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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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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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단 3:13-23


다니엘과 세 친구를 향한 하나님의 시험은 계속 됩니다. 1장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부터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채식을 한 그들이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살을 윤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셨고, 특별히 다니엘에게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아는 능력을 더 주셨습니다. 2장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꾼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추상같은 명령을 바벨론 지혜자들에게 내렸습니다. 이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합심하여 기도한 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왕 앞에 나아가 꿈의 내용과 해석을 알려준 결과 다니엘은 왕궁에서 세 친구는 지방에서 각각 고위 관리가 되었습니다. 3장을 보니 이번에는 세 친구에게 문제가 주어집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세 친구가 어떻게 믿음을 사용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생깁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금 신상 숭배의 배경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본 신상의 머리는 순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넙적 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하면서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의 금 머리에 해당되며 하나님의 권세를 제일 먼저 그리고 크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벨론은 강하지만 멸망을 피할 수 없고 이어 등장하는 나라들은 전보다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나라들 이후에 세워지는 한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 했습니다. 왕은 자신의 나라가 멸망하리라는 해석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영원하게 만들려는 헛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꿈에 본 모습을 따라 금으로 높이가 육십 규빗(27미터)이고 너비가 여섯 규빗(2.7미터) 되는 매우 홀쭉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신상의 낙성식에 정부고위관리들을 참석시키고 악기 소리가 들릴 때에 금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마침 무리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참석했습니다. 아마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기에 금 신상에 세워진 두라 평지까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라 금 신상에 엎드리어 절하지 않고 뻣뻣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일러바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로 끌려온 유다인들이 주류인 자기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그들을 제거할 좋은 구실을 찾게 된 것입니다. 고소 내용을 보면 왕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가 자기의 직분을 지혜롭게 그리고 성실하게 잘 처리함으로 하는 일로는 책잡을 것이 없으니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격한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다시 한 번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에 절하게 함으로써 영적으로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세 친구처럼 목숨이 달린 것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신앙생활을 교묘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의 가정, 교회, 직장, 삶의 현장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13~18절)
느부갓네살은 거대한 제국을 통치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포로 된 사람들 중에서도 인재를 등용할 정도로 열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상 숭배자였기에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신상에 절하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섬기는 유다 백성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이 신상에 절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였으나, 신상에게 절하라는 명령만은 따를 수 없었습니다. 참소하는 자들을 통해 그들이 절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하여 그들을 당장 끌고 오도록 했습니다. 왕은 갈대아인의 반감을 살 정도로 그들을 총애했습니다.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였지만 높은 지위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들이 왕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 친구를 끌고 오자 왕은 그들을 회유합니다. 먼저 세 친구의 행동에 대해 사실 확인을 합니다.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왕은 세 친구의 대답도 듣기 전에 이 일이 사실임을 전제하고, 그들이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이제부터는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신상 앞에 절하는 시점을 알리는 악기 소리를 들으면 신상 앞에 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자신의 명령을 어길 시에는 이미 공포한 대로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그들을 던지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믿는 신을 향해 조소 섞인 도발을 합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이 질문은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신이 결코 그들을 건져 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수사적 표현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통해 꿈에 대한 해석을 들으면서 여호와의 능력에 압도되어 여호와는 모든 신들의 신이라는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2:47) 참으로 회심한 것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 대해 망령된 말을 합니다.

왕의 말을 들으면서 세 친구는 그 동안의 자기들의 생애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전쟁에 져서 기구하게 포로로 끌려왔던 일, 다니엘과 함께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했던 일, 왕의 꿈을 인하여 죽을 뻔 하였으나 다니엘과 함께 기도한 후 극적으로 살아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어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높은 관직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그동안 누리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한 것은 어느 신도 그들을 건질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이 상황을 왕과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들이 풀무 불에 던져져 죽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지만, 구원 여부는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친구는 왕에게 담대히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하나님을 의지하여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릅니다. 구원 여부로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하려는 왕의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그렇지만 하나님이 지금 자기들을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혹시 우리가 풀무 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거나 금 신상에게 절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들이 절하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와 절하지 않으면 뜨겁게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협박 속에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비록 풀무 불에서의 구원 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들의 생명을 맡깁니다. 주님으로 인한 손해나 비난은 조금도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실속만 챙기려는 유혹을 받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풀무 불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며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는 세 친구의 모습이 큰 도전이 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세 친구는 위기 속에서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믿음은 기적을 낳습니다(19~27절)
느부갓네살 왕의 회유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자 왕은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분에 가득한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던져 넣을 풀무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일곱 배’는 최상급의 의미로,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뜨겁게 하라는 뜻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그 세 사람을 풀무 불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는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군대 가운데 가장 강한 몇 사람’이 됩니다. 분노한 왕과 힘센 용사들 그리고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 불까지, 세 사람이 현 상황에서 빠져나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겉옷’, ‘속옷’, ‘모자(터번)’와 다른 옷을 입은 채로 던져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은 어떤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 사람이 입은 옷이 전혀 타지도 않았고 색깔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풀무는 쇠로 만들어졌고, 벌집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 있는 뚜껑을 열어서 그 안으로 사람을 던졌습니다. 옆쪽에는 문이 있어서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용사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에 던져 넣기 위해 풀무 가까이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최대 출력으로 열을 뿜기 위하여 풀무는 평상시보다 더 세차게 바람을 넣다 보니 불길과 엄청난 열이 풀무 밖으로 새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 친구를 붙들었던 자들이 도리어 타 죽습니다. 만약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 불에 던진다고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용사들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 사람은 결국 ‘결박된 채’불 속에 던져집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세 친구가 던져진 풀무 불 안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놀라서 일어납니다. 분명히 세 사람이 풀무 불에 던져졌는데, 또 다른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사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그들이 맞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는데 그들이 뜨겁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아니라 평안히 거닐고 있습니다. 왕이 보니 넷째의 모양이 신들의 아들 같다고 합니다. 아람어로 된 ‘신들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신적 존재를 말합니다. 신들의 아들이 천사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신학적인 논쟁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세 친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존재를 보내셨다는 점입니다. 세 친구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실제로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느부갓네살 왕은 맹렬히 타는 풀무 불 입구에 가서 세 친구를 향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세 친구가 풀무 불에서 나옵니다. 그러자 왕과 주변에 있는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세 친구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불이 그들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았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조차 없습니다. 세 사람의 모습을 왕 주위에 있던 자들이 다 보았다는 것은,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이는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는 느부갓네살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28~30절)
2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통해 은밀한 것을 알려 준 존재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지만, 그 대행자인 다니엘에게 절하고 예물과 향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왕이 세 친구가 믿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왕은 세 친구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버려 왕의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왕은 세 친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자기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 세 친구를 구원하셨다고 하며 자기의 손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종들을 구원해 냈다는 것, 곧 자기의 패배를 시인합니다. 왕은 이제 ‘조서’를 내립니다. 그것은 법적인 효력을 발생하는 포고를 의미합니다. 그 자리에는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온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과 함께 이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조서의 내용을 보면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모두 풀무 불에 던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느부갓네살이 이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에 대해 경솔히 말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 터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경솔히 말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말이나 적절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명령은 아니었지만, 느부갓네살은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라고 고백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단지 유다 백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방 땅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세 친구는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믿는 자들을 실족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더 큰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1:7). 다니엘 때는 세 친구가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뜨거운 풀무 불 가운데 던져졌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자기 행위대로 정죄를 받고 뜨거운 불 못,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계 20:14).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뜻대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3장에 나타난 세 친구들의 스토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다가, 다니엘이 전해주는 꿈의 내용과 해석을 들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주신 계시였습니다. 바벨론 왕국이 지금은 번성하지만 결국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왕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 왕으로서는 충격적인 말이었으며, 그 해석을 듣고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벨론을 망하지 않는 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그래서 왕은 꿈에서 본 대로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관원들을 불러서 그 앞에 절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나라가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에 절하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 제국의 고위 관리로 조용히 그리고 편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때가 되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은 그들의 믿음을 달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이 여호와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친구가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우리의 신앙을 담대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 범사에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위협하면서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말에서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신’의 도움으로 ‘내 힘’을 강화하여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자신들을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낼 분’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왕의 신을 결단코 섬기지 않겠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가 어떻게 왕의 회유와 풀무불의 협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왕의 진미를 거부하면서 환난을 이겼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함께 기도하며 왕이 꾼 꿈과 그 해석을 알아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단판 승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고 작은 싸움이 매일 벌어집니다. 작은 승리를 계속해서 경험한 사람이 큰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 친구를 구하시겠다고 풀무 불을 끄지 않으셨습니다. 풀무 불에 던져지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풀무 불안에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측대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는’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대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를 인하여 세상의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하나님을 우리 생각대로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돈과 건강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때로 약하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마지막에 죽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믿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신앙입니다. 고난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자기의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을 드립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하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3장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신앙의 절개와 하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구원 사건을 통해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본문의 이야기의 핵심은 느부갓네살 왕과 세 친구의 대결인 동시에 바벨론의 신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결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과 세 친구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금 신상에게 절하라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으로 시작해 세 친구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는 자는 벌하겠다는 왕의 조서로 끝납니다. 이로써 포로 시대를 살아가는 유다 백성에게 이방 땅에서 살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때로는 고난은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움직이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하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교훈을 줍니까? 믿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기적을 낳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 굴하지 않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고백하며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