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부활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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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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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24:1~12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신 사건이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다시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기에,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도리어 의심하였습니다. 오늘은 인류의 소망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부활 사건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부활신앙을 갖고 살면서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1~3절)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입니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누가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시간이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 하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일요일 새벽입니다. 예수님의 장례는 안식일 직전에 치러졌으므로 안식 후 첫날은 장례 일을 포함해 계산하면 3일째 날이 됩니다. 여인들은 세마포에 감겨 향유에 부어진 채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급히 장사되신 주님의 모습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개역성경에는 번역이 안 되었지만 2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여인들이 ... 무덤에 갔다 그러나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발견했다.’접속사 ‘그러나’와 동사 ‘발견하다’가 사용된 것은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진 것을 여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간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에 자기들도 향품을 바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깜짝 놀라 무덤 안에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 예수’라는 표현은 4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나옵니다. 부활하신 장면을 묘사하기 시작하는 바로 이곳에 ‘주 예수’, 즉 ‘예수님이 주’라는 고백이 담긴 호칭이 사용됩니다.

천사들의 증언(4~7절)
향품을 들고 찾아간 무덤에서 여인들을 기다린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아니라 빈 무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기에 근심하였습니다. 여기서‘근심했다’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했다’는 뜻입니다. 헬라 원문에는 4절에 ‘근심할 때’와 ‘문득’사이에 ‘보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모습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9:29)을 상기시킵니다. 이에 여인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율법에 의하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증언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신 19:15). 그러므로 두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은 부활이 확실한 사실임을 의미합니다. 두 천사가 여인들에게 부활과 연관 지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부활의 간접적인 증언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문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를 지닌 수사의문문입니다. ‘죽은 자’와 대조를 이루는 ‘살아 있는 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영존함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부활의 직접적인 증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살아나게 되었다’인데, 이는 신적 수동태로 예수님을 일으키신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9:22).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도 장차 수난 당하실 것을 두 번 더 예고하셨습니다(17:25; 18:32-33). 7절의 “하리라”는‘반드시 ~하다’라는 뜻으로 ‘넘겨지다’, ‘못 박히다’그리고 ‘살아나다’라는 세 개의 부정사를 취합니다. 넘겨져야 하리라, 목 박혀야 하리라,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이 죄인의 손에 넘겨지고 못 박히고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시험하시고, 인도하신 과정을 언제나 기억해야 했습니다(신 8:2).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나님이 그를 통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의 증언과 믿지 않는 사도들(8~12절)
여인들은 드디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덤에 올 때 그들은 슬픔과 근심에 사로잡혔으나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니 기쁨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무덤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다른 모든 이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본 것과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 두 천사가 한 말을 알렸습니다. 10절은 이 여인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입니다. 이 여인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시작부터 그분의 십자가 죽음, 장례와 빈 무덤, 부활까지 전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습니다. ‘허탄하다’가 우리말성경에서는 ‘어처구니없게’NASB에서는 ‘nonsens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믿는 것을 거절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들의 행위가 지속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즉 사도들이 여인들의 증언을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많이 들었고 이제 여인들의 증언까지 들었음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인들의 증언을 그대로 믿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실 여부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시체는 없고 세마포만 있는 것을 인해 놀랐습니다. 시체를 훔쳐간 것이라면 세마포로 싼 채로 가져갔을 것이 때문입니다. 세마포만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을 믿지 못하고 그저 놀랍게만 여겼습니다. 실제로 허탄한 것은 여인들의 말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일 때만 말씀을 순전하게 받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수난 예언의 성취임을 믿지 않는 한 그분의 부활을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열한 사도들에게도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이천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을 믿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과거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사건과 그 효력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더 나아가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오늘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 십자가의 흔적이 내 몸에서, 내 삶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볼 수 있게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삶이 보통 어떠했습니까?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고, 내가 주인이었습니다. 내 안에는 이웃도 하나님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그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내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며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니까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것으로 ‘원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서면 이웃에게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놀랍게도 그 죽음은 영원한 패배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죽였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길임을 증명한 사건이 부활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의 일상에 끼어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몸으로 계실 때 하셨던 일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정말로 예수님이 마치 살아 계신 것같이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 안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을 따라 자신을 비우고 버릴 때 바로 그 공간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세상은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1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몸으로’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상징’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부활신앙은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의 희생정신만을 이어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활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인격이 변하지 않는 신앙은 진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교회 안에 가두고, 성경책 안에 가두고, 내 경험 안에 가두고, 전통 아래 가두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채로 방치하거나 예수님을 여전히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 두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교리를 믿는 사람이 되고, 교회를 믿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단지 고백의 대상이고 추상적 이야기의 주인공일 뿐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임재하시는 분은 되실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것은 말씀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씀을, 양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양식을,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치유와 회복이 나타난 부활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나누어주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살아서 우리의 왕이 되시니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때 그 부활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부활을 경험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자세
-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뜨겁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별로 높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막달라 마리아는 한 명도 아닌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귀신에게 정신과 육체를 사로잡혀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소망 없이 살던 저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녀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기를 온전케 하여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기에 마리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실 때도,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수고가 수고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여 칠 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힘든 목동의 일을 능히 감당하였듯이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아침 일찍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하게 사모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받은 은혜를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헌신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지 않습니다. 할 수 있을 때 사랑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부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고 단지 ‘빈 무덤’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반복하여 말씀하였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어느 누구도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섭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활 신앙의 기초입니다. 여인들은 천사를 통해 부활의 기쁨 소식을 듣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낸 후 부활을 확신합니다. 반면 그 말씀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여러 차례 들었음에도 기억하지 못한 제자들은 여인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허탄한 말로 여기며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오늘도 온 힘과 마음을 다해 말씀을 듣고 기억하며 신뢰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큰 감격과 기쁨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비천한 목자들을 아기 예수 탄생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당시 사회에서 증인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던 여인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이며 세상의 구세주임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 부활의 증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 내려져 옵니다. 예수께서 연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하시고 부활을 깨닫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는 죽은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 하게 됩니다. 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을 경험하는 자들이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우리는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입술로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증거들이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의 빈 무덤과 천사의 증언과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고 그 사실을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더불어 중요한 구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것을 상징한다면, 빈 무덤은 구원받은 우리들이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질 것을 상징합니다. 십자가가 죄와 육에 속한 옛사람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빈 무덤이 증거 하는 부활은 영에 속한 새 삶의 출발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재판 받으시고 온갖 희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있어서 고통과 좌절과 절망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심으로 제자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주님은 부활 생명의 주로서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죽었던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죄악 된 우리의 과거를 씻기기 위하여 다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믿음의 탈선자들과 낙오자들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주님은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죽음보다 강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주기 원하십니다. 살다보면 시험에 들 수 있고 좌절하거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이삭을 붙드시고 야곱을 붙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붙드시기에 우리가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아리마대 요셉이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부활을 예비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행동에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신앙, 부활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힘쓰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