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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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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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39~56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로 역사는 BC와 AD로 나뉩니다. 죄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소망이 없던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 전후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룹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는 구속 드라마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순종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나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평범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인가 있기에 그들을 불러 사용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내로서 나이 많아 늙기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안타까워하던 엘리사벳이나 평범한 시골 처녀인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신 여인들입니다. 엘리사벳은 기쁨으로 마리아와 그 태중에 있는 아이를 축복했고, 마리아는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은 지금의 우리 삶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당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기뻐하려야 기뻐할 것이 별로 없던 시절인데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기뻐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감격에 찬 찬양을 부르게 하였을까요? 환경을 초월하여 기뻐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요 복 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알고자 합니다.

두 여인의 아름다운 만남(39~45절)
누가는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한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천사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유대의 산골마을로 서둘러 갔다는 점입니다. 나사렛에서 유대 산지까지는 열심히 걸어도 3-4일 걸리는데 이를 통해 마리아의 기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은 천사가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마리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마리아가 몰랐다면 굳이 그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녀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사는 곳이 ‘산골’, ‘유대 한 동네’로 소개되는데, 사가랴의 집이 예루살렘 밖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리아의 문안을 받을 때에 엘리사벳의 아이가 복중에서 뛰놉니다. ‘뛰놂’은 양이나 어린 짐승들이 껑충거리며 뛰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기쁨과 흥분에 겨워 뛰어오르는 모습입니다. ‘뛰놀다’라는 동사가 누가복음 6:23에서 ‘그날에’라는 종말론적 표현과 함께 사용된 것을 고려할 때, 그 아이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보고 기뻐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느 정도 자란 아기가 복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자연 현상이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자신의 뱃속에서 아이가 기쁨으로 뛰어노는 것과 마리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큰 소리로 축복을 합니다. 자신을 드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마리아가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복 받은 여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라고 한 드보라의 말을(삿 5:24) 연상시킵니다.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메시아를 출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태의 열매가 복되다”라는 엘리사벳의 말은 신명기 28:4의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그 말씀은 율법에 순종한 자에게 임하는 복을 선언한 것인데, 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메시아인 것을 알고 그 아이를 주라 부르며 축복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마리아가 낳을 아기를 가리킵니다. 이제 막 잉태한지라 겉으로 보아서는 마리아가 임신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과 그 태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마리아의 음성을 들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이인 세례자 요한이 기뻐 뛴 것도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요,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갖지 못했던 사라에게 이삭을 낳게 하셔서 큰 기쁨을 주셨듯이(창 21:6~7), 나이 많은 엘리사벳과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하게 하심으로 온 세상이 기쁨을 얻게 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마리아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한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축복처럼 마리아는 복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가 택함 받은 것은 그야말로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아무런 자격이 없던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깨닫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은 마리아는 이제 성령의 감동으로 찬송을 합니다.

마리아의 찬송(46~56절)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화답합니다. 그녀의 찬송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와의 만남을 통하여 깨달았고,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하여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46~48절)
마리아의 찬송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고 내 마음이 구주 되시는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하며 시작합니다. 단순히 1인칭 대명사 ‘나’를 사용하지 않고 ‘내 영혼’과 ‘내 마음’(직역하면 ‘내 영’)을 주어로 내세운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왔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내 구주’가 되신다는 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눈물로 기도하다가 아들을 얻고 나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기도하던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찬양을 연상케 합니다. 분위기나 사용된 단어들이 아주 비슷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하 2:1, 7)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할 수 없는 비천한 처지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녀의 비천한 상황을 돌아보셨고 장차 그녀에게서 태어날 아들로 인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복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마리아가 누구이며 그녀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비천함’으로 번역된 단어는 이사야 40:2에서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참함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로마 제국이 임명한 헤롯 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비참함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한나의 찬송처럼 개인의 구원 차원을 넘어 민족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은 그 크신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의 원천이며 기쁨의 근거입니다. 우리도 돌아보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 큰일을 행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49~53절)
마리아의 찬송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소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하며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모든 세대에 걸쳐 변함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팔’은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신 26:8). 마리아는 곧 오실 메시아를 통해 새로운 출애굽이 발생할 것을 기대합니다. ‘흩으셨다’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서 나오는데(민 10:35; 느 1:8), 흩으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대적들이나 불순종한 이스라엘입니다. 마리아의 찬송 속에서는 하나님이 흩으시는 대상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로 언급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바벨론이 ‘교만한 자’라고 불리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사 2:12; 13:11).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보면, 마리아가 염두에 둔 교만한 자들은 제2의 바벨론인 로마 제국을 가리키며 그들도 바벨론처럼 심판받으리라고 기대한 듯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반면에,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합니다. 이어지는 두 구절에는 대비와 역전의 양상이 더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리시지만, 비천한 자는 높이시고, 주리는 자들은 좋은 것을 먹이시고, 부자는 빈손으로 가게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 주리는 자와 부자가 대비되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다고 노래합니다. 부와 사회적 권력에 대한 비판적 관점, 반대로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모티프이기도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판단하시고 그것에 합당하게 보응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54~55절)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을 지킬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마리아의 찬송에서 “두려워하는 자”“비천한 자”“주리는 자”로 소개된 자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언약대로 실행하신다고 노래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영영 잊으셨다고 낙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드디어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붙은 ‘종’이라는 호칭은 이사야 40~53장에 나오는 네 편의 ‘주의 종의 노래’에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실현하기 위해 부름 받아 사명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마리아의 찬송 마지막에는 구약성경의 여러 언약과 관련된 인물 중에서 대표로 아브라함이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후손, 땅, 그리고 만민을 위한 복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과거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3개월간 함께 지내다가 나사렛으로 돌아갑니다. 36절(“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과 연결하면,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출산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3개월이 지났으니 마리아에게 임신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것이 드러나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상황은 너무나 불안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확신을 가지고 평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기꺼이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하였을 때 기적을 체험하였고, 그 결과 감격 속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와 만남,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깨닫고 자신에게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모호한 이해와 피상적인 지식으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안목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둘 때 생깁니다. 신앙의 기쁨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의 내용을 보면 구약의 말씀이 많이 녹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들, 즉 전능하심, 거룩하심, 자비하심, 신실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는 단순한 시골처녀가 아니라 평소에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체험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체험은 제한적입니다. 체험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누구신지, 그가 무엇을 하셨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 알게 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1:37)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앞으로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결과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순종을 기뻐하셨기에 엘리사벳의 찬송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영광스러운 ‘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수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성령 안에서 교제를 나눕니다
마리아가 석 달쯤 엘리사벳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놀라운 구원 약속의 성취를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그들의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적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각자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하게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기쁨에 넘쳐 주님을 찬양하는 최고의 태교를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친구가 필요합니다. 특히 삶에 위기를 맞이할 때 더욱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일 더하기 일은 둘입니다. 그러나 일 더하기 일이 둘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도 되는 것이 시너지 효과입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섬길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풍성하여집니다. 가족끼리 (부부, 부모와 자식, 고부 간), 교우들끼리 (목사와 교인, 교인들, 목장 식구들, 사역부서원들 간), 이웃들끼리 (직장 동료, 사업 파트너, 이웃 간) 두 여인들처럼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고 격려하며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해 하나님이 펼치신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 축복과 위로를 받은 마리아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먼저 비천한 자신을 은혜롭게 대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마리아 앞에 놓인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얼마든지 두려움과 걱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아직 어떤 일도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찬양은 개인적 감사 찬양으로 시작해, 공동체적 감사 찬양으로 나아갔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척도는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기쁨의 영성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확신한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감격과 그 계획 가운데 담겨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합니다. 엘리사벳, 마리아, 심지어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도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내용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일들 중 기억나는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 당시 이를 기뻐하며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기다리는 이 계절에 기쁨의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큰일을 행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처럼 서로 축복하고 받은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회복의 절기입니다. 미움 대신에 사랑을, 절망 대신에 소망을 주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받으려하기 보다 주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족 간에, 교우 간에, 이웃 간에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영혼으로 주를 찬양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품으면서 진정한 회복을 이루며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다”는 담대한 고백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