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엘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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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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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24:13~35


살다 보면 일이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합니까?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립니까? 본문에 보니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갑니다. 무엇인가 해 주실 것을 기대했던 예수님이 너무나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나 그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그분이 다시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과 귀를 막고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마음과 귀가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슬픔에 잠겨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기쁨이 충만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그들의 마음이 변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삶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며 그분이 주신 지혜와 능력에 힘입어 주시는 사명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제자에게 다가오신 예수님(13~17절)
‘그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 둘’은 9절에 언급된 열한 사도 외에 ‘다른 모든 이’에 속한 자들입니다. 개역개정에 ‘이십오 리’라고 번역된 것은 60 스타디온입니다. 1 스타디온이 약 185m 이므로 60 스타디온은 약 11km, 즉 7마일 정도 됩니다. 누가는 그들이 엠마오로 간 이유는 정확히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문의한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열띤 토론과 논쟁을 벌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온통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려지다’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동행하는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생겼는데 하는 생각을 얼핏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함께 가시고 말씀하셔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그들은 슬픈 빛을 띠면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출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시간에 그들은 도리어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성경을 설명해주시는 예수님(18~27절)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글로바는 요한복음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는 다른 인물로, 그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온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런 큰일을 모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답답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셔서 그들 눈앞에 계신데 그들은 여전히 죽은 예수만을 붙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예수님이 물으시니 글로바는 ‘나사렛 예수의 일’을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서기관들이 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로마 관원들을 이용해 예수님을 죽였지만, 최종 책임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현장에 있었고,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따라갔기 때문에 충분히 서로 공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에서 ‘속량’은 레위기 25:29에서 ‘가옥의 회복’을 뜻하고, 레위기 25:48에서는 ‘노예 해방’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적용하면 ‘주권의 회복’을 뜻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대했던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 그가 죽은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어요.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끝났어.’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이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들었다고 하며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두어 사람’이 직접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시다니’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고 하면서, 여인들과 동료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시며 책망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기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부활 승천 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으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 즉 구약 성경에서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자기에 관한 것’이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 바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메시아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사야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동정녀 탄생에 대해 예언했는데 예수님을 통해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당시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아, 승리의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이사야는 메시아를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종으로 예언하였고, 과연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시인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도 우연하게 일어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야만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 깨달아집니다. ‘자세히 설명하다’가 한 단어로 ‘강해’입니다. 예수님은 강해설교의 원조입니다. 입에 침을 튀기며 ‘믿습니다’하면서 불같이 토해내는 말씀이라야 은혜가 되지 강해 설교는 지루하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 안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풀어줄 때에 열변을 토하셨겠습니까? 잔잔하게 말씀하셔도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전하시는 지라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효율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목소리는 어떤 톤으로 하고 어떤 제스처를 쓰고 음향 시설은 어떻게 이용해야 하고 등등 기술적인 면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회개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잘 정리하였다 할지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듣는 자들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설교자로서 저를 가장 두렵고 떨리게 합니다. 목회자들이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많이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두 제자(28~35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엠마오에 가까이 왔습니다. 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푹 빠졌습니다. 말씀을 듣는 동안 그들이 가졌던 슬픔과 염려는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자기들과 함께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은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계속 더 가려는 듯하셨지만, 두 제자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자기들과 함께 머물자고 강권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은 것은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더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씀을 더 가르쳐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세상 주는 재미 때문에 주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주님 때문에 세상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을 대접하고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마땅히 행해야 할 덕목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라는 표현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중요한 두 번의 식사 장면, 즉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9:16), 유월절 만찬(22:19)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이 축복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시는 떡을 받아먹을 때 사람들은 배불렀고(9:17), 예수님을 기념했습니다(22:19). 누가는 식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집니다. 1:53에서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라는 언급과 더불어 누가복음에는 식사에 대한 언급이 19회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불리셨으며(7:34), 세리, 죄인과 함께 먹는 것으로 비난 받으셨습니다(5:30; 15:1-2). 누가복음의 식사에 대한 관심은 종말론적 식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와도 연관됩니다. 이러한 식사 이미지는 가난해서 주렸던 당시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보여 주려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떡을 받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이 동사는 신적수동태로 신체적 이상 현상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임을 나타냅니다. 이전까지 가려졌던 눈이 열림으로써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그인 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지식이나 노력으로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뜨게 해 주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밝아진 순간, 예수님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육체의 한계에 갇혀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면서 말씀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떼어 주신 떡을 받음으로써 그들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에서 ‘뜨겁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뿐 아니라, 말씀을 깨달을 때 번민이 생길 수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심적 갈등은 이스라엘의 구속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 구원자의 역할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은 번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번민과 심적 갈등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다시 사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으니 더 이상 엠마오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들은 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열린 눈, 뜨거워진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엠마오에 올 때는 풀이 죽어 왔으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열한 제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도 엠마오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길을 가던 것, 구약에서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과 엠마오에 있는 집에 들어가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자기들에게 주었을 때 갑자기 자기들의 눈이 열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 등등 흥분하며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귀로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육신의 눈과 귀로만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과 표적을 통해 당신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임을 지속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가려진 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부활 신앙에 이르게 하시는 그 은혜를 간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는 육신을 입으시고 찾아오셨지만 오늘날에는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메시지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하게 받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 우리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감동과 깨달음이 올 때 영적인 눈이 떠지고 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실 때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야 놀라며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던 경험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의 마음에 뜨거움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밝히시자,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셔서 말씀을 들을 때 깨닫도록 하시는 지혜의 영입니다.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함께 떡을 뗀 일을 전했습니다. 모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서로에게 전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모두를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를 입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영혼을 죄악에서 구원하셔서 예수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주님의 구속 역사의 목적에 따라 천국 복음의 의미를 깨달을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마태-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여인들 혹은 막달라 마리아와 먼저 만나신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은 그 기록을 생략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 언급되지만, 그 이야기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버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처음으로 만난 제자들은 글로바와 무명의 제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이 만나시는 장면을 생략하고 두 제자가 만나는 장면만을 수록한 것은 이 장면을 보다 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효과를 제공합니다. 곧,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면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됩니다. 앞서 여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된 것처럼, 글로바와 같이 신약에 한 번만 등장하는 인물, 그리고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유력한 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여인들과 무명의 제자들에게 먼저 알려졌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낙심과 좌절과 포기의 길, 슬픔으로 가득 찬 길, 소망을 잃은 길, 도피의 길, 어두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믿음의 길, 기쁨이 충만한 길, 소망으로 가득 찬 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길이었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까? 당면한 문제를 인하여 낙심하거나 포기하며 엠마오로 가려하지는 않으십니까? 엠마오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의 마음이 얼마나 불타올랐을까요? 우리의 마음이 두 제자들처럼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심장이 주님의 심장과 함께 어우러져 뛰기를 원합니다. 주신 사명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아는 것과 ‘예수님을’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 떡을 떼어 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홀연히 열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에 피를 흘리고 죽임당한 양처럼,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임 당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이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몸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듣고 배우고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세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세요.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부활과 영생의 환희 가운데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