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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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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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2:8~14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아기들이 태어나고 있지만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보다 더 위대한 탄생 스토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아주 독특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니 온 땅이 함께 기뻐하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기념하며 성전에 모여 특별감사예배를 드렸다는 말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다루기에 앞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수태 기사를 소개했습니다. 마태복음이 아버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춘 반면,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순종과 기쁨의 찬양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후대에 ‘나사렛 사람’으로 알려진 예수님이 어떻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을 방문하였다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고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에 뉘었습니다. 구세주요 주님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우주적 사건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소식이 들에서 밤새워 일하던 목자들에게 처음 전해졌습니다. 천군 천사의 대합창이 그들이 일하던 들판에 울려 퍼집니다.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살펴보며 진정으로 그분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 변방인 유대 땅에서 나셨습니다(1~2절)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나신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역사 속에 개입하신 것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스리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그 황제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인데 쥴리우스 시이저의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그가 주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로마제국을 한 손에 쥐게 되었고 주전 27년 ‘아우구스투스’(존중 받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제국의 통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세금 재원을 파악하고 유사시의 군대 동원 능력을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렸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들만의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유대와 같은 식민지는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착취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구례뇨는 그 착취를 실행했던 자로서, 시리아의 총독으로 유대의 통치권을 맡았습니다. 그는 유대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징수하다가 유대인들의 폭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주’라고 불렸으며, 황제의 아기의 탄생이나 방문 소식은 ‘복된 소식’으로 불렸습니다. 거짓된 주, 거짓된 복음, 거짓된 신들이 판치던 로마제국의 변방 한 구석, 즉 팔레스타인 남부에 위치한 유대 땅에서 세상의 참 구주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 변두리 성읍인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3~5절)
모든 사람들이 호적을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요셉은 유다 지파 중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동네’로 불리는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여자는 호적할 때 같이 갈 필요가 없었으나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까지 가자면 보통 사람도 삼일 이상은 걸리는데 만삭이 된 마리아를 이끌고 갔기에 아마 며칠은 더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요셉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으로 간 것 같으나 그 뒤에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미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예언하였는데,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가 650여년 전에 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로마의 황제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마리아가 해산할 즈음에 그동안 살아오던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에 있게 함으로 그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느라 서민들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겪던 시절에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풍요를 상징하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나신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풍성하게 임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변두리 장소인 구유에 누우셨습니다(6~7절)
드라마나 칸타타를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 스토리를 아름답게 재연하려 하지만 예수님 탄생 당시의 상황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작은 동네인 베들레헴에 호적을 하러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머물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여관을 뜻하는 헬라어 ‘카타뤼마’는 객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눈 곳도 객실, 곧 다락방이었습니다. 객실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던 요셉이 만삭이 된 마리아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당시의 보통 사람들의 가옥 구조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기거하는 형태여서, 칸막이 하나로 사람이 머무는 숙소와 가축이 있는 축사를 구분했습니다. 들어갈 방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축사라도 찾아 그곳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산파가 곁에 있는 것도 아니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쾌적한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그 밤에 해산을 해서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의 ‘첫아들’이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이 7절에 간단히 나와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강보로 쌌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이를 감싸기 위해 몸 전체를 천으로 단단히 싸매는 것을 말합니다. ‘구유’란 소나 말 또는 나귀가 여물을 먹는 그릇, 즉 여물통을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마리아는 자기 몸에서 날 아이가 장차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인 것을 알았기에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구유에서 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태어나면 안 되는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예수님의 출산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높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무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한테서, 그것도 같은 다윗 집 가문 사람들에게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소외와 무관심, 이것이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실상입니다.

변두리 인생들에게 탄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8~12절)
베들레헴에 있는 어느 집 축사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이 장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구주이신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의 탄생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베들레헴 마을 밖 적막한 들녘에서 자기의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왜 변두리 인생들로 취급받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졌을까요? 춥고 어두운 밤에도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목자들이 어쩌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었습니다. ‘주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한밤중에 빛난 주의 영광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천사와의 만남인지라 그들 모두는 두려워 떱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예수님의 탄생이 큰 기쁨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구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행위를 ‘유앙겔리조마이’라는 동사로 표현됩니다. 같은 어근의 명사 ‘유우앙겔리온’은 바로 ‘복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좋은 소식’은 신으로 추앙받던 ‘황제의 아들 탄생’과 ‘전쟁의 승전보’를 의미하는 용어였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오늘’은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실존적 만남의 시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주요, 그리스도요, 주라는 천사의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큰 기쁨과 평화를 준 황제로서 신격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야말로 온 세상에 큰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구유에 뉘인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분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나 부자, 여자나 남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이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나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보는 포대기를 말합니다. 보통 부잣집 아기들은 고운 세마포 같은 것으로 싸지 포대기로 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쌀 것이 없어 포대기를 사용하였고 또 구유에 뉘었습니다. 목자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기 위하여 일일이 집집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찾기 쉬운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허름한 곳에 계신 예수님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야말로 자신들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하여준 말들이 다 이루어진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높이며 자기들이 양 치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자들은 그 밤에 양을 돌보면서도 피곤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신세타령도 않았을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의 찬송(13~14절)
천사가 목자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 전하는데 갑자기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의 찬양은 구주 탄생의 기쁨이 실제로 천상의 세계에 가득함을 보여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사람은 원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사람은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자신의 영광과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원래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 계획에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 우주에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이 이제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는 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빛과 삶이 임하는 곳에 회복과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눈먼 자, 포로 된 자, 눌린 자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란 인간이 누리는 번영과 복지, 건강과 평안을 다 포함한 넓은 의미의 평강입니다. 히브리 말로 shalom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누리는 행복이며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평화가 임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주도권과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사도 바울도 평화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인간의 노력이나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촌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가난과 기근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화평의 주님을 전함으로 그들도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탄생과 재림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며 그 가운데 인간을 지으셨고 그들의 타락 후에도 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탄생은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셨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 적막한 베들레헴 밖들에서 허다한 천군 천사들의 장엄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탄생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을 베푸십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삶에 소망과 치료를 주십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합니다. 인상을 쓰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모습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참 평화를 누리게 하신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주님을 닮아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을 범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권과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시되 구유에 누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누이신 곳이 구유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도 천대 받던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며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처럼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셨기에 우리가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을 참으로 이해하실 수 있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는 용서받지 못할 큰 죄가 없고 치료받지 못할 중병이 없고 해결 받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고후 8:9, “부요하신 자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심이니라”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겸손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들은 대로 구주를 보기 위해 서둘러 베들레헴까지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서 보고 이 아기에 대해 천사가 말한 대로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구세주요, 메시아요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며 이루어진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습니다. 복음을 들었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나실 때는 천사들이 그 소식을 알려주었으나 이제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인간관계가 어색해지거나 서먹서먹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이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번에 가정이나 교회나 삶의 현장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바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동들과 같이 우리 모두가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이 기쁜 소식을 듣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들을, 행하신 일들을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나가면서
짐승의 냄새가 나는 더러운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낮아지심은 우리를 높아지게 하심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가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찾아오셔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삶에 소망과 치료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의 영화는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구유에서 나심으로 시작한 예수님의 역사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고 이 아침에 저희들도 주님의 나심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에게는 가장 크고 좋은 소식이요 기쁨이 됩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나실 때는 천사들이 그 소식을 알려주었으나 이제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 아직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주는 소망과 위로와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탄절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주님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주의 나심을 기념하는 이 계절에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며 주님께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