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성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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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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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막 14:12-26


개신교에서 드리는 성례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세례요 또 하나는 성찬입니다.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첫 출발에 해당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죄인인 나를 부르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먼저 믿은 성도들은 이제 믿기 시작한 성도를 격려하고 끌어주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성찬식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고 베푸신 사랑을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을 보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어떤 집 다락방에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탁이 차려집니다. 전통적인 유월절 만찬이 주님의 축사하심을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만찬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모든 성도들이 계속해서 기념해야 하는 성찬이 됩니다. 본문 앞에 언급된 시몬의 식탁은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기념하는데, 다락방에 있는 식탁은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유월절 만찬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성찬식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신 예수님(12~16절)
유월절은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을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니산월 즉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마가는 ‘유월절’을 ‘무교절의 첫날’이라고 합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해 한 주간(15일~21일) 계속됩니다(민 28:16~17).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유월절을 무교절에 포함시켜 하나의 절기로 간주했고, 이 절기를 유월절이나 무교절이라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마가는 이 날을 ‘양 잡는 날’이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12:6에 따르면. 유월절이 시작되는 14일 저녁에 양을 잡습니다. 유월절에 양을 잡으면 해가 진후에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는 순례자들이 많아지면서 13일 오후부터 양을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때가 이날 저녁입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면서 새날이 시작한다고 보았으므로 유월절이 14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 식사를 어디에서 들기 원하시는지 물어봅니다. 신명기 16:6은 유월절 식사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하도록 규정합니다. ‘장로들의 전통’(마 15:2)로 번역된 미쉬나에 의하면 유월절 식사를 예루살렘 성안에서 하도록 규정합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시면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를 따라 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들어간 집의 주인에게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면 집주인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으로 보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다락방이 마가의 어머니의 다락방(행 1:13; 12:12)일 수도 있습니다. ‘자리를 펴고’로 번역된 동사는 ‘자리를 깔다, 침대를 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기대어 누워 식사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을 반영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 내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를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합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데리고 다락방으로 가십니다. 그 다락방은 분명히 그 주인의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예비 되었을 때 ‘주님의 객실’이 되었습니다. 그 객실은 주님의 식탁이 마지막으로 차려지는 장소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이 시작되는 장소가 됩니다.

배반을 예언하신 예수님(17~21절)
유월절 식사는 보통 가족끼리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족 대신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가족으로 간주하십니다. 유월절 식사는 해가 저물어야 시작합니다. 식사를 하는 분위기가 어떠할까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기에, 출애굽을 준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날 밤에 느꼈던 불안과 긴장이 지금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도 느껴졌을 것입니다. 식사 도중에 예수님은 충격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예수님의 말씀 어느 하나 참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에 ‘진실로’란 말을 사용하십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이 말씀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밀약을 한 상태이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넘겨지는 것은 미래의 일이기에 “나를 팔리라”하고 미래형으로 말하십니다. ‘팔리라’로 번역된 단어를 직역하면 ‘넘겨줄 것이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넘겨질 것을 여러 번 예고하셨지만, 제자에 의해 팔린다는 말씀은 처음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마도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배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배반을 당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제사장들과 은밀히 거래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자기에 대해 말씀하시니 유다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로는 간이 콩알만 해졌을 것이요, 아마 식은땀을 흘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당연히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누가 이런 나쁜 일을 했다고 말하면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리게 마련입니다. “나는 아니지요?”제자들은 근심하면서 저마다 한 사람씩 물어봅니다. 그들은 자신이 배신자가 아님을 확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근심하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배신자가 자신일까 걱정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몹시 슬퍼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신당하고 팔려서 넘겨지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자들이 몹시 걱정하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라고 에둘러 대답하십니다. 원문에는 과거시제를 사용해 ‘넣은 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그릇은 음식을 찍어 먹는 소스 접시를 가리킵니다. 그릇에 손을 넣는다는 것은 친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식사한다는 뜻입니다. 곁에 앉은 유다를 암시하신 것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계략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인자를 파는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판 유다가 배신과 행악의 책임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았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정도로 유다 스스로 짊어져야 할 죄책은 무거웠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유다에게 있습니다. 끝내 회개를 거부한 자에게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던 마리아에게 허비한다고 꾸짖던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향유보다 값진 인생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새 언약의 만찬을 시작하신 예수님(22~26절)
원래 유월절 만찬은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고기는 애굽을 나오기 전 문설주에 발랐던 양의 피를 생각나게 합니다. 무교병은 미처 반죽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애굽에서 급히 나오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쓴 나물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의 고난을 생각나게 합니다. 거기에다 후에 포도주를 마시는 전통이 추가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이 끝나고 나면 집의 가장은 남은 무교병을 떼어 식구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는 성찬 예식은 바로 유월절 식사가 끝나고 난 후 그 집의 주인이 행하는 예식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는 모습은 앞으로 교회가 성찬식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과 교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어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떼어’로 번역된 단어는 ‘깨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찢기실 것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습니다.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신 행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계시하신 사건이고, 마지막 만찬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복을 가져다주실 분임을 예고합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받으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아람어에서 ‘몸’에 해당하는 단어는 ‘자신’을 뜻하므로, 예수님은 ‘떡’을 ‘내 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떡이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그 잔을 제자들에게 돌리십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전통과 달리 하나의 잔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하나의 잔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이 마시는 십자가의 고난의 잔에 동참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잔이 언약을 상징하므로 예수님의 피로 맺는 새로운 언약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린다는 것은 이사야 53:11~12을 연상시킵니다. “...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 본문을 배경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신 고난 받는 대속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누어 주신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십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이 체결될 때 사용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후 그 피를 가지고 제단 위에 뿌리고, 또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피를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선포했습니다. 스가랴 9:11에도 언급됩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예수님은 이런 구절들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흘리는 당신의 피를 언급하셨을 것입니다. 첫 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섬기고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새 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 즉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시내 산의 언약은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맺었으나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과 맺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지 600년 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오셔서“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 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를 기초로 맺어진 옛 언약은 폐기되고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한 새 언약 관계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언제 시작되는지 암시하십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포도주를 뜻합니다. ‘새것으로’라고 번역된 단어는 ‘새로’를 뜻할 수 있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 예수님이 포도주를 다시 마시는 때를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제공된 포도주를 거절하십니다(15:23). 그때는 아직 예수님 나라가 시작되지 않은 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에 제공된 신 포도주를 마시는데(15:36), 이때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이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셨는데(1:15),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 그 선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를 마친 후 찬양하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유월절 식사 후에는 시편 115~118편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숙소인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감람산으로 가신 이유는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가까이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감당하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십니다.

성찬의 의미
예수님은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는데, 이제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키며 그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락방 집주인에게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물으라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말씀 중에 ‘내가’‘내 제자들’‘나의 객실’하시면서 ‘나’를 강조하십니다. 예루살렘 성 안 다락방에서 베풀어진 식탁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식탁이요, 제자들을 위하여 베푸신 식탁이요, 예수님의 몸과 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는 식탁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이 주관하시도록 주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하시면 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시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 주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 주인은 새끼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두 제자가 그 나귀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놓았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식사가 준비되기 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두 제자가 있었고, 물 한 동이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고, 자기의 다락방을 유월절 만찬 장소로 제공한 집주인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헌신이 합쳐져 주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 우리가 미처 생각지 않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것을 드리기 원하십니까? 시간, 온전한 십일조를 포함한 물질, 달란트.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 주님의 백성이 참석합니다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기는 어처구니없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경고하셔서 그가 그릇된 결정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내 자기 생각을 철회하지 않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한 조각 받고나서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고 곧 만찬자리를 떠났다고 요한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13:30). 유다가 나가자 예수님은 성찬식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식탁에는 택함을 받은 주의 제자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성찬식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새 언약의 백성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품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 주님을 기념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찬에 대해 말씀합니다. “...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5-26). 성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구원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의 의의를 기념하는 것이고 그의 구원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찬을 일 년에 두 번 하든지 그 이상 하든지 성찬이 그저 의례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없이 참여하는 성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가 죽으신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의 죽으심을 전하기를 다짐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나가면서
성만찬은 예수님이 새롭게 만든 행사가 아니라 모세 때부터 지켜오던 유월절 의식에 새롭고도 깊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2:15에 의하면 예수님이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하시면서 제자들과 이러한 친교 나누기를 간절히 바라셨다고 하셨습니다.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것을 기념하는 절기에 주님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쳐 제2의 출애굽을 준비하셨습니다. 성찬식이 영어로 Eucharist인데 그 의미는 give thanks,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성찬의 떡을 먹으면서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기억하고, 잔을 들면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성찬을 제정하신 것은 유월절 만찬을 함께 나눈 열두 제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대의 모든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늘 감사하며,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시행하는 성찬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열릴 천국 잔치로 이어질 것입니다.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그들을 천국 잔치에 조대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참된 성찬의 의미를 깨닫고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면서 성찬식을 통하여 떡과 잔을 함께 나눔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됨을 깨달으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께 헌신을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