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세고 달고 나누시는 하나님

Author
Date
2025-02-10 04:06
Views
61
성경구절 : 단 5:1~31


이스라엘에 가면 ‘야드 바셈’이라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60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참상이 사실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곳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박물관에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독일인들이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독일인들을 안내하는 유대인 가이드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복수하기 위해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독일 사람들을 이미 용서했습니다.”우리는 시간이 흘렀어도 나치 만행과 그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유대인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야드 바셈 박물관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우리가 미국에 살고 있지만 8.15 역사의 교훈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왜 배웁니까? 단지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을 늘리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과 교훈을 얻을 수 있기 위함입니다.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의 능력을 키워 현재의 삶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 차례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그에 따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그 징벌을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반면에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경험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한 분별력 없는 왕으로 묘사됩니다. 우상을 찬양하는 가운데 사람의 손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쓰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에 벨사살이 다니엘을 불러 벽서의 의미를 해석하도록 합니다. 다니엘은 벨사살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했는데 다니엘의 예언이 그날 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본문을 각자의 삶에 비추어보며 우리에게는 벨사살의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신지 바로 알며 우리를 달아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벨사살의 잔치와 하나님의 경고(1~9절)
벨사살 왕이 귀족 천 명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벨론 최후의 날, 곧 주전 539년 10월 12일에 벌어졌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는 귀족과 왕후와 후궁들이 참여했습니다. 1절에서 잔치가 시작되며 술을 마셨기에, 2절의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는 왕이 이미 어느 정도 술기운에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은, 금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에서 ‘부친’의 정확한 번역은 ‘선조’입니다. 벨사살의 부친이 나보니두스였기 때문입니다. 그 그릇들은 50년 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탈취한 것들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것들을 자기 신들의 보물창고에 넣어 두었습니다(1:2). 하나님께 바치는 잔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벨사살의 죄는 단지 하나님을 모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금, 은, 구리, 쇠, 돌’로 만들어진 우상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흥청거리던 때에 하얀 ‘석회벽’에 손가락들이 나타나 글씨를 씁니다. 그 벽은 ‘촛대 맞은 편’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쓴 글씨는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벨사살도 벽에 쓰인 글씨를 보는 순간 얼굴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했고 심하게 떠는 바람에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였습니다. 여기 ‘부딪쳤다’는 동사는 ‘소리가 나게 때렸다’는 뜻입니다. 벨사살 왕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징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떠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지금까지 연회에서 보여준 오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습니다. 공포에 떨며 왕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연회 분위기는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었을 것입니다. 왕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렀습니다. 그 글자를 해독하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서열 3위에 올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지혜자들이 모두 모였지만 그 글을 해독하기는커녕 읽지도 못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지혜자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다니엘의 등장과 왕의 약속(10~16절)
그때 왕비가 잔치가 열리고 있는 궁에 들어왔습니다. 손가락들이 나타나 글을 쓴 것과 아무도 그것을 해독한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왕이 번민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왕비에게 알려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왕비’는 벨사살의 부인이라기보다는 느부갓네살 때의 일을 잘 알고 있는 느부갓네살의 왕비였거나 부친인 나보니두스의 아내 곧 느부갓네살의 딸인 니투크리스였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 시절에 다니엘은 박수장이었지만, 벨사살 시대에는 아무도 같은 직위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비는 다니엘을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 때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왕비가 제안합니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벨사살은 불려 나온 다니엘에게 “네가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라고 묻습니다. 포로로 잡혀왔다고 언급함으로써 다니엘을 무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큰 왕 느부갓네살이 인정한 지혜자들의 어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벨사살은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야기만 들어왔던 다니엘의 이상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사실인지 본인에게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왕비가 다니엘을 소개할 때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라고 소개했는데 벨사살은 ‘거룩한’이란 단어를 빼고 그냥 ‘신들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민족적 우월감에 빠져 있던 벨사살이 자신을 섬기는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글자를 해석하기는커녕 읽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내심 감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벽서의 배경을 설명하는 다니엘(17~24절)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 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고 말했지만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평생 지존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이미 팔순이 넘은 다니엘에게 그런 것은 관심 밖의 일입니다. 벨사살은 물질로 사람을 조종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면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는 말은 벨사살과 대조되는 다니엘의 모습을 부각시킵니다. 그가 벨사살에게 계시를 풀어 주는 이유는 재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글의 의미를 알게 하신 이상 왕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단지 그 글만 읽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글을 쓴 배경과 이유를 먼저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큰 권세가 주셨습니다. 그 권세 앞에 세상 백성이 떨었으며 그 권세를 인하여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거나, 높이고 낮추기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가졌던 막강한 권세는 벨사살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마음이 높아지고, 그 영이 완고해져서 거만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보니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추앙받던 느부갓네살이 졸지에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환난의 시기를 다 채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야 느부갓네살이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가장 높은 권세자가 되자,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깨달은 사실을 조서로 남겨 온 나라 백성에게 공포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제 벨사살을 향해 경고합니다. 다니엘은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벨사살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직계 자손’이라는 의미입니다. 23절은 5장의 핵심 구절입니다. 벨사살이 느부갓네살 왕의 역사를 알았더라면 마땅히 마음을 낮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그릇으로 술을 마시며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이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말은 회개를 축구하는 마지막 통첩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선고입니다. 느부갓네살 왕과 벨사살 왕에 대한 심판 선고는 대조적입니다. 모두 경고를 받고, 불순종으로 인해 형벌을 받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한 심판은 그루터기를 남겨 놓은 은혜의 여지가 있는 심판이었지만, 벨사살 왕을 향한 심판은 회복의 기회가 없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입니다.

벽서를 읽고 해석하는 다니엘(25~31절)
다니엘은 벽서를 아람어로 읽었습니다. 그가 아람어로 읽었다면 거기 있던 박사들이나 지혜자들은 왜 그것을 읽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내용은 아람어처럼 읽었지만 쓰인 글자는 누구도 읽지 못하는 특별한 문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곳에 있던 자들은 다니엘이 그것이 읽은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글씨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벽서를 읽은 다니엘은 이제 그 뜻이 무엇인지 해석을 합니다. 문맥을 고려할 때 벨사살이 통치하는 바벨론의 운명과 관련해 해석해야 합니다. ‘세다’라는 뜻의 메네는 ‘끝났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라고 해석합니다. 데겔의 어근도 ‘세다’라는 뜻입니다. 문맥을 고려할 때 ‘세어보니 부족하다’는 뜻이 암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라고 해석합니다. 베레스는 ‘반’이라는 뜻인데, 다니엘은 반으로 나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페레스’는 또한 페르시아인을 암시합니다. 이 언어유희를 통해 이 나라가 나뉘어서 페르시아인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이중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라고 해석합니다. ‘준 바 되었다’는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결정되어 벨사살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벽에 쓰인 글씨는 벨사살 왕과 바벨론 왕국의 멸망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야말로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본문에는 벨사살 왕의 회개나 후회도 나타나지 않고, 자비를 간청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해석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약속대로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고 셋째 통치자로 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들을 모독하며 하나님께 불경죄를 범한 벨사살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고레스의 침략과 정복은 주전 539년 10월 10일이고, 12일에 고레스의 사령관인 고브리아스가 바벨론에 무혈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연회가 열리고 있던 왕궁에 침입해 왕을 살해했습니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인들의 바벨론 포위 공격에 대한 기록을 전합니다. 고레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흐름을 바꾼 후 성벽에 강물이 흘러가던 통로로 보병 중대를 투입했을 때 전쟁이 끝났다고 합니다. 나보니두스가 없는 중에 페르시아 군대가 전쟁 없이 바벨론을 함락했다고 합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다고 기록합니다. 메대 바사의 왕들 가운데 다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세 명이었는데 재위 연대를 비교해 볼 때 본문과 일치하는 왕은 없습니다. 가장 타당한 해석은 다리오와 고레스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삶의 자세
- 부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벨사살은 천명의 귀족들을 초대하여 엄청나게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에스더 1:1~4에서도 아하수에로 왕은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180일간 지속되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보통 왕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으나, 벨사살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에는 왕비를 포함하여 여인들도 참석하여 술을 마시고 즐겼습니다. 이런 상황은 바벨론이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부와 권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심지어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 삶에 합당한 종말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주신 것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벨사살의 잔치 자리에서 벽에 쓰신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세고, 무게를 달고,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벨사살에게 주신 경고와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벨사살의 행위를 세어보고 저울로 달아 보았는데 벨사살의 행실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미달해 바벨론을 그에게서 취해 메대와 바사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벨사살은 자기가 가진 권력을 가지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교만 속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보거나 듣지도 못하는 우상에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저울에 미치지 못했던 벨사살과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세상의 주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벨사살은 자기가 이 세상을 ‘세며, 무게를 달고, 나누면서’산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세고, 달고, 나누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에 의해 세어지고, 무게에 달려, 그 기준에 모자라면 책망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며 참 주인 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내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벨사살은 다니엘로부터 벽에 쓰인 글자에 대한 해석을 들은 후 바로 그날 밤에 그 글자에 나타난 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급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명이나 되는 귀족들과 함께 산해진미를 쌓아 놓고 즐기던 벨사살이 바로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그 나라가 메대 사람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같이 세상의 권력은 사상누각과 같아 하나님께서 치시면 그날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징계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실행이 조금 더디게 나타난다고 안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벨사살처럼 자신이 쌓은 부와 권력이 영원히 지속되고, 그것이 자신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는 헛된 확신 속에서 산다면, 오늘 밤 우리에게도 벨사살에게 인한 그 징계가 신속히 임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벨사살은 그가 벌인 잔치자리에서 술이 취하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 은으로 만든 그릇들을 가져다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기물들을 술을 마시는데 사용하다니 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동입니까? 요즘으로 친다면 성찬기에 술을 부어 마시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벽에 손가락들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을 본 벨사살은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어 등장한 다니엘은 선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폐위되었다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과 위엄을 깨닫게 된 후 회복되었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에게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신 분이 벨사살이 무시한 하나님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벽서를 읽을 수도 없었는데 다니엘은 쉽게 읽고 그 자리에서 해석까지 했습니다. 벽에 쓰신 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능력도 없고 이 세상의 조롱에 무기력한 것 같지만 벨사살은 그 말씀대로 패망하였습니다. 벨사살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신이 세상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사실은 결국 그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어 보시고, 무게를 달아 보시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자 나누셨습니다. 부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니엘 때뿐 아니라 지금도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니엘서를 읽는 유다 사람들도 자신들의 포로생활 속에서 낙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무능력을 느꼈을 수도 있으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고 소망하는 교훈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벨사살과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을 드라이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사시대 사람들처럼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면(삿 17:6; 21:25) 벨사살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진리를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달아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근신하고 겸손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시간, 물질, 달란트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면서 훗날 우리를 결산하시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