작하면서 고백했던 찬양을 9절에 다시 한 번 고백하면서 시편 8편을 마무리 짓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인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그의 이름이 온 땅에 얼마나 권능과 위엄에 차 있는가를 노래합니다. 반복은 강조를 뜻합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인간에게 베푸신 영화와 존귀를 묵상하고 난 후의 찬양은 그 감격의 깊이가 더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을 바라보고, 혹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면서 놀라워하고 그것을 말로든 노래로든 행동으로든 표현해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한밤중에 하늘을 우러러 달과 별들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경이로움에 대해 새삼스레 눈을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더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광대한 우주에 비해 인간은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영적 존재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우월감이나 소외감, 또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고 느끼거나 무가치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10을 보면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바라.”NIV를 보면 ‘We are God's workmanship.’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은혜만큼 감당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연약한 이웃을 착취하거나 힘과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강압하는 행위들을 금하셨습니다. 작은 어린아이 한 사람에게 가한 악행을 하나님 당신에게 저지른 죄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으셔서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함과 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하게 바라보듯이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 사명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람의 발아래 두시고, 이를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존귀한 존재의식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관리자의 책무를 잘 감당하도록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은혜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을 오히려 착취하고 오염시키고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선한 청지기의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은 파괴된 환경 때문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자주 찾아오는 이상 기후와 자연 재해는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충실한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아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늘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셔서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십니다. 주의 통치에 동참하도록 허락하신 이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요.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그 피조물을 돌보며 다스리는 사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8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누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충만하다고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 때문에 감격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광활한 대지를 보고 산과 바다를 바라보십시오. 달과 별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만드신 것은 피조 세계를 통하여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진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그분의 솜씨와 영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인생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이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받은 사랑을 나누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온 세상에서 찬양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