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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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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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발간한 퓨 리서치 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의 66%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주류 개신교인들은 71%가 믿는다고 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비율은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진리는 천지 창조 진리 못지않게 중요한 진리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면 성경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누가의 이 증언을 굳게 믿고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나이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엘리사벳을 선택하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자 요한을 낳는 그릇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를 선택하여 메시아를 낳는 그릇으로 삼으시려고 합니다. 사실 엘리사벳의 임신은 마리아의 초자연적인 임신의 예고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천사가 전해 주는 말을 듣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리아의 순종을 기뻐하셨기에 엘리사벳의 찬송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내 주의 어머니’(1:43)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붙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을 알려주는 이 사건을 살펴보면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며 큰 상급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26-29절)
누가는 이제 스토리의 전개를 세례자 요한에서 복음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옮겨갑니다. ‘여섯째 달에’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연결시키는 연결 고리와도 같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의 탄생을 선언하십니다. 구속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날이 다가온 것입니다. 가브리엘의 방문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구속 드라마의 각본과 연출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의 로마 속주 중 한 구역으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마 4:15).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라는 언급은 나사렛이 잘 알려진 마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요 1:46).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한 조그만 산동네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그때 나다나엘이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그런 시골에서 인물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람어 ‘마리암’의 라틴어 표현입니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나사렛의 헬리였고 어머니는 베들레헴의 안나였습니다. 캐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죄가 없는 여인으로 신격화하지만 신약성경에 나타난 마리아는 그저 평범한 시골 처녀일 뿐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다윗의 가문에 속한 청년인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정혼은 동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약혼과 비슷하지만 법적인 구속력이 더 강했습니다.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결혼을 한 것이기에 정혼을 파기하려면 이혼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정혼 관계에서 부부가 되려면 신랑은 신부 측에 지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마리아의 나이가 언급되지 않는데, 당시 상황에서 12세~14세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결혼은 약혼과 약 1년 뒤에 치러지는 결혼이라는 두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약혼 시점에서 두 사람은 이미 부부 관계로 간주되었지만, 결혼식을 치르기까지 여자는 남편과 동거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처녀’는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성을 통칭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성관계 경험이 없는 여성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마리아 앞에 ‘처녀’라는 말을 3번이나 반복하면서 처녀인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그릇으로 특별히 선택받은 것을 강조합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평안할지어다”(헬라어 직역은 ‘기뻐하라’)라는 통상적인 인사와 함께 마리아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받다’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이 마리아에게 이미 임했으며, 지금도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심’도 현재형으로 주께서 마리아와 현재 함께 계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가 깜짝 놀랍니다. ‘놀라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동요하다, 불안해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자로 선택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신분을 가졌거나 경건한 생활을 더 깊게 하였거나 전혀 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만한 그릇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태어날 아이에 대한 예언(30~33절)
가브리엘이 또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리아는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와 달리 아이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의 잉태는 부부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인 반면, 예수님의 잉태는 전적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하라고 지시합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름까지 친히 지어 주십니다. 마리아에게 주어진 말씀은 상식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역사적으로 볼 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마리아는 남자와의 성관계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놀라운 것은 그 아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용어나 구조면에서 그 예언은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과 병행을 이룹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전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하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7:9) 큰 자가 되고(32)
그의 나라 왕위를(7:13) 그 조상 다윗의 왕위(32)
내게 아들이 되리니(7:14)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32)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보존되고(7:16)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33)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7:16)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3)
또한 창세기 3:15에서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실 것을 예언하였고, 이사야 7:14에서 메시아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 성경의 약속의 성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한에게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15)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예수님께는 ‘주 앞에’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평가를 받지만, 예수님의 위대함은 아무에게도 평가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더 우월하며, 절대적으로 위대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보통 여자의 임신은 남녀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지만,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임신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처녀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야만 했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구원 사역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속하실 존재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인지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녀인 마리아를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그릇으로 선택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면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동정녀 탄생 사건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34~38절)
가브리엘 천사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사가랴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자기 부부에게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눅 1:18).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을 때 사가랴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벙어리로 있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보는 것이나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듣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기에 당황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지만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은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하면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지 반문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다’는 말은 성관계를 나타내는 히브리식 완곡어법입니다. 이에 천사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이 일이 성령의 역사로 가능함을 알려 줍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의 덮음”이라는 표현은 ‘성령의 임재’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임하다’와 ‘덮다’는 단어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증거로 엘리사벳의 예를 듭니다. 나이 많아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친족 엘리사벳도 이미 아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이 숨어 있었기에 마리아는 그녀의 임신을 몰랐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은 마리아에게 표적이 되어,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리라는 확신을 주는 동시에,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차이점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나이 들어 불임 상태였던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임신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브리엘이 결정적인 말을 한 마디 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구약 성경에도 이 말씀이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약속을 주셨지만 사라의 나이 90세 될 때까지 자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경수가 끊어진 여자가 무슨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아브라함이 물었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사라로 하여금 임신하게 하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씀의 능력을 설명하는 이유는 이 중요한 약속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마리아 자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그의 말을 통해 과거에 사라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가 이제 마리아에게도 일어날 것임을 암시합니다.
마침내 마리아가 결단을 내립니다.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보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그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마리아의 대답은 짧지만 선명하고 단호합니다. 주님이 뜻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주의 여종이오니’라는 표현과 ‘내게’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주님의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몸소 보여 줍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게’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비천한 자기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드리겠다고 하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메시아는 이렇듯 한 여인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믿음의 바탕 위에 시작되었습니다. 참 신앙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의 구주가 되시며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자세
본문을 보면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어떤 자세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만이 자신의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듯이 성도는 하나님이 열어주신 구원의 길에 믿음으로 겸손히 들어서야 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믿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종입니다. 구체적인 순종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결정하신 것에 믿음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귀신들려 툭하면 심히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엎드러져 거품을 흘리던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와 함께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막 9:22). 그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면서 그 아버지의 믿음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에 그 아버지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9:24).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 집의 문제는 귀신들린 자기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진짜 문제는 믿음 없는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며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아이가 온전해졌습니다. 혼돈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영인 성령과 말씀이 불임의 여인 엘리사벳의 태를 여셨고 이제 처녀 마리아에게 생명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능력 있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한 새 창조와 새 생명의 역사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근본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부활과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는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능력임을 믿어야 합니다.
-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둘째주일이면서 성서주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이었기에 성경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성서주일이 대림절 기간에 있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은 조건적입니다. 신 28:1-14, “네게 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 복을 주겠다”15-68, “네가 만일 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 저주가 임한다”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인간 편에서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왕의 부름이 없이 왕의 앞에 나아가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몰랐으나 에스더는 삼일을 금식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다”(에 4:16) 라는 각오를 가지고 아하수에로왕 앞에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 유다인들을 멸망 직전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풀무 불에 던져질 상황에 처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설령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풀무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였을 때,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살아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쓰임 받은 사람들은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했다는 것은 부정을 저질렀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부정에 대한 형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처형은 면한다 하더라도 파혼당해서 수치와 모욕을 받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약혼자 요셉은 처음에 파혼을 결심할 정도였습니다.(마 1:1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취사선택해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납득이 되고 손해가 덜 되는 말씀에는 쉽게 결단하고 순종하지만, 그렇지 않은 말씀은 순종하기를 주저한다는 점입니다.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참된 순종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가면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일어나게 될 일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을 믿으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믿음은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해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믿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맡기자 그의 근심과 걱정은 나중에 찬양으로 바뀝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응답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신다는 자체가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는 데는 누군가의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오병이어를 드린 소년처럼,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처럼 새끼 나귀를 순순히 드렸던 나귀 주인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에 참여하는 신실한 자들, 경건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진정한 헌신은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한다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손해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헌신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믿을 뿐 더러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또한 그분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십니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고 어두움을 빛으로 만드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