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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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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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주일예배 때 이사야 43:15-21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하나님의 권능 가운데서 우리의 조상들은 홍해를 건넜는데 지금 우리들은 왜 이런 상황에 있는가 하며 현재의 형편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 것을 촉구하시면서 하나님은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약속하셨습니다. 새 일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2025년에 하나님께서는 교우들의 가정과 사역과 사업에 새롭고도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일을 하시기에 새 일을 행하시기에 앞서 먼저 그들을 준비시키십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위기의 상황에서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믿음이 빛이 납니다. 그들의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복을 주시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2025년은 을사년, 푸른 뱀의 해라고 합니다.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리더십이 바뀌는 변화의 한 해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아름답고 건강하게 부흥하도록 온 교우들이 주 안에서 뜻을 정하고 한 마음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서의 배경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이 반영하듯, 다니엘서는 종말론적 메시지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왕족 또는 귀족의 자제인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주전 605년에 인질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세 차례에(7,8,9장)에 걸쳐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도 페르시아를 섬기며 고레스 3년에 다시 환상을 보았습니다(10~12장). 따라서 다니엘서는 여섯 역사 이야기와 네 환상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다니엘 전반부(1~6장)에서는 역사적 서술을 통해 하나님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어떻게 지켜주시는지 보여 줍니다. 그래서 포로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행한다면, 하나님이 동일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위로를 줍니다. 반면 후반부(7~12장)의 환상들은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도래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 나라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방 제국들이나 열방의 국가들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존재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다니엘의 묵시는 박해자들에게 멸망을 선언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신약에 계시록이 있다면 구약에는 다니엘서가 있습니다. 두 책은 환상, 예언, 상징, 종말의 메시지를 다루기 때문에 신비롭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의 끝과 시작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마지막에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오늘도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에게 지지 말고 승리해야 합니다.
포로 시대의 시작(1-2절)
주전 7세기 말엽에 바벨론 왕조는 앗수르를 누르고 근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파한(60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다니엘서 저자는 여호야김 3년을 포로기의 시작으로 봅니다. 이때가 주전 605년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야김왕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유다를 정복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넘기셨다’는 것은 유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지키려고 하셨지만 능력이 부족해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에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게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릇 얼마’를 가져갔다는 것은 주전 605년에 그릇 일부를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유다가 멸망한 후에 나머지 그릇도 가져갔음을 암시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은 가져간 그릇을 시날 땅에 있는 자기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습니다. 시날 땅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에 위치한 바벨론의 다른 이름입니다. 당시 국가 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성전 그릇을 바벨론으로 옮겨간 것은 고대 근동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신이 사로잡혀 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 신들의 경우에는 그 신상을 옮기면 되지만, 여호와는 신상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바쳐졌던 성구를 대신 옮겨간 것입니다. 후에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이 그릇들을 가지고 왔습니다(스 1:7~11). 다니엘이 ‘하나님’을 ‘아도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도나이’는 소유주, 지배자,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유다가 패하고 유다 왕이 잡혀가고,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들이 노획되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아도나이’가 되십니다. 그뿐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세상의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느부갓네살은 그 도구일 뿐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앞에 정관사를 붙여 주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고, 세상의 나머지 ‘신들’은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의 훈련계획(3~7절)
느부갓네살은 유다 정복 직후에 유다 자손 중에서 인재를 발탁해 왕국의 일을 맡길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 계획은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바벨론 제국의 방식이었습니다. 인재를 발탁하는 임무는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맡았습니다. 왕궁에 설만한 인재의 지격은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자입니다(4). 흠이 없는 것은 제사장(레 21:16~24)과 제물의 조건(레 22:19~21)으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바벨론에서 인재의 조건으로 여겨지는 것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왕족의 특징입니다. ‘통달한 자’라는 단어는 후에 고난과 죽음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인 ‘지혜로운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습니다(12:3). 다니엘이 ‘소년’(4절)으로 소개됩니다. 이 단어는 10대 이하에서 30대 초반까지도 가리킵니다. 페르시아의 젊은이들은 보통 14세부터 정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바벨론도 비슷한 시기에 학문을 교육하기 시작했다면 당시 다니엘의 나이를 14~15세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의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성숙한 모습은 그가 어린 소년이라기보다는 오히려‘청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3년 과정의 특별 프로그램은 바벨론 포로민의 정책의 일환으로 충성스러운 바벨론 신복의 양성, 민족적 동화와 왕권 강화 등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과정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한국의 고유문화, 한국의 정신을 말살하려던 것과 비슷합니다.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을 고쳐 주었습니다. 다니엘은‘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재판장)’, 하나냐는 ‘여호와가 은혜를 베푸신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인가’, 그리고 아사랴는 ‘여호와가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름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엘’, ‘야’가 들어 있습니다. 이 전형적인 유다식 이름들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개명된 이름인 벨드사살은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소서’, 사드락은 ‘아쿠의 명령’, 메삭은 ‘누가 아쿠의 신인가’그리고 아벳느고는 원래 아벳느보로, ‘느보를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새 이름 모두 바벨론 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벨’은 바벨론의 주신 마르둑 신이고, ‘느보’는 마르둑 신의 아들입니다. 사드락과 메삭의 이름에 있는 ‘악’은 알의 신 ‘아쿠’를 가리킵니다. 이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방 종교의 의미를 갖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바뀌는 것에 그들이 저항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 저자는 다니엘에 대해서는 바뀐 이름 벨드사살을 오직 여덟 번만 사용하고, 원래 이름인 다니엘을 70번 이상 사용합니다. 디아스포라들은 바벨론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꾸기는 했지만, 일상에서는 히브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한계 안에서 간접적으로 저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요청과 열흘 동안의 시험(10~16절)
유능한 인재로 선발되어 바벨론에 끌려온 다니엘이 궁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는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다니엘의 믿음을 달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특별교육을 받으며 최고의 음식이 공급되는 것을 인하여 만족할 상황인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뜻을 정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받아들여도 여호와 신앙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급되는 왕의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려는 경건한 백성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음식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출 34:15,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라고 경고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선택입니다. 왕이 제공한 음식물을 먹을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시비를 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확고한 신념과 고귀한 목표를 세우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자세를 취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을 기특하게 여기셔서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주지 않도록 청했을 때 환관장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하셨습니다. 만약 포로로 끌려온 주제에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무조건 주는 대로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했다면 다니엘도 별수 없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든지 아니면 거부한 것을 인해 커다란 곤욕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요청을 받고 환관장은 오히려 다니엘에게 호소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즉 왕이 소년들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정했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이 초췌해 또래 소년들만 못하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환관장이 왕의 명령을 이유로 다니엘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자 다니엘이 이번에는 자기를 감독하는 자에게 다가가 대안을 제시합니다. 자신들은 왕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도 몸 상태를 남들보다 더 좋게 유지할 수 있으니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달라는 것입니다. ‘채식’은 직역하면 ‘씨앗’입니다. ‘씨에서 자란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채소뿐만 아니라 과일, 곡식, 빵 등을 포함합니다. 열흘 동안 물과 곡식을 먹은 후에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하여 자기들의 모습이 초췌하다면 처분대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판단과 결정을 감독하는 자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그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다니엘의 제안은 채식이 육식보다 건강에 좋다는 현대적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불과 열흘 동안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좋아 보였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감독하는 자는 지정된 음식과 포도주 대신에 채식만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과 친구들은 채식을 하게 됨으로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인하여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임한 복(17~21절)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모습을 보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소년들보다 용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지적인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문과 그 밖의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셨으며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꿈과 환상을 깨달아 아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드디어 삼년의 훈련과정이 끝나고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이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이 다른 소년들보다도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상의하면서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그 나라의 술객과 박수보다도 십 배나 나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이 고레스왕 원년까지 쓰임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1차 유다 침공 때 주전 605년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때 다니엘의 나이가 15세쯤이라고 한다면, 3년간 교육을 받고 나서 바벨론 왕 앞에 섰으니 18세에 대제국의 관료가 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605~562 BC) 1년부터 바사 제국 고레스왕 때까지 거의 70년간 바벨론과 바사의 고위 관료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바뀌고서도 이렇게 직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셔서 계속해서 쓰임 받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자신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보다 더 오래 남아서 그 나라의 멸망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전 539년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다인 포로들이 귀환하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머나먼 이방 땅 포로지에서, 절망과 어둠의 땅에서도, 위기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난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하늘의 별(단 12:3)이었고, 시대의 횃불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결단하는 것을 보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을 때, 그의 조국은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제로 바벨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그는 유다인 다니엘이 아니라 포로 벨드사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 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율법을 준수하려는 다니엘의 노력은 헛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왕의 음식을 거부한 다니엘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현실은 암담하고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럴지라도 다니엘은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실 뿐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정신에 따라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렇다고 다니엘이 이방인들과 불필요하게 갈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식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창씨개명을 결사반대 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우라 하셨습니다.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지며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극한 온유함과 겸손함을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것과 신앙이 부딪칠 때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믿음으로 뜻을 정합니다
다니엘은 요셉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남의 나라에 끌려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꿈을 잘 해석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꿈 해석을 잘함으로 출세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왕 다음가는 둘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이방인들의 사이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런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유지하였습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실천한 결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지혜와 명철을 가졌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 귀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을 살기로 뜻을 정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하지 아니하였던 것까지 넘치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삼상 2:35,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새해에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뜻을 정하여 나아가면서 신통, 인통, 물통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믿음의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소년들 중에 유능한 인재로 선발이 되어 최고급의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기 거절하였습니다.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다니엘 혼자만 있었더라면 그와 같은 담대함을 갖거나 실천하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뜻을 같이 하는 세 친구가 있었기에 자기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새해에는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여 주는 소그룹에 적극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목장이나 사역부서나 신앙의 모임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성령에 이끌리는 좋은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 차세대를 믿음으로 키워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왕궁의 사무를 맡길 만한 유능한 청년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 즉 갈대아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야 할 청년들의 생각이 갈대아 사상으로 채워지고, 그 이름까지 바뀌어 신분에 혼동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위기입니다. 고등 교육을 시키고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최대한 배려하는 듯 하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3년 동안 바벨론 식 교육을 받았고 왕도 인정할 만한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은 엄청난 영적 고통을 수반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속화의 물결이 거칠게 밀려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그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알게 모르게 세상의 사고방식, 가치관에 영향을 받습니다. 전통적인 가치관, 특히 기독교적 가치관이 더욱 흔들리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배경과 지적 수준을 보면 그들이 이미 유다의 지혜 학교에서 상당한 교육 과정을 밟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 이미 언약과 율법에 대한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이 받은 신앙교육은 바벨론식 교육을 받으면서도 여호와 신앙을 굳게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신앙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식 전략의 최후 목적은 종교적 동화요 신앙의 무력화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전략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세상을 변혁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서부터 신앙훈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이 좋을지라도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전하지 못할 때 자녀들은 그저 자기들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자식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건한 자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합니다. 물질을 많이 남겨 주기보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신앙을 남겨 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새해에는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기도하고 대화를 나눌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마귀는 여전히 교묘한 방법으로 믿는 자라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를 하지만 우리가 기도와 말씀의 토대 위에 굳게 서 있으면 오늘날도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금은 결단의 새아침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가정, 직장, 교회에서 어떤 뜻을 정하고 주님께 순종하기 원하십니까? 뜻을 정하고 결단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의 음식”과 “포도주”와 같이 교묘하게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보를 막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뜻을 정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차세대를 믿음으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스럽게 살아 하나님을 존귀케 하는 한 해가 되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교우들의 가정과 사업과 사역에서 풍성하게 복을 받고 누리는 2025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