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Author
명
Date
2025-05-18 16:10
Views
6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3년의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분이 가지신 권세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이 아무리 크고 놀라워도 승천하신 것으로 끝이 났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팔레스타인에서 20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 운동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셨으나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으로 섬겼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택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증인으로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경에 예언된 구원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의 장면을 살펴보면서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36~43절)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감격 속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방 안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주님을 만난 경험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우리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분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실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지며 그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예수님이 우리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알리고자 이 밤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라고 전했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예수님의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 20:19에 의하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방안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육신과 차원이 다른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 분명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 인사말은 단순히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인사를 넘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원의 선포이며 주님만이 주시는 축복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불신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들이 필요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놀람과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영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은 유령을 가리킵니다. 영은 볼 수 없지만 유령은 보인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여긴 적이 있습니다(막 6:49). 베드로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감옥에서 나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을 때, 로데가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왔다고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데가 본 것은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행 12:15). 제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눈으로 보지만 그분이 다시 사셔서 자기들 앞에서 서계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주님께서“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하시면서 제자들이 당신을 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심’으로 규정하십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바로 그 예수이며, 영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임을 보여주시려고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신의 손과 발을 내미시며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당장 보라’, ‘지금 당장 만지라’는 것입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당신에게는 살과 뼈가 있으므로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은 영혼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입니다. 부활된 몸은 고린도전서 15:35-49에 기록되었듯이 지상의 육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여전히 물리적 특성을 보유합니다. 물론 부활체라고 해서 과거에 손상된 육체의 흔적을 부활 이후에도 계속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부활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하늘의 질서에 속한 몸이라고만 말하고 있지, 부활 이후의 성도들의 육체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시면서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신(출 3:14) 하나님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현실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먹을 것이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대부분의 유대 전승을 보면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는 지상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은 경험은 특히 베드로의 기억에 깊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요 21:13; 행 10:41).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더디 믿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야 했고 지금도 성령은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말씀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는 ‘평강’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었고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까지 갖게 했습니다. 부활 신앙은 과거의 실패에 얽매이지 않게 하고, 현재가 전부인 듯이 살려는 탐욕을 버리게 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44~49절)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말씀의 토대 위에 든든히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는 고난 받기 전의 공생애 기간을 가리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결코 다른 인격체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생애 동안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약속과 성취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용어입니다. 24장에서만 3번 등장하는 ‘해야 하리라’는 동사는 구약성경에 예고된 하나님의 계획이 메시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합니다(7,26,44). 예수님은 자신에 관하여 기록된 구약의 약속들을 세 개의 동사로 요약합니다: 고난 받다, 살아나다, 전파되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을 받아야 하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합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가는 인생이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가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 소망의 메시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는데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사건들의 목격자요 증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땅 끝까지 파송하려고 하십니다. 증인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도록 제자들에게 머지않아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성령의 보내심 또한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유력한 증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목격자와 동반자로서 쌓아 온 경력이 아니라 그들에게 와서 능력을 제공할 성령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의 약속이 이루어졌으며 이후로 계속 믿는 자들 가운데 성령이 임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과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생명과 구원의 도성으로 바꾸어 놓았고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주님의 증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때문이요, 이 세상을 죽음에서 살리시려고 당하신 고난이었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죄와 사망과 사탄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50~53절)
성경을 보면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은 독특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시는 데서 육체로 승천하셨고,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의 승천도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시 68:18)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승천은 누가복음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장차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9:31).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22:69). 부활 후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24:26).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승천 기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을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로 데리고 가십니다. 둘째, 이 땅에서의 사역을 모두 마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남아 자신이 가시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자신이 교회에 남겨두신 고난을 채울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이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할 희생이 큽니다. 고난과 배신, 아픔과 고통도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이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내려오시는 성령을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자들은 더 이상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큰 기쁨으로’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큰 기쁨은 구원의 확신과 부활의 체험을 가진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기쁨(joy)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를 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난 공동체의 반응을 뜻합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렸으면 드린 사람들은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헬라어로 charis인데 그 어원은 ‘기쁨’의 의미를 가진 chara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기뻐할 줄 알고 그 마음에 평안을 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립니다. 넷째, 제자들은 계속하여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냅니다. 누가복음이 제사장인 사가랴의 사역으로 시작되었다면 끝부분에서는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는 제사장으로 묘사하면서 마무리합니다. 제자들이 성전에서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모습은 복음서 서두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해(1:8-9) 성전에서 마무리됩니다. 찬양으로 시작해(1:64)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사도행전 서두와 오버랩되면서 자연스럽게 초대교회 시대로 이어집니다. 복음의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의 재림을 바라보며 성령 안에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기쁨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며 예비하신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성도의 정체성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 무엇입니까?
-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보인 불신과 회의는 그들이 당초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거나 소망한 적이 없었음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과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지만, 제자들은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과 메시지를 신속하게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누차 예고되고 가르쳐졌던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주님의 재림과 그에 따른 신자의 육체적 부활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확신을 가진 증인이 되도록 그들에게 사랑의 책망을 통해서 믿음을 일깨워 주셨으며 십자가 흔적을 가진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을 전할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들의 마음은 준비되지 못하고 도리어 의심, 불신앙,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당신의 몸을 보이시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9). 이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도들은 더 이상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부활을 확신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분과 날마다 다이나믹한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이시고, 음식을 드심으로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기에 믿는 믿음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영적인 눈이 없다면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활의 확신을 가질 뿐 아니라 말씀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라는 표현이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예수님은 모세 오경부터 시작하여 선지서, 시편에 이르기까지 자신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차례로 설명하셨습니다. 구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고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님의 전기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는 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증인은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부활을 확신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증인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은 마가의 어머니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증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이자, 반드시 통과해야 할 단계입니다. 본문에는 증인과 관련된 세 개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죄 사함, 평강, 보냄. 그런데 이 세 단어는 모두 성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를 깨닫게 합니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우리의 죄가 깨달아집니다. 깨달은 죄를 고백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성령 훼방죄도 따지고 보면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평강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평강과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믿는 자에게도 고난이 오면 잠시 마음이 분주해지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내 평강과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셋째,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뜻이었고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성령이 헬라어로 pneuma 인데 ‘성령’, ‘호흡’이라는 뜻이 있지만 ‘바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오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 즉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의 능력이상으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기에 성령으로 충만할 때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가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의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셔서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하시고 고통의 멍에를 함께 져주시고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은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되었고, 또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역사를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성도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19).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증거임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또한 이 부활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언제나 사모해야 합니다. 마음에는 평강이요 삶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서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며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어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